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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좀 더 젊고 기운이 넘쳤던 시절에 계급 문제의 인식 폭을 넓히게 된 계기는 김선생님이 에릭 올린 라이트(명복을 빈다)의 계급론과 폴 윌리스의 저서를 소개해준 거였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해머타운의 싸나이들(lads)은 성차별주의자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인다. 폴 윌리스가 여기서 발견한 것은 이들이 공교육에 저항하며 주체적으로 노동계급문화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사회적으로 계급이 재생산되는 중요 요인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이건 영국처럼 계급적 분화가 분명한 사회 조건에서의 얘기고, 다른 조건이면 또 달랐을 거다. 가령 오늘날의 미국이었다면 이들은 백퍼센트 트럼프 지지자가 된다. 지금 영국에선 아마도 브렉시트… 아무튼 그래서 반기득권적 문화 즉 저항이 어떤 긍정적 적극적 대안적 방식으로 조직화될 수 있느냐,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숙제이다.
가령 반지성주의를 말하지만, 반-지성의 ‘지성’은 뭘 말하나? 과학… 백신 왜 안 맞냐? 백신을 둘러싼 일련의 과학적 지식과 체계가 ‘우리’가 아닌 ‘엘리트’의 것이기 때문에(물론 나는 백신-자본은 의심하지만 백신-과학을 신뢰한다) 냉소주의적 접근, 그러니까 의심을 하는 거다. 그게 프랑스 같이 똑똑한 사람들 모여있는 데서도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는 이유다. 이런 맥락을 따져보면 사실 반지성주의라는 명명 자체가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다. 호스스태터는 1955년에 ‘개혁의 시대(The Age of Reform)’를 썼는데 거기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미국 민중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의 핵심은 그의 주장대로 ‘반지성’이 핵심이 아니라 반기득권적 저항과 ‘대안부재’의 만남이다.
극우포퓰리즘은 여러차례 얘기하지만 반기득권적 저항을 ‘거짓 대안’과 짝지은 결과물이다. ‘거짓대안’은 사회적 코드로서의 껍데기 뿐인 자유주의,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 특정 계층이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합을 다시 한 번 퇴행적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좌파는 ‘대안부재’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권력을 잡았을 때는 (전후사정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기성 해법을 답습하고, 권력을 잃었을 때는 반기득권적 저항만을 관성적으로 주장하면서 극우포퓰리즘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진짜 대안’은 좌파-엘리트라고 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 모두가 모여 만들어 가야 하고, 그러면 모두가 모여 만드는 방법이란 뭐냐가 핵심이다. 그게 칼 폴라니든지 심의민주주의든지 참여계획경제든지 참여소득이든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합의하고 그 청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그게 장기적인 정치적 기획이 돼야 하는데, 한 발도 나아간 바 없다. 우울해지니까 그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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