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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극우-포퓰리즘 이라니깐

2025년 10월 5일 by 이상한 모자

글을 죽 읽으면서 답답한 얘기를 많이 본다. 극우와 극우가 아닌 것을 구분한 후 ‘진정한 극우’를 격리해 안도감을 가지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극우-포퓰리즘은 그런 게 아니라 극우가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방법론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에 가깝다. 분류가 아니라 매커니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백신과 치료제가 있을 때에는 어떤 바이러스든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바이러스는 격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등장하고 오미크론 등의 변이를 거쳤을 때, 만일 바이러스들에게 자의식이 있었다면 모두 무릎을 쳤을 것이다. 인간의 경계심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전파력은 극대화 할 수 있는, 그러면서 끝없는 변이를 통해 백신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극우가 포퓰리즘과의 결합을 통해 당당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보수정치는 굳이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상적인(?) 보수정치와 극우-포퓰리즘 간의 경계는 이제 희미해졌다. 한동훈과 장동혁을 비교해보라. ‘극우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전략은 적나라한 혐오적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실제 상층 정치의 동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직시하고 분석하고 전면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모든 것은 유행이므로, 극우-포퓰리즘의 시대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무엇인가? 극우-포퓰리즘의 동력은 곧 포퓰리즘의 구도, ‘엘리트 대 다수 대중’이라는 구도에서 ‘다수 대중’의 지위를 극우정치가 자칭하면서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극우-포퓰리즘 비판을 하면 ‘그래서 대안은 엘리트주의라는 거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맨날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이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글에다가 이렇게 쓴 거 아닌가?

물론 이재명 정권이 여론조사상 높은 지지를 얻으며 주류로서 통치 논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찾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대통령실과 여당 사이의 긴장은 이 점을 드러낸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의 대결을 답습한다는 데 있다. 이 구도에서 통치를 책임지는 세력은 결국 ‘부패한 기득권’의 혐의를 뒤집어씀으로써 장기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돼왔기 때문이다.

사실 포퓰리즘이 상정하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게 바람직한 결말로 가는 유일한 경우는 앞서 상정한 노골적 권위주의에 기대는 외설적 ‘국가 주권’의 실현이 아니라 지금과 완전히 다른 대안 체제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 즉 ‘시민/인민 주권’(장석준) 구현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시민/인민 주권’의 자리를 메꾸는 것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논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코스피 5000 시대를 갈구하는 조직된 소비자-투자자 정신이다.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 잠복해 있는 게 아닐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991.html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정치 개혁이 민주적 주체의 형성 또는 변화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 정치를 바꾸고 싶다면 참여와 책임에 기반하는 민주주의를 더 심화하고 실질화해야 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우리 정치의 갈등선은 ‘통치-엘리트 대 무책임한 포퓰리즘 대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삼각구도 사이에 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통치-엘리트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의 대립 구도만 눈에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8069.html

위의 글은 9월 11일에, 아래의 글은 9월 25일에 인터넷 상에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앞의 글에 나오는 ‘장석준’ 대목은 아래 글의 대목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모두 그 근거를 ‘주권’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다만 ‘주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국민결집은 미국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가’ 주권을 외치며, ‘순수한 프랑스인’의 의지를 온전히 대변하는 강한 국가가 개입하기만 하면 기성 정치세력들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이 해결될 것이라 장담한다. 반면 급진좌파 장뤼크 멜랑숑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인민전선은 ‘시민/인민’ 주권을 주창하며, 민주주의에 충실한 정부가 부자 증세 등을 과감히 추진한다면 긴축과는 다른 방향에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여기에서 ‘주권’이란 결국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구축된 낡고 단단한 ‘경제’의 세계에 대한 극적인 개입을 뜻한다. 극우파는 트럼프 정부가 이미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 개입을 실현하려 하고, 좌파는 신인민전선을 지지하는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등이 ‘민주적 사회주의’라 칭한 또 다른 방향에서 개입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당장 총선이 다시 실시될 경우, 세 흐름 중 어느 쪽이 앞서 나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프랑스 정치의 주된 대립 선이 이미 마크롱 블록과 나머지 사이에서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사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앞으로 직면할 선택지이기도 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16817.html

장선생님은 최근에도 비슷한 얘기를 썼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에라도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뉴욕 시장 선거든 칠레 총선이든 모두, 이제껏 주류 리버럴이 이끌어 오던 반극우 연합의 성격이 달라질 조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버럴 대신 탈신자유주의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좌파가 반극우 정치의 새로운 구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21819.html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도 이게 특정한 구도를 말하는 거라는 점은 보지 않고 ‘그냥 또 정신승리 한다’는 수준으로 자조하고 마는 게 요즘 분위기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사실은 다들 어쩔줄 몰라 하면서, 누가 누구한테 무슨 욕을 하나만 열심히 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지. NL욕 하나 안 하나 뭐 그런 거…

뭐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얘기 하고 사는지 모른다.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그래도 여기다가 징징거렸더니 오늘 안부를 전해온 분 혹은 분들이 있었는데 대단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정치, 극우포퓰리즘, 민주주의

극우포퓰리즘 얘기하면…

2025년 9월 27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유튜브에서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마다 못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의 경우는 하도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가보다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다른데 가서 얘기를 하면 얘기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열에 아홉은 ‘내가 이 얘기를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결론으로 간다.

원인의 대부분은 극우포퓰리즘을 다들 지멋대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극우’만 따로 떼서 보면 어느정도 얘기가 되는데 ‘포퓰리즘’ 얘기를 붙이면 또 막 뭐 지멋대로 엉망진창이다. 내가 말해봐야 처듣지를 않으니 다른 훌륭한 분들의 정의를 통해 극우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아래는 과거 한겨레에 실린 한귀영(여러분들이 신뢰하는 명문대 출신)이라는 분의 글의 일부이다.

네덜란드 정치학자 카스 뮈더는 포퓰리즘을 “사회를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갈라치기 하고, 한쪽을 악마화해 서로 적대시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다양한 얼굴로 나타난다. 소수의 사악한 엘리트와 다수의 선한 대중이라는 전통적인 포퓰리즘 문법을 따르는 좌파 포퓰리즘과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이 두 축 외에 난민, 이민자 등 사회적으로 배제된 별도의 집단을 설정한다. 이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자극하고 동원하는 것이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생존 방식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64816.html

마! 한귀영과 카스 뮈더가 뭔데 포퓰리즘을 정의하나! 이럴 수 있는데, 그러면 참여연대의 월간 저작물에 실린 글에서 한 번 더 인용을 해보도록 하겠다. 동국대 교수님이 쓴 글이다. 무려! 교수님!이 쓴 글이니까 이 정도면 납득을 해야겠지.

30년 가까이 극우와 포퓰리즘에 천착한 카스 무데(Cas Mudde)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원제: The Far Right Today)에서 현대 극우 정치의 부상과 특징을 포퓰리즘, 권위주의, 민족주의/이민배척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극우 포퓰리즘은 ‘순수한 국민(the pure people)’과 ‘부패한 엘리트(the corrupt elite)’의 대립 속에서 자신들이 국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면서, 주류 정당과 전통적 언론에 반대하고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은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혐오와 차별적 담론을 확산시키며 지지층을 결집한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 총 26개국 의원들이 2017~22년 작성한 약 3,200만 개의 SNS(트위터) 글을 분석한 결과,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좌파보다 잘못된 정보 확산 경향이 높으며, 민주주의 규범이나 사회문화적 문제에 집중하는 우파 포퓰리즘이 가짜뉴스로 보다 성과를 거둬왔다. 무데(Mudde, 2019)는 극우 포퓰리즘을 서구 주류 정당과 미디어가 수용하면서 한때 고립되었던 극우가 공식 정치의 주류로 진입하였고, 기존 보수주의와의 경계도 모호해졌다고 지적하였다.

https://www.peoplepower21.org/welfarenow/1989052

이게 적어도 극우포퓰리즘 논의를 하는 맥락에서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야 그걸 누가 모르냐 하실 수 있는데, 유튜브 해봐! 아무튼. 아래는 동아시아재단의 저작물에 실린 글. 글 전체의 논조와는 관계없이 해당 대목만 발췌해서 살펴본다.

한국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을 야당들이 비판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포퓰리즘은 정책이나 공약 혹은 정치적 공방의 수단이 아닌 통치 스타일과 변혁운동으로 정의된다.

먼저 포퓰리즘은 통치 스타일로서 정당이나 의회를 우회하여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정부의 정책을 추진하는 리더십의 한 변형이다. 대표적 사례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Alo Presidente (Hello, Mr. President)라는 TV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처지와 어려움을 직접 듣고 자신이 장관이나 관계자들에게 지시하면서 차베스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포퓰리즘은 기성정치나 엘리트 중심주의에 도전하는 변혁운동으로서 그 주체는 주로 주변부 정당이나 정치세력들이다. 포퓰리즘 정당들은 기성정치의 엘리트와 국민을 대립시키면서 전자가 후자를 버렸다는 선동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정치운동으로서 유럽의 극우정당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https://www.keaf.org/book/EAF_Policy_Debates/Democracy_and_Populism_in_South_Korea_Quo_Vadis_Korea

더 있어야 돼? ‘포퓰리즘’ 개념의 변천에 대한 대우재단 학술사업 홈페이지에 실린 홍철기님의 글을 보자.

그렇다면 이 학자들은 포퓰리즘 개념을 어떻게 달리 정의하는가? 이들 각자의 입장 차이를 전제하더라도 공통적인 핵심이 존재하는데, 바로 포퓰리즘을 다원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무데와 칼트바서는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정의한다(무데·칼트바서 2019: 15). 그리고 그들은 포퓰리즘과 그에 적대적인 반포퓰리즘적인 엘리트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다원주의”를 제시한다. 그들이 보기에 “엘리트주의는 사회를 동질적인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로 나누는 포퓰리즘의 기본적인 이원론적 구분을 공유하면서도 두 집단의 덕성을 정반대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반다원주의적이다. 포퓰리스트와 엘리트주의자는 단지 엘리트와 민중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판단에서만 대립할 뿐 다원주의를 배척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사회가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서로 어느 정도 겹치는 다종다양한 집단들로 나뉜다”고 전제하며 “다양성”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내세우고, “사회에 권력의 중심이” 복수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 의사결정은 “타협과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무데·칼트바서 2019: 18-19).

뮐러는 무데와 칼트바서가 포퓰리즘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을 다원주의에 대한 위협 혹은 공격으로 본다는 점에서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포퓰리스트가 반엘리트이면서 또 언제나 반다원주의자”라고 강조하는데, 그가 보기에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뮐러 2017: 11).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일종의 “정체성 정치”이며, 특히 “배제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필수적”인데, 그 이유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단순화할 수 없는 다양한 시민들이 자유롭고 동등하게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정한 조건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균질하고 진정한 단일 국민”이 존재한다는 위험한 “환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뮐러 2017: 12). 요컨대 무데와 칼트바서, 그리고 뮐러에 따르면 무분별하게 정적을 비난하기 위한 정치수사적 무기로서의 ‘포퓰리즘’이 아닌 의미에서의 포퓰리즘이란 바로 반다원주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포퓰리즘은 입헌주의, 즉 성문헌법에 의거한 정부 운영이나 대의제, 즉 경쟁적 선거를 통한 정부 교체의 원칙에는 결코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이를 공격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파악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현실의 포퓰리스트가 입헌주의나 대의제를 정말로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 원천은 헌법이나 선거 제도 자체에 대한 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원주의에 대한 적대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포퓰리즘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원주의를 지지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 또한 다원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포퓰리즘과 다원주의 모두의 반대편 자리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엘리트주의의 자리, 즉 민주주의에 본질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는 정치 자체에 대한 반대 입장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https://www.daewooacademia.com/horizon-of-knowledge/797/1836

특히 홍철기님의 글은 링크를 눌러서 전체를 한 번 읽어봐라. 글에 나오는 제닝스 브라이언의 얘기는 저의 저쪽이 싫은 책에도 나옴. 기억 안 나지? 그러니까 제가 거기 써있는 얘기를 다 그냥 쓴 게 아닌데, 여러분은 ‘이 새끼 또 분량 채우려고 이 얘기 저 얘기 구겨 넣었구만…’ 이렇게 보고 기억 안 하기로 하고 그냥 넘어간 거지. 물론 그렇게 보도록 쓴 저의 책임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얘기들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런 거다. 극우포퓰리즘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1) 극우정치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통해 재생산 되는 것이든지 2) 포퓰리스트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른 결과로 극우적 세계관이 확산 및 재생산되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왜 이렇게 열을 내면서 하느냐, 극우포퓰리즘 얘기를 하면, ‘그 포퓰리스트가 실제로 극우주의자는 아닐 수 있잖아요’, ‘극우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다 극우는 아니잖아요’ 이딴 소리를 하기 때문. 왜 그냥 ‘극우’라고 안 하고 ‘극우+포퓰리즘’이라고 하고 있겠냐 지금!! 극우주의자가 포퓰리즘을 하는 거든, 포퓰리스트가 극우를 재생산하는 거든,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극우포퓰리즘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임. 그 당사자가 극우주의자이냐에 대해선 달리 평가할 수 있겠지. 가령 도널드 트럼프, 보리스 존슨 같은 타입과 조르자 멜로니, 마린 르 펜 같은 타입의 개인적 정치 지향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극우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있거나, 특정 시점에 했다는 것(특히 보리스 존슨)에는 부인할 수 없는 동질성이 있다. 그래서 그걸 극우포퓰리즘이라고 부르고, 불러왔다!

이러한 분류법으로 보면 윤석열은 극우포퓰리즘적 지도자에 정확히 들어 맞는다는 게 요즘에 계속 하는 얘기다. 2022년 대선 캠페인도 극우포퓰리즘의 도식이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적 방법론은 대다수의 정치 세력이 활용하고 있는데, 집권을 하고 나면 대개는 이 방법론을 버린다. 실제로 나라를 운영하려면 포퓰리즘적 문법, 시각, 논리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우포퓰리스트들은 집권을 하고 나서도 포퓰리즘적 스타일과 틀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어느 글에다가 이렇게 썼다.

포퓰리즘 정치는 완결적 해법을 상정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바를 상황에 끼워 맞춘 서사를 통해 수용하면서 자기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대중이 원하는 바’는, 통치 논리상 대개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자신이 대중이 원하는 바를 모두 관철하겠다며 집권에 성공한다. 통치 논리와의 간극은 ‘상대가 대표하는 부패 기득권 대 내가 대변하는 선량한 민중’이라는 대립으로 메꾼다.

(…)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통치 과정 자체에서 대개 민중을 배제하지만 관행과 문화를 포함한 의회민주주의 시스템과 관료제는 최소한의 민주 질서를 유지한다.

그런데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관철한다는 서사를 쓰기 위해 ‘안 되는 이유’의 근거를 제공하는 의회민주주의와 관료제를 무력화해야 한다. 따라서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권위주의적 방법론을 취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러한 포퓰리즘 정치는 극우 정치의 재생산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고 있다. 권력 유지 등 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시도가 극우 정치로 귀결되는 것이든 극우주의자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취하는 것이든 극우 정치의 에너지가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결과는 같다. 우리는 이런 ‘극우 포퓰리즘’의 한국적 버전을 이미 윤석열 정권을 통해 경험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991.html

윤석열이 극우포퓰리스트라고 했더니, 어떤 사람들이 댓글에 쓰더라. 인기가 없는데 어떻게 포퓰리스트일 수 있나요? 앞서 논의에서 봤듯,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가는 포퓰리즘인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어떤 종류의 논리고 표현이다. 가령 어떤 나라에서 리틀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율 10%를 못 얻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고 그게 ‘극우포퓰리즘’이 아니게 되나? … 그리고 심지어 윤석열은 그걸로 집권을 했다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겨…

쓰다 보니까 또 현타온다. 이걸 또 써서 뭐하냐… 그만합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포퓰리즘, 윤석열, 포퓰리즘

엘리트-포퓰리즘과 포퓰리즘-엘리트주의

2025년 8월 21일 by 이상한 모자

밥을 먹으면서 제로데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는데 미국 사람들이 만들만한 전형적인 얘기다 싶으면서도 민주주의-포퓰리즘 대 독재-엘리트주의의 구도를 다루고 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쓰진 않겠지만 자타칭 합리적-엘리트주의가 그 자신의 결함과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주어진 독재적 비상대권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플롯의 전개가 흥미롭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것보다 더 기만적인 데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해받기 어려운 얘기지만 그래도 쓴다. 언젠가 출판사 사장님이 다음 책은 뭘로 쓸 것이냐 하기에, ‘엘리트주의의 탈을 쓴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을 자처하는 엘리트주의’의 대결 구도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번 정권이 하는 일을 볼 때, 그리고 보수정치의 파국을 볼 때 이런 구도는 더욱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유가 있는데, 반대의 정치의 구도 속에서 주류 권력의 교체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가령 구 엘리트주의는 왜 포퓰리즘으로 전락하였는가?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비주류 정치다. 과거 엘리트주의를 구현한 권력의 한 축이 연속된 파국을 맞으며 비주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에 경도되는 것이다. 그게 박근혜 이후 윤석열, 윤석열 이후 현재 국힘의 상황이다.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윤석열 이후 현재 국힘’이란 극우 유튜브에 포섭된 쪽이나 그들을 극우라 부르며 혁신을 자처하는 쪽을 모두 포괄한다. 이들은 모두 정권을 잡았을 때나 놓았을 때나 포퓰리즘적 논리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엘리트주의의 탈을 쓰는가? 가령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타령이나 이른바 찬탄파들의 이재명 정권 공격은 자신들의 좌표를 엘리트주의 권력의 자리에 놓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들이 꼭 엘리트주의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게 반대의 정치다. 내가 엘리트주의자이기 때문에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엘리트주의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는 본래 (굳이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통치-책임성을 수반한다. 앞서 드라마 제로데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인물이 권력자로서 과거 구현했고 구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윤석열과 그 후계자들(한동훈 포함)의 과거와 현재 행보는 그러한 것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조건이 만나 ‘엘리트주의의 탈을 쓴 포퓰리즘’이라는 형태의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것에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이 당선 직후 스스로 ‘피플파워’를 자처한 것에서 보듯(물론 이들은 그렇게 자처하였으나 이후 서술할 문제로 인하여 통치-책임성을 일부라도 가져야 했기에 실제 ‘피플파워’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비주류의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포퓰리즘적 정치의 동원 논리가 작동했고, 한동안 한국 정치는 주류-독재-엘리트주의 대 반독재-민주주의-포퓰리즘의 구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보수정치가 자멸하면서 비주류였던 이들 세력은 주류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누군가는 통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권은 ‘포퓰리즘을 자처하는 엘리트주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내가 볼 때는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포퓰리즘적 구도에 떠밀려 가면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통치 엘리트적 면모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재명 정권 역시 같은 조건 하에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권과 비교할 때 통치 엘리트라는 운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진보의제 일부로부터의 조직적(?) 퇴각과 ‘속도조절’, 세수확보 논리에 대한 고집 등은 이를 방증한다.

또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엘리트주의는 그게 뭐든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없다. 킹스맨 골든서클에서 해리 하트의 한쪽 눈이 작동 불능이었던 것처럼… 혹은, 앞서 제로데이로 풀자면 엘리트주의가 과거 저지른 부도덕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고 그 본질은 독재적 권력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 자신에 대한 결함을 내부에 품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이 구도 자체, 엘리트-포퓰리즘과 포퓰리즘-엘리트주의의 대립구도가 바로 이런 영화적 표현의 현실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 어차피 이런 얘기 해봐야 다들 자기 할 말만 할테지만 나중을 위해 기록을 남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엘리트주의, 제로데이,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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