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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일본 할아버지 만화영화 보고 한 생각

2023년 11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일본 할배의 만화영화를 보러 갔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풍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아 굳이 볼 생각은 없었지만, 다들 대실망이라고 하기에 급 흥미가 생긴 것이었다.

2차 대전과 그 후의 그 시절은, 그러니까 그런 거다. 죽음과 맞닿은 전쟁을 하던 그 논리로 재건과 생산으로의 동원을 정당화했다. 전투기 엔진 만들던 설비를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데 투입했다. TV, 전기밥솥, 세탁기가 현대적 ‘3종의 신기’로 등장했다. 전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아이러니다. 죽음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삶이다. 1941년생인 일본 할배의 성장기는 그런 때였다.

전쟁과 불길로 소멸한 엄마를 찾고 싶은 본의와 순산이라는 현실의 생산을 맡아야 할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탑으로 돌입하는 주인공은 마치 이상과 생계를 저울질하며 대중예술에 투신하는 할배의 초심을 말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창작이라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거나 혹은 감수하는 세계이고, 동시에 죽은 세계이면서, 죽은 것에 삶을 불어 넣는 세계이다. 창작물은 녹아내린 가짜 엄마나 깨져버린 장미처럼 살아있지 않다.

거기에 삶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아직은 늙지 않은 할머니처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면서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펠리컨들의 침공은 곧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다. 젊은 상태의 엄마가 팰리컨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의 씨앗들도 어쩔 수 없이 불태워지는데 이건 전쟁의 논리다. 더군다나 펠리칸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좋아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이상이랄까 그런 것을 찾아 달려온 것이지만 그 안에도 죽음으로 삶을 혹은 삶으로 죽음을 정당화 하는 논리 즉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탑 안에서 꿈과 환상의 모험을 쫓은 끝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에 도달하지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주인공에게 네가 싫다고 말하는 그의 본심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전처의 자식이다. 좋을리가 있겠나? 그런데 거기서 주인공이 또 깨닫게 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동질성, 즉 이상과 현실의 어떤 융합이다. 그 둘은 자매이면서, 같은 자식의 어머니가 될 운명을 지고 있다. 애초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은 현실의 인물이면서 왜 탑에 이끌렸는가? 경위야 어찌됐든 그도 나름의 이상이랄까 명분을 품은 것이다. 주인공을 어른스럽게 대하지 않고 싫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속내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들 자매는 같다고 해도 좋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한쪽하고는 거리를 두면서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며 울며불며 쫓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고 “나츠코 엄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험의 클라이막스는 업계의 정점에 달한 일본 할배 그 자신을 마주하는 씬일텐데, 만들어 놓고 보니 자기 혼자 외골수로 도를 추구한다고 뭐가 되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게 뭘 해봐야 세계는 고작 하루 정도 연장될 뿐이며, 그렇게 만든 세계마저도 야심가가 이끄는 군국주의 잉꼬 집단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이 야심가는 나름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이 빤하고 속물적이다. 믿을만한 후계자를 세워 세계를 유지해볼까도 하지만 사실은 의미가 없는 몸짓이다. 자기가 만든 세계 안에서도 전쟁과 죽음, 삶과 생산과 이 사이를 잇는 기만은 계속된다(여기까지 왔으면, 어느새 그것이 자연이며, 생명이다!). 애초에 세계를 유지하는 동력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그게 대중이든 자본이든 뭐든)에서 왔다.

그러한 끝에, 군국주의 잉꼬가 고귀한 이상 혹은 심혈을 기울인 유산을 끝내 망쳐버린다면? 그래도 친구를 남겼으면 된 게 아닌가? 애초에 이렇게 되기 훨씬 전의 어떤 시점에 뭔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친구를 택해야 됐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왔는데도 남긴 게 없다고 하면, 그래도 ‘나츠코 엄마’를 현실에 돌려주는 일은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거다.

이게 뭐랄까, 전쟁의 가해자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한 피해자일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공범의식을 가질 수도 없는 그 세대 일본인들의 은퇴 심경 같은 거라고 하면 어떨까? 아무튼 어떤 공감이 될만한 얘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만든 거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70대 노년층이 보면 만족할만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그런 얘기.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지도자 없는 시대의 지도자

2023년 11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무슨 사진을 보았다. 노통이 가운데서 뭔가를 발표하고 옆에 젊은 추전장관님 등 왕년의 유망주들이 펼쳐 선 광경이다. 이때도 다들 3김시대는 끝났다라고들 했는데, 그래도 지도자는 있었던 거 같다. 지금은 지도자가 없는 느낌이다. 윤통은 지도자이신가? 방송에서 윤통의 여러 논란 때마다 지도자답지 않은 모습에 대한 지적을 많이 했다. 지지율 하락 요인으로 지목을 하기도 하였다. 다들 귀담아 듣진 않았겠지만.

지도자답다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은 내가 나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말고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가령 최통령 이전의 박통령은 지도자다움이라는 게 있었다. 또 지도자답다는 것은 그저 권위주의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돌아가신 노의원님도 기타치는 흉내로 우릴 웃기지 않았던가. 지도자라는 분들은 우리더러 어디로 가자고 하는 분들이고, 그러한 바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인정을 받는 분들이다.

윤통은 자유민주주의니 하면서 자꾸 어디로 가자고 하는데, 그걸 인정받고 있지 않다. 같은 편끼리도 그걸 진심으로 믿는 거 같지 않다.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따를 뿐이다. 권력이 없어지는 순간 다 신기루가 될 것 같다. 민주당에 이대표님은 어느 순간부터 어디로 가자는 얘기가 없다. 한때는 그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장동 이후 들어본지 오래됐다. 정의당이니 뭐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좁은 바닥에서나마 그나마 지도자 노릇 하는 게 이준석씨라는 현실이 당혹스럽다. 토요일에 방송에서 두 가지를 얘기했다. 1) 이준석의 TK가 오히려 우경화를 견제해야 한다는 보수개혁 논리는 들어볼만 하다. 2) 이준석은 애초 신당 창당에 대한 잘 준비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보수개혁에 대해서만 준비가 돼있었는데, 제3지대 신당에 대한 기대까지 흡수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보수개혁 논리를 넘는 액션을 취할 필요가 생겼고, 그러면서 보수신당과 제3지대신당 창당 논리의 간극에 따른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제작진 중 누가 그랬다. 1)은 들어주기 어렵고 2)는 공감하였다. 나는 의문이다. 1)이 납득 안되는데 2)가 왜 공감이 되나? 마찬가지다. 1) 이준석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지금은 거의 유일한 지도자다운 지도자이다. 2) 우리는 그러한 당혹스러운, 황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1)이 있기에 2)가 있는 것이다. 1)을 인정해야 2)를 말할 수 있고, 그 뒤에 올 3)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의 8할은 현실을 인정조차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리더십, 지도자

애증의 제3지대

2023년 11월 11일 by 이상한 모자

이제는 언젠지 기억도 힘든 그 어느날 어느 분이 전화를 해 금모가 제3지대를 한다는데 정의당도 거기로 가야 되는 거 아니겠느냐 하시기에 정의당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답한 일이 있다. 특히 뒤로 갈수록 어중이 떠중이 다 들러 붙을텐데 그러면 또 온갖 논란이 불거질테고, 그거 버틸 수 있겠느냐… 그랬는데, 여하튼 오늘부로 그런 인물들 중에 이전대표님이 추가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자리에선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있다. 제3지대 논의에 수세적으로만 갈 수도 없는 거라면 선거연합 수준의 논의를 공세적으로 던질 수는 있지 않겠느냐. 정책 수준에서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먼저 긋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면서 선거구 조정 등을 전제로 해서 제3지대 논의를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식의… 그냥 밥먹다 내뱉는 수준이었긴 했으나 이정미 지도부의 정의당이 정해놓은 것과는 방향이 다른 얘기였다. 뭐 이제와서는 아예 전제부터가 불가능한 얘기가 됐으나…

밖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왜 다들 얘기를 저렇게 밖에 못 풀지 하는 심경인데, 내부를 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고, 그걸 알면 또 다른 생각이 들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다들 이준석 신당의 양극단 전망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평가할 점이 있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고 본다. 실제 만들어질 당의 사이즈나 성적과 관계없이 TK에서 꾸준히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대선 후보 경선 당시에 대구 당원들이 자길 지지해줘야 당 밖에 있는 용감한 검사(?)가 안심하고 입당할 수 있게 된다고 대구 한복판에서 주장한 것이나, 대구 보수 유권자들이 우경화를 용인하지 않아야 국힘이 바뀐다고 주장한 것 등은 확실히 일관된 자세다. 몇 명이 출마하든, 당선자가 있든 없든, 일정한 숫자 이상의 유의미한 지지율이 확인된다면 보수정당사로 볼 때 그것만으로도 어떤 성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의문인 건 그런 구상과 그게 제3지대든 수권정당이든 큰 도둑이든 뭐든 ‘스펙트럼이 넓은’ 어떤 정당이라는 구상하고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이전대표님은 오늘 그게 잘 버무려질 수 있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가령 아주 단적으로 말해 양당과 구별되는 대선플랫폼이 될 수 있는가? 아주 단적인 아주 이른 가정을 말하자면 금모와 대선후보 경선을 해가지고 이긴 사람이 독자완주하는 그런 정당인 것인가? 아니면 총선 성과를 가지고 우여곡절 끝에 양당 중 하나를 잡아먹는 정당인 것인가? 잡아먹는다면 양당 중 어느 쪽인가? 종종 앙마르슈를 말하지만 거기도 먼저 기반이 된 쪽은 사회당-우파였다. 앙마르슈라고 치면, 마크롱은 이준석인가 금모인가? 이런 질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게 뭐든, 어쨌든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아니다. 뭐가 됐든. 그래서, 나는 그런 여러가지 시도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높이 평가할 마음은 충분히 있지만, 진심으로 어떻게 해볼 마음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배도 고프고 답답하여 썼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제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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