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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능력주의

진보와 보수가 하나인 세상

2021년 5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어떤 분과 대화를 했다. 그 분이 그랬다. 앞으로 한국 정치는 이준석류의 능력주의가 주류가 될 것이다. 내가 말했다. 박권일 선생을 비롯해 우리 입진보들이 계속 주장해오던 바가 그거 아니냐!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을 것이므로 그에게 항변할 것은 아니었다. 항변의 대상은 국정농단 이후 무슨 진보의 세상이 온듯 떠들어댔던 사람들이다. 2018년 지방선거가 정초선거였다느니… 여론조사를 해보면 ‘내가 진보’라는 답변이 더 많이 나온다느니…

위 주장이 가능하려면 다음의 등식이 성립해야 한다. 1)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보’는 정파가 아닌 가치 지향이다 2) ‘진보주의자’는 반드시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표한다 … 둘 다 아니라는 걸 보여준 게 지난 재보선이다. 샤이 진보?

트로츠키가 벌써 얘기했다. 계급과 정파를 혼동하면 안 된다. 가령 노동자 정당이 집권한다는 게 노동계급이 국가를 장악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전선은 계급연합조차 아니다. 여기서 하나 더할 것은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의 지향이 아니라 무엇에 반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정파가 조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란 답변은 ‘보수세력이 싫다’는 것이며 ‘나는 보수’란 답변은 ‘진보세력이 싫다’는 거다. 중도는? 이짝도 저짝도 싫다는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걸 혼동하니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이준석류가 주류가 될 것인가, 그것의 양상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하바드 졸업생, 코인-투자자, 이대남 전문가… 이런 것들을 그저 인정하고 끝내는 사회가 아니다. 누구라도 다른 누군가보다 나은 출발선에 섰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박근혜 키드, 유승민 인턴… 이런 것들이 또다른 ‘반대’의 구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이준석을 메꾸는 자가 능력주의적 기준에서 더 완벽한 기준을 충족시키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원래 능력주의에서의 능력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권일 선생은 그놈의 페이스북에다가 최후의 능력주의자는 반능력주의자이다 뭐 그런 얘기를 쓴 일이 있는데, 사석에서 그거 선생님 말씀입니까 하니 그렇다고 답을 했다. 박선생님 말씀과는 좀 결이 다를 수 있겠지만 가령 이건 어떠냐? 경기고 서울대법대 대법관 국무총리 출신 이회창과 아무런 엘리트 코스의 배경없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노무현 중 더 능력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답이 어렵기 때문에 대다수 인민들에게 있어 능력주의란 자기 이익을 보장하는 하나의 구실로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게 상대 정파에 대반 반대와 결합한 게 정치에서의 능력주의다. 아무도 정치적 가치에 관심이 없음에도 정파가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여론조사상 ‘나는 진보다’와 ‘나는 보수다’는 어떤 차원에서는 사실상 같은 답변인 거다. 마찬가지로 <어떤 차원에서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대로서의 극우포퓰리즘,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반대로서의 엘리트주의도 같다. 트럼프와 바이든은 같다. 한미정상회담을 보고 느꼈어야 할 게 이거다.

처음 하는 얘기 아니고, 2019년 8월달에 쓴 글을 함 읽어봐라.

http://www.newsmin.co.kr/news/41156/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능력주의, 이준석

능력주의와 반지성주의와 계급론

2021년 2월 4일 by 이상한 모자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20120131321209

지금보다 좀 더 젊고 기운이 넘쳤던 시절에 계급 문제의 인식 폭을 넓히게 된 계기는 김선생님이 에릭 올린 라이트(명복을 빈다)의 계급론과 폴 윌리스의 저서를 소개해준 거였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해머타운의 싸나이들(lads)은 성차별주의자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인다. 폴 윌리스가 여기서 발견한 것은 이들이 공교육에 저항하며 주체적으로 노동계급문화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사회적으로 계급이 재생산되는 중요 요인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이건 영국처럼 계급적 분화가 분명한 사회 조건에서의 얘기고, 다른 조건이면 또 달랐을 거다. 가령 오늘날의 미국이었다면 이들은 백퍼센트 트럼프 지지자가 된다. 지금 영국에선 아마도 브렉시트… 아무튼 그래서 반기득권적 문화 즉 저항이 어떤 긍정적 적극적 대안적 방식으로 조직화될 수 있느냐,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숙제이다.

가령 반지성주의를 말하지만, 반-지성의 ‘지성’은 뭘 말하나? 과학… 백신 왜 안 맞냐? 백신을 둘러싼 일련의 과학적 지식과 체계가 ‘우리’가 아닌 ‘엘리트’의 것이기 때문에(물론 나는 백신-자본은 의심하지만 백신-과학을 신뢰한다) 냉소주의적 접근, 그러니까 의심을 하는 거다. 그게 프랑스 같이 똑똑한 사람들 모여있는 데서도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는 이유다. 이런 맥락을 따져보면 사실 반지성주의라는 명명 자체가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다. 호스스태터는 1955년에 ‘개혁의 시대(The Age of Reform)’를 썼는데 거기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미국 민중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의 핵심은 그의 주장대로 ‘반지성’이 핵심이 아니라 반기득권적 저항과 ‘대안부재’의 만남이다.

극우포퓰리즘은 여러차례 얘기하지만 반기득권적 저항을 ‘거짓 대안’과 짝지은 결과물이다. ‘거짓대안’은 사회적 코드로서의 껍데기 뿐인 자유주의,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 특정 계층이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합을 다시 한 번 퇴행적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좌파는 ‘대안부재’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권력을 잡았을 때는 (전후사정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기성 해법을 답습하고, 권력을 잃었을 때는 반기득권적 저항만을 관성적으로 주장하면서 극우포퓰리즘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진짜 대안’은 좌파-엘리트라고 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 모두가 모여 만들어 가야 하고, 그러면 모두가 모여 만드는 방법이란 뭐냐가 핵심이다. 그게 칼 폴라니든지 심의민주주의든지 참여계획경제든지 참여소득이든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합의하고 그 청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그게 장기적인 정치적 기획이 돼야 하는데, 한 발도 나아간 바 없다. 우울해지니까 그만 합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포퓰리즘, 능력주의,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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