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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지젝

책 쓰는 이야기

2026년 4월 1일 by 이상한 모자

진보라는 사람들 일상을 봐도 진보적이지 않은 생활 태도는 어김없이 드러난다. ‘배우자 등처먹고 사는 활동가’라는 전형은 어떤가? 50대 남성 활동가가 사는 집에 가서 한 일주일 쯤 같이 지내봐라. 이런 사람이 무슨 진보를 논하나 싶은 장면이 여럿 나올 것이다. 비율로 따지면 일반인보다 낮기야 하겠지만.

그러나 현실 정치라는 건 어떤가? 이런 사람들이 진보적 정치를 지지하고 진보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어찌됐건 세상은 진보적이 되어가고, 이런 존재조차도 변해가거나 도태되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1) 어떤 개인들이 얼만큼 진보적이다 2) 어떤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한다 3) 어떤 사람들이 진보정치로 조직 혹은 동원된다… 라는 것은 같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여러 번 얘기하지만 극우도 마찬가지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서구를 봐라. 서구의 극우정치는 그렇게 잘 분석하는 분들이 자기나라 얘기는 왜 기본적인 ABC도 못 맞추나. 정치학자라는 분이 엊그제 신문에 쓴 글 보고 든 생각이다. 그 뿐만이 아니고 이런 류의 글을 잊을 만하면 어디든 간에 올려대는 일군의 사람들 때문에 피곤하다.

답답하니까 빨리 책을 내야한다 라는 생각을 하지만, 손을 안 대고 방치한 지가 오래되었다. 어찌어찌 정리하면서 구제책을 찾는 중인데, 오늘은 출판사 사장님을 만났다. 상반기에는 바쁘다고 하신다. 그래도 연내에는 될 것 같다. 어차피 선거 전에 안 된다면 천천히 가자. 안 팔리더라도 할 수 없다. 이외에 작년에 거든 다른 공저가 좀 있으면 아마 나온다. 나오나? 내가 듣기엔 그렇다.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원고를 넘긴지 열 달은 된 것 같은데, 이것도 참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좀 가벼운 걸 또 쓸 것이다. 뉴스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닌,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대의명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뭔가 끊임없이 뭔가를 쓴 작업을 한 것 같은 사람이 된다. 성과를 장담하긴 어렵지만 뿌듯함이 있다.

최근 라클라우의 작업을 흝어 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뭘 하듯, 난 몰랐는데 내가 하여간 포퓰리즘 얘기에 있어서는 이미 라클라우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분은 이걸 이미 20여년 전에 다 정리했다. 이 책이 올해 초에 번역된 이유가 다 있구나, 생각했다. 이 얘기를 접목하여 작년에 쓴 얘기를 손질하면 더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판매량에 있어서는 늦어진 게 별로 좋지 않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늦어진 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느낀 것. 대가는 책을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구만. 물론 실제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았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러나 내가 만약에 책을 이렇게 쓰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저번에 편집자님이 얘기해 준 바, 내가 옛날에 쓴 책의 리뷰에 어떤 놈이 ‘못 배운 티가 난다’고 썼다고 한다. 난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반응이지만, 그러나 자꾸 떠오른다. 배운 놈만 책 쓰라는 법이 있나? 그러면 평생 못 쓴다. 또, 배웠다면 어디까지 배워야 하나? 저자 되기에 자격은 뭐가 필요한가? 대학 졸업장? 석사? 박사? 네 주제에 맞는 얘기나 써라 이건가?

근데 라클라우 책에 보면 말이다. 자기들끼리도 못 배운 티가 나네 마네 싸우더라고. 지젝에 대한 반론이 끝에 나오던데, 쟁점은 이런 거지. 라클라우가 포스트막시스트다 이거잖아? 당신 개념대로 하면 최종심급이 경제가 아니고 계급갈등이 근본 모순도 아니지 않느냐! 라고 지젝이 그러는 건데, 거기에 대해 라클라우가 넌 내가 하는 얘기를 좌파연하느라 일부러 못 알아먹은 척 하고 있구나! 라면서 근데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진정한 투쟁’은 어디있냐? 화성인이라도 기다리는 거니? 라고 하는 뭐 그런 논쟁이다. 그러니까 ‘대가’들도 이런 논쟁이나 하고 있었던 거지.

뭐 이런 논쟁도 배부른 얘기이겠습니다만… AI와 주식투자와 유튜브의 시대에… 아무튼 그리하여 돌고돌아 올해는 또 어떤 방향이든 이런 쪽으로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말씀. 밥 먹고 좀 있다가 일본 드라마 본 이야기도 남길 생각.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정치, 라클라우, 지젝, 포퓰리즘

이단이 되어야

2025년 8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맞춰주는 것이 직업이 된 상태지만, 내가 왜 그러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한겨레의 지선생 글에 대해 잠시 소개를 했다.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했다. 문장 하나 하나를 잘 읽어야 진의가 이해되는 글일 게다. 사실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글이란 다 그렇다. 남이 쓴 글이란 대개 항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내용을 재단하고 떠들만한 것이 아니다. 쓴 사람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그래서는 안 된다. 제대로 읽는 것이 우선이다. 제대로 읽으면 글이 뭐가 잘못됐고 뭐를 하자는 얘긴지 다 보인다.

가령 지선생은 이렇게 썼다.

“희망 없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테의 지옥 입구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진정한 급진 정치는 바로 이 지점, 현 체제에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책은, 저로서는 이러한 인식을 갖고 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최근에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뭐 상관없다. 내가 쓴 글, 내가 하는 말을 전세계인이 잘 읽고 귀담아 듣고 기억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어차피 없다. 다들 멋대로 생각해도 괜찮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희망은 없고 무엇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 들여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집단자살이라도 해야 할까? 글을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앞서 문장에는 “현 체제에서는 변화가 불가능”이라고 돼있다. “현 체제에서는”이라는 단서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선생은 이렇게 썼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원칙을 지닌 실용주의다. 인류의 생존이라는 핵심 목표에 집중하되,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사용하지만, 필요하다면 국가 통제나 대중 동원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는 양가적인 것들이 한 바구니에 들어가있다., 원칙과 실용, 국가 통제와 대중 동원, 그리고 양자 모두와 대비되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가령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두 적은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양자가 모두 대안이 아닌 것을 익히 안다. 그 사이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성과는 없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도 봤듯 이 체제에서는 희밍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정치를 통하여 체제를 넘기 위해서는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을 둘 다 멀리하는 게 아니라, 둘 중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지선생은 이런 예를 들었다.

“최근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와 결별한 뒤 아메리카당 창당을 선언했는데, 이런 시도는 사실 좌파가 먼저 해야 했을 일이다. 버니 샌더스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와 같은 미국 민주당 내 좌파는 썩어 문드러진 민주당에서 나와 새 정당을 만들어야 했다.”

아하, 신당이라는 고루한 선택지인가? 그러나 이게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왜 하필 머스크의 아메리카당인가? 거기에 대중적 에너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저런 입장의 차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에너지를 따라 실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선생은 다음 문단에서 그 점을 확실히 한다.

“티에스(T. S.) 엘리엇은 믿음을 위해 이단을 저질러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레닌이 전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그렇게 했고, 오늘날에는 좌파가 뭉그적거리며 이단적 결별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역설적이지만 트럼프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렇게 했다. 이제 좌파는 선입견을 버리고 애국심이나 가족과 같은 가치조차도 적에게서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글에도 나오지만, 레선생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지 않고, 현실에 이론을 맞췄다. 멘셰비키와의 분열은 적어도 이론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은 당시의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해법이 아니다. 그러나 레선생은 갖가지 이론 투쟁을 벌여, 러시아 혁명이 정통적인 해법이라고 우겼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세계가 바뀌었다. 실제 마르크스는 괴테를 인용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레선생의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의 부정을 속에 품을 때에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그것이 이단적 결별이다. 트럼프를 레선생에 비교하면 좌파로서는 기분이 나쁘겠지만, 어쨌든 트럼프네 식구들이 WTO체제 종료를 선언한 것은 그러한 순간을 잠시 연상케 하는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애국심이나 가족과 같은 가치”가 핵심이 아니고 “이단을 저질러야 하는 순간”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신당을 무작정 창당하면 이단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는 것일까? 이것은 지선생식 신당 창당 노선인 것일까? 지선생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단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진실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에만 자족하는 신생 소수 정당이나, 선거 때마다 의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떨어야 하는 정당으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헤게모니를 쟁취할 가능성이 있고 실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이단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 지선생의 글이 레선생주의적 실천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는 알 수 있다’고 썼지만 사실 자신은 없다. 또 딴소리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당위는 주장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가령 코빈의 ‘당신의 당’은 레선생적인 무언가가 될 수 있겠는가? 독일의 BSW은 실패한 레선생적 시도의 찌꺼기인가?

이단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과 고통은 그 자체가 구심의 해체, 즉 원심력의 심화를 불러 온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령 4월 테제 이후 상당 기간 레선생은 왕따였다. 우리는 과거 secret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뭘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상대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있다. 이미 우리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남을 통해서만 규정할 수 있다. 이단을 자처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기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야 말로, 이단을 자처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에, 이단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레닌주의, 지젝

지선생 글로 보는 교훈

2021년 7월 19일 by 이상한 모자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003999.html

모든 글은 자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식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가령 자본주의를 반대하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인가? 중국의 사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반대한 것의 실천적 결론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더블민주당에 대한 반대가 현실에선 국힘이나 윤석열로 귀결되듯, 끝도 없이 반복돼온 반대의 정치는 대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혁명의 외피를 뒤집어 쓴 자본주의 내의 핑퐁게임으로 귀결되어 왔다. 진보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쟁취해왔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였다.

현실 정치를 돌아봐도 그렇다.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심지어 이란도 그렇다. 일국의 정치 내에서는 각각의 정파가 서로를 반대하는 정치적 내전을 벌이지만, 그 결론은 언제나 글로벌 자본주의로의 편승이었다. 좌파를 반대하는 우파와 우파를 반대하는 좌파, 다들 마찬가지다. 양당을 반대하는 진보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교수인 나카노 고이치 씨는 일본 정치의 극우화 경향에 대해 진자운동의 축이동 이라는 틀을 갖다 댄다. 무슨 얘기냐면, 일본의 리버럴 정치가 진자를 왼쪽으로 아무리 밀어도, 한쪽으로 쏠렸던 진자가 진자운동의 원리에 의해 다시 돌아올 때는 진자의 축 자체가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는 탓에 그 결과는 우측으로의 더 심화된 백래시가 된다는 것이다.

나카노 고이치 씨는 실천적 결론으로 제대로 된 리버럴 정당의 건설을 주장하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진자운동의 축이동이라는 개념 자체는 쓸만한 데가 있다. 축은 좌에서 우로 움직이고 있다기 보다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글로벌 정치경제체제의 경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애초 자본주의는, 그걸 뭐라고 부르든, 그러니까 군주제라 부르든 봉건제라 부르든 뭐든 간에 전근대를 반대하는 것의 맥락으로서 발명되었다. 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근대로의 이행으로서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 이 덕에 지금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많은 경우에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모순으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필요를 부정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종 정치적 자유의 제한으로 오도된다.

중국이 보여준 것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분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 권력은 과거와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더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미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 정치에서 권력을 쥐고 있지 않은 쪽이 오로지 반대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흐름을 반대하는 좌파의 기획은 무엇인가? 이 가능성을 중국이 아이러닉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더 보태자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체제의 최대 수혜자들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실효적으로 만들 때에야 가능하다. 중국은 그게 오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당 체제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공산주의, 반자본주의, 중국,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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