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나는 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하자는 생각이다.
오늘은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에 대한 내용이다. 국내 언론은 ‘미국판 정은경’이라고 하던데, 올해 만79세의 고령으로 로널드 레이건 때인 지난 1984년부터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과거 HIV, 사스, 돼지독감, 메르스, 에볼라 등 바이러스 대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정무직인 국립보건원장을 맡으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모두 고사해올 정도로 자기 분야에 충실한 모습이다.
특히 코로나19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갈팡질팡 하는 모습 보이자 면전에서 사실을 바로잡는 등 미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상황이 심각한 뉴욕에서는 파우치 소장의 얼굴을 새긴 도넛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약회사들이 코로나19 백신을 곧 만들어 낼 거라고 하자, 곧바로 파우치 소장은 최소 1년이나 18개월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자 항바이러스제가 병을 덜 심각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병은 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하자, 그럴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라고 대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안심하라, 상황은 통제되고 있다, 곧 기적처럼 해결된다고 했지만 파우치 소장은 아직 최악이 남아있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정부의 코로나19 태스크포스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총괄책임 맡고 있다. 파우치 소장은 이 회의와 날마다 열리는 브리핑에 매일 참석하고 있는데, 다른 구성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찬양하고 칭송하기에 바쁘고 파우치 소장만 사실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와 다른 의견 내거나 자기보다 앞서가는 참모가 있으면 가차없이 응징해왔다. 허버트 맥매스터 전 엔에스시 보좌관,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 존 켈리 전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 전문가인 파우치 소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트럼프 대통령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파우치 소장을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한 공식적인 얼굴로 내세울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까지 한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파우치 소장이 확진자 증가 추이 등을 설명할 때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신뢰 유지에 성공하고 있다는 건데, 문제는 지지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극우세력들은 파우치 소장을 트럼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수단체 대표나 극우 온라인매체 운영자 등이 나서서 가짜뉴스까지 동원해 파우치 소장에 대한 총공세를 벌이는 상황이다. 미 보건복지부는 파우치 소장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개인 경호를 강화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파우치 소장은 일상 업무 시간 뿐 아니라 자택에서 휴식을 하는 시간에도 경호 인력을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극우세력의 주장은 파우치 소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식인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밈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황당한 발언을 할때 파우치 소장이 뒤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고민에 빠진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장면이 많다.
극우세력의 심기를 건드린 결정적 장면은 트럼프 대통령이 공직사회의 딥스테이트를 언급하자 파우치 소장이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문지른 것이다. 이걸 근거로 극우세력은 파우치 소장을 딥스테이트의 일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딥스테이트란 선거로 최고 권력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료권력을 통제하며 국가 정책을 바꾸는 것을 방해하는 앙시앙레짐을 말한다. 민주당과 오바마 정권의 수혜를 입은 관료들의 조직적 저항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잘 되지 않는다는 식의 서사인데,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여망을 등에 업고 중국을 혼내주고 제조업을 되살리려고 하지만 성과가 없다 보니 이를 설명하려 고안된 개념인 셈이다. 원래는 인터넷에 떠도는 음모론에 불과했으나 트럼프 지지자들이 자가발전을 통해 실체를 부풀리면서 극우매체 등이 합세했고 이젠 트럼프 대통령도 대놓고 이에 편승하고 있다.
극우세력들은 7년전 파우치 소장이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에게 보낸 이메일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내용은 의례적 칭찬 정도로 보이는데, 국책연구소장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일이라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이런 음모론은 근거가 없다. 이는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적 서사의 특징이다. 근거가 없는데도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현대 사회에서 지성에 기반한 전문성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시스템의 근본이 되면서 우리는 누구나 평등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게 됐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그런 상황의 원인을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지식과 전문성이라는 것이다.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기득권과 연합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대중을 속이고 사익을 챙긴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사이다. 딥스테이트 음모론에 매료된 트럼프 지지자들이 파우치 소장에 대해 갖는 감정이 바로 이것이다.
두 번째는 스스로도 음모론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제대로 된 방역대책을 실시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활절 주간에는 사실상 상황을 정상화시키겠다고 공언한 이유도 이것이다. 그런데 방역대책에 있어서 파우치 소장과 같은 전문가들의 만류 탓에 이런 방침은 철회됐다. 경제를 중시하는 입장에선 방역을 강화하면 경제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방역을 강화하지 않을 명분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음모론이 동원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제 상황은 심각하다. 미국의 경우 지금까지 2주 동안 실업자가 천만명씩 발생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언제나 나타나는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대공황보다 더 큰 대공황이 찾아올 수 있다며 언론 인터뷰를 했다.
반면 버냉키 전 연준 의장 같은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경기는 V자로 반등할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봤듯 보건정책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와 러시아 팔 비틀어 감산 합의 시켰다지만 오래 가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이러니 파우치 소장 같은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이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고 하고 어느 나라 대통령이 보드카로 극복하자고 했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영국도 집단면역론 같은 걸로 넘어가보려고 했지만 보리스 존슨 총리 본인이 직접 감염되는 바람에 이런 전략은 어려워졌다.
또 일본과 같은 경우도 도쿄 올림픽 등을 핑계로 모른척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올림픽은 연기됐다. 더군다나 아베 신조 총리가 사학스캔들 연루 사임 압력 회피를 위해 코로나19 대응 핑계를 대면서 더 사태는 심각해지고 있다. 마스크 가구당 2개씩 준다는 얘기로 인터넷 놀림감이 되는 등, 방역대책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방역대책과 경제가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이는 와중에 이걸 그나마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가 한국이다. 그래서 세계 정상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고도 한다.
방역에서는 성과를 내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경제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성장률 등도 중요하지만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이던 서민이나 노동자, 영세자영업자들에 대한 대책을 평가해야 한다. 방역, 경제, 불평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하면 세계사적 업적 세우게 된다. 파우치 소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이런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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