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낙관
일전에 박권일 선생의 글에 나오는 호빗, 벌칸, 훌리건의 구분법을 눈여겨 보았는데, 며칠 후 한국일보에 그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려 전반적 내용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 이후 이외의 다양한 신문에도 내용이 소개되었다. 또 검색을 통해 이미 이전부터 식자들에 의해 이 구분법이 언급돼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빗, 벌칸, 훌리건의 개념은 설명 대신 박권일 선생의 글을 다시 인용한다.
정치학자 제이슨 브레넌은 미국 유권자를 ‘호빗’, ‘훌리건’, ‘벌컨’의 세 그룹으로 나눈다. 호빗은 정치 무관심층이고, 훌리건은 편향적·광신적 지지자이며, 벌컨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유권자다. 정치학자 다이애나 머츠는 정치참여형 시민들이 거의 모두 훌리건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한다. 한국인들만 유독 광기에 차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현대 정치의 흔한 현상이라는 거다.
정치 팬덤이 극단화되기 쉬운 이유가 있다. 도덕적 확신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취향의 다름은 존중할 수 있지만 도덕의 다름은 그렇지가 않다. 도덕은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가게 하는 기본적 가정이기 때문에 양보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여러 심리학자가 밝혀낸 것처럼 이념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도덕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서로가 ‘옳음’을 강변하니 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정치 참여가 도덕의 문제이자 훌리건을 양산하는 활동이라면, 우리는 극한의 정치적 내전을 운명처럼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쉽지 않은 문제지만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실험심리학자 조슈아 그린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 판단엔 두 가지 시스템이 병존한다. 하나는 그가 “자동모드”라 부르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동기다. 다른 하나는 “수동모드”라 부르는 이성적인 동기다. 우리가 직면한 많은 정치 의제는 정교한 판단과 절묘한 절충을 요구하지만 오늘날 정치 담론은 대개 누군가를 악마화하는 일로 환원된다. 즉, “자동모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 관건은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는 양당제 정치를 탈피하는 것, 그리고 사람보다 의제를 중심으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훌리건’보다 ‘벌컨’에게 훨씬 많은 발언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주목도는 낮지만 사회적 논의가 꼭 필요한 의제들을 더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아낌없이 공적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저자의 결론까지 인용하진 않고 있는데, 신문에 실린 서평을 보면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저자는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 즉 ‘지식인에 의한 통치’에서 대안을 찾는다. 그러면서 충분한 지식을 갖춘 이들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는 ‘참정권 제한제’나 더 유능한 시민에게 투표권이 추가로 주어지는 ‘복수 투표제’를 소개한다. 다만 ‘정치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저자는 이 제도에 앞서 충분한 숙의와 합의가 필요하며, 특정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유권자 능력 시험 등의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정서적/감정적으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걸 일체 배제하고 논의를 일단 따라가볼 필요는 있는데, 저자의 연구는 그렇다고 한다. 가령 가장 쉽게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은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호빗이든 훌리건이든 벌칸의 비중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는 건데(사실 박권일 선생의 벌컨 발언권 확대론도 근본적으론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실제 ‘숙의’의 결과물을 보면 호빗은 그냥 훌리건이 되고 훌리건은 더 극렬한 훌리건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것이다.
여기가 전통적인 좌우파 방법론이 갈리는 결정적 분기점이라는 생각이다. 각 주장이 좌파와 우파의 주장이라는 게 아니다. 여기서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관건이라는 거다. 가령 극좌파인 어떤 사람도 호빗과 훌리건에게 “벌컨이 돼라!”며 꾸짖고 두들겨패고 하다가 지쳐서 “역시 에피스토크라시가 있어야 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언제나 비슷한 경로로 가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숙의’라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그 ‘숙의’라는 것이 현재와 같은 형태의 대의민주주의 시스템과 결합해있을 경우라면 마찬가지 결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왜냐하면 호빗과 훌리건의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오류와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 수준에서는 저의 책을 참고해보시라는 정도의 설명을 덧붙이기로 하고…
그래서, 호빗과 훌리건은 제끼고 벌컨들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자는 식의 결론이 아니라, 또는 호빗과 훌리건에게 너는 왜 벌컨이 되지 못하느냐…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이 모르는 세상의 진실을 보여줄테니 너도 벌컨이 함 돼봐라… 안 되면 혼날줄 알아라… 이렇게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벌컨이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게 고민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게 근본적으로 안 되는 일이다 라고 한다면 그 분에게 남는 해법은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된 소수의 다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 뿐일 것이고, 언젠가는 가능할 수 있지만 아직 우리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라고 말하는 분은 나이 먹고도 철없는 좌파로 남는 것이고…
그래서 내 생각에 진보라든가 어떤 좌파라든가 하는 것의 근본적인 태도란 거는 비관으로 일관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지막 낙관이 있느냐, 이게 핵심이 아닌가 한다.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현실을 낙관하더라도 ‘원래 사람들은 안 되는 것’이라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비관을 품고 있는 사람은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진보라든가 좌파라든가는 아닐 수 있다는 것. 오해하지 마시라. 누구는 좌파여서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이런 얘기가 아니다. 좌파면 어떻게 아니면 어떻냐. 그러나 우리가 좌우 구분의 어떤 기준을 말한다면 그 핵심의 핵심은 이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거다.
추가. 이런 얘기를 라디오에서 ‘시럽급여’얘기랑 같이 한 바 있었는데, 방송국에 사람들이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네가 실업급여에 대해 뭘 아느냐며, 나는 벌컨인데 실업급여는 시럽급여가 맞다 라는… 에이구… 다음에 얘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