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필요성에 대한 한겨레의 기획인데… 뒤에 뭐가 얼마나 더 나올지는 봐야겠지만 일단 오늘은 중국 혐오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중국인을 혐오하게 됐다 이런 건데, 이 다음 대목도 짚어야 한다. 지금 중국 혐오라고 하는 현상은 혐오의 일반적 차원에서 한 발짝 더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강력한 이념투쟁의 맥락이 결합돼있기 때문이다. 이게 반정치주의(나는 정치 일반에 대한 냉소주의라고 규정하는…)와 결합해서 강력한 위력을 갖게 됐다.
원래 우리가 과거부터 갖고 있는 중국 혐오가 있다. 심지어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되놈’이 나온다. 이런 게 타자에 대한 혐오의 일반적 차원이다. 근데 중국은 사회주의고 북한의 우군이며 미국과 맞장 뜨는 G2이다. 이 구도를 주구장창 떠드는 게 보수언론인데, 두말할 것도 없이 레드컴플렉스의 맥락이다. 이들에 의하면 현 정권은 주사파 운동권들이 중심 축인데 과거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친중 친북 정책을 펼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 한 축이 이념이라면 다른 한 축은 경제다. 실제 이 정권의 대중 접근은 이념이 아니라 경제라는 실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구도가 오늘날 사람들이 상정하는 정치에 대한 냉소적 인식의 전형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한겨레는 이미 친중언론으로 각인돼있다. 첫째, 이념적으로 그렇기 때문이고 둘째, 현 정권에 잘 보여서 뭔가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상반될 수 있는 개념이 ‘불순함’이라는 아교로 접착된다. 이번 기사에 대해서도 그렇게들 말할 것이다.
자칭 ‘진보’들 일부에서 이 영향이 나타난 때도 있었다. 그런 이런 스토리였다. 미-중이라는 대립구도에서 구-운동권들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국가인 중국을 택하는 이념적 선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진보의 표준은 민주주의와 젠더 이슈, 정치적 올바름을 반영한 여러 ‘표현’을 중시하는 미국-리버럴이다. 이 구도가 살짝 스탠스를 달리 해 재생산 된 것이 샤를리엡도와 이슬람에 대한 태도 문제였다. 중국의 자리를 이슬람이 대신한 것이다.
이건 세계적 현상이다. 예를 들면 반유대주의 논란을 보라. 팔레스타인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일까? 뭐라고 표현하든 이런 세계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는 것보다는 피해자의 ‘손해’를 공동체가 보상해주는 것이 정의라는 파편화 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결국 앞서 문통-운동권-중국-경제라는 프레임도 기득권 정치의 사익 추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서사의 재판인 것이다.
뭐 이런 얘기야 집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떠드는 그냥 망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얘기를 하면 꼭 그런 시선이다. 팔짱 끼고선… 어디 무슨 얘기를 또 하나 보자… 뭐 이런… 아무튼 박근혜가 천안문 올라 갔을 때 일베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박근혜가 다 좋은데 친중이라 문제라고 했다. 보수언론도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이런 망상이 아니더라도 중국-프레임을 재생산하고 고약하게 이용하는 보수정치와 보수언론의 문제는 깊이있게 다룰만 하다는 뭐 그런 생각이다.
아, 한겨레 기사는 링크를 클릭…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9318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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