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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이대남에 대한 이중잣대라는 이중잣대

2025년 12월 16일 by 이상한 모자

지겹다. 남들이 뭐라 말하든 듣지도 않고 계속 이대남은 극우가 아니예요~ 민주당에 실망한 것 뿐이예요~ 비상계엄에 찬성하지 않았어요~  극우라고 낙인찍지 말고 개혁부터 제대로 해요~ 왱알앵알… 언제까지 그런 소리를 할 건가?

언젠가 다 한 얘기지만 2030 남성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에 극우 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이런 거는 정확한 측정도 되지 않고 관심도 없다. 문제는, 늘 강조하는 거지만! 대의민주주의의 매커니즘, 즉 정치의 조직화 방식에 유권자가 어떤 방식으로 응하고 있느냐이다. 이게 핵심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테스트를 해서 극우 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좌파인지 우파인지… 야 그딴 게 어디있냐? 너는 좌파야 우파야? 오늘은 좌파고 내일은 우파이거나 오늘은 우파고 내일은 좌파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른 거 다 진보인데 젠더 문제에만 보수인 사람도 있고. 그 반대도 있고. 그럼 그런 건 다 어떻게 평가할거야? 항목별로 배점 줘가지고 시험 볼 거냐?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조직화되고 평가되느냐!

그래서 극우포퓰리즘 얘기 하는 것이다. 극우포퓰리즘이란? 극우정치의 포퓰리즘적 방법론 차용을 통한 새로운(사실은 새롭지 않은) 유권자 포섭 전략이다. 그 포섭 전략에 젊은이들이 호응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 공동체의 극우정치를 활성화 한다. 그래서 극우적 에너지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화이거나 극우화이다. 이게 어렵나? 이 말이 어려워??? 7살도 알아 듣것네.

이해가 안 되면 86세대로 바꿔보자. 요즘 환단고기니 뭐니 말이 많아. 그게 뭐냐면 전형적인 저쪽이 싫어서 추종하는 민족주의야. 상대가 ‘독재-친일-기득권’이니까 ‘독재-기득권’ 반대인 사람들이 ‘친일’에도 반대로, 그 결과 완전히 거울쌍인 유사역사학으로 간 거라고. 위에 이대남에 대한 왱알앵알에 대입하면 그들은 진짜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친일 기득권에 반대한 것 뿐인 거 아니냐? 유사역사학 애호가 문제라면 유사역사학 애호가를 욕하지 말고 기성 역사학이 정신 차리고 잘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근데 왜 환빠라고 난리냐?

숏츠형 인식을 가진 분들이 여기서 갑자기 뭐!? 환빠가 문제가 아니라고!? 이럴텐데, 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으시오.

맨날 그러잖아. 진보의 내로남불, 위선, 이중성 어쩌구.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고 자기 자식새끼 좋은 대학 보내고 젊은 여자 보면서 군침 흘리고… ㅉㅉㅉ… 영포티? 근데 앞서 이대남 극우 아님 논리로 하면, 애초에 그런 진보들은 진정한 진보(이대남이 진정한 극우가 아니듯)가 아니고 단지 보수정권이 잘못해서 진보 포지션인 것 뿐인 게 아니냐? 그럼 이들에게 뭐라 할 게 아니고 보수정권이 잘하면 이들도 정신차린다~ 이렇게 접근해야 되지 않냐? 근데 왜 내로남불 진보의 위선 강남좌파 타령만 하지?

답은 간단하지. ‘민주당만 빼고’ 이거랑 똑같은 거거든. 정신차려 좀! 인생의 기준을 더블민주당에다가 두지 마세요. 인생의 기준이 더블민주당이니까 모든 걸 ‘이건 민주당에 유리한가? 이건 불리한가?’ 이것만 따지고 살지… 더블민주당에 혼을 빼앗긴 사람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86세대, 극우정치, 극우포퓰리즘, 극우화, 영포티, 이대남

심야노동을 할 거냐 말 거냐

2025년 11월 22일 by 이상한 모자

SNS에서 새벽배송 논쟁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SNS 입씨름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예를 보지 못했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자기들끼리 뭘 배웠다는 둥 진도를 나가자는 둥 하지만, 다 자기만족적 서사에 그칠 뿐이다. SNS 논쟁이라는 걸 한지 15년도 넘었을 텐데, 아직도 담론 수준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SNS는 공론장도 뭐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떠들다 사라졌을 옹알이들이 온라인에 그럴듯한 얘기처럼 나열되어 있는, 노이즈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러니 그냥 SNS에는 일기나 적고 만족하는 것이 좋다. 자기 생각 정리용으로는 괜찮다. 그러나 남의 일기에 관심을 가질 필연은 없다. 이게 내가 SNS 논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이다.

유일하게 SNS 논쟁이 효용이 있는 분야라고 한다면, 메타-SNS적 분석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SNS에서 떠드는 양상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유의미하다는 거다. 가령 필터버블이니 뭐 그런 얘기 있잖나.

하여간, 그런 와중에 이 얘기를 소재로 조선일보가 토요일자 칼럼에 떡하니 써놨기에, 여기다가 생각 정리용 메모를 남기는 것이다.

https://www.chosun.com/opinion/2025/11/21/5JUEK4CTHNCCRDZRPCERBLNEKA/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 글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어떤 주장을 했는지 난 정확히 모른다. 지금 쓰는 것도 저 사람들 주장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그간 언론에 등장한 새벽배송을 둘러싼 여러 얘기에 대한 거다. 그러나 나한테 와서 저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얘기는 하지 마시길 바라고.

새벽배송에 대한 토론이니 주장이니 보고 느낀 바는, 그래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여러 우려를 할 수 있다. 심야노동을 금지하면 노동자의 임금 손해가 우려되지 않는가? 그렇다. 심야노동을 금지하더라도 노동자는 임금 보전을 위해 투잡을 뛰지 않겠는가? 그럴 수 있다. 그 외 여러 부작용이 있지 않겠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심야노동을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퇴행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런 논쟁, 처음하는 게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노래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어느 새 탕뛰기의 노예가 되어 힘겨운 하루가 덧없이 저무네” … 이건 일전에 여기다가 기록을 남겨놓은 바 있으니 궁금하면 찾아보시고… (클릭). 아무튼 이 가사에 나오는 ‘탕뛰기’가 뭐냐면 돈을 일당으로 주는 게 아니고 건당으로 주는 거다. 한 번 왔다갔다 하는 걸 단위로 돈을 주기 때문에 건설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들이 잠을 줄여서 일을 한다. 한 탕이라도 더 뛰어야 기대수익을 채울 수 있으므로…

이때 노조 등의 주장은 탕뛰기를 거부하고 일당으로 받자는 거였다. 저 노래도 그런 바탕에서 나왔기 때문에 ‘탕뛰기의 노예가 되어’라는 대목이 있는 거다. 현장에서 당연히 볼멘소리들이 있지 않았겠나? 열심히 일한만큼 능력대로 가져가는 게 낫고 그게 더 이익이다 라는 식인데,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을 거다. 그럼에도 일당으로 받자고 한 이유가 뭐겠나? 대개의 사람은 돈이 걸리면 자기 몸을 제대로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운전을 하는 분야는 자기 혼자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할 수 있다. 사고라도 내봐라. 실제 그런 불행이 있으니까 이런 결론으로 간 거다.

갑자기 탕뛰기가 왜 나오냐 할 수 있는데, 노동조건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반드시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얘길 갖고 입씨름 하는 이 구도 자체가 이미 고전이고 클리셰라는 거다. 때마다 나오는 거다. 주52시간 얘기 할 때도 똑같이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 결론이 대안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거냐로 가느냐에 있다. 가령 위의 조선일보 글에 나온 표현을 쓰자면, 쿠팡만큼 중소기업의 임금이 인상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 할 수 있다. 그런데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를 추진할 수 있지만, 전반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대안도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전반적인 임금 인상이 어렵기 때문에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가령 주5일제든, 주52시간제든, 아니면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이든 그걸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업계의 전반적 임금 인상은 언제 달성되는가? 그것에는 전제가 없는가? 이런 저런 전제를 얼마든지 달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진보의 목표가 아니었던 적도 없다. 늘 모색하지만 잘 안 되는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담론은 보통 조선일보가 썼듯 ‘현실을 모르는 책상머리 진보’, ‘선의의 부작용’, ‘감성에 의존하는 낭만적 진보’ 류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연결된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서두에도 썼는데, 내 주요 관심사는 이런 식의 프레이밍에 있다. 진보가 뭘 하자고 주장을 하면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보통 이런 구도를 형성한다. 주52시간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문통이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이 아닌 핵발전주의자들의 주장도 거의 사실처럼 보도하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같은 프레임(감성과 선의에만 기댄, 현실을 모르는 책상머리 낭만적 진보)에 속해 있다. 조선일보가 이번 일을 소재로 칼럼을 쓴 것도 정확히 여기에 들어간다. 이런 태도는 결국 ‘고통스러운 오늘이 최선’이라는 것으로, 애초에 진보의 주장과 행동을 무력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심야노동의 제한 또는 금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여러 절충안을 얘기하고 있다. 금지는 아니더라도 업무를 줄여 시간을 조정해보자, 정 어려우면 2교대를 해라, 일단 논의에 참여해라 등등… 이런 논의가 담긴 언론 보도와 칼럼을 유튜브에서 소개했는데, 내 나름대로의 노력이다.

상대편에서는 쿠팡 새벽배송이 무슨 택배기사의 축복인 것처럼 떠들기도 했는데, 실제 그렇지 않다는 주장과 보도도 꽤 있었다. 새벽배송 기사들을 대상으로 과거 조사한 결과가 그랬고, 사망한 기사의 유족이 밝힌 것처럼 남의 아이디를 빌려서라도 연속 근무를 대리점이 강요했다는 정황도 있다.

왜 쿠팡은 침묵하고 노동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소비자 간의 대립구도만 남았느냐에 대한 탄식도 있었는데, 당연하지 않나? 다들 이렇게 자본이 가려는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알아서 싸워주고 있는데 기업이 뭐하러 나서겠나?

계획을 최대한 신중하게 세워야 하는 문제가 많지만, 일단 행동에 나선 이후에 고쳐나갈 문제도 있을 것이다. 여러 대안을 통해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의 조건을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로부터 시작해야 나머지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가령 여러 반대와 이런 저런 전제 조건을 거론하는 목소리에도 불구, 주52시간을 도입했기 때문에 생긴 긍정적 변화들이 있지 않는가. 물론 상대쪽에선 이런 저런 부작용을 열거하겠지만, 그건 주52시간의 토대 위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이게 뭐 그리 긴박한 문제냐 라는 공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쿠팡이든 SPC든 심야노동을 제한하는 것은 긴박한 과제이다. 심야노동이 발암물질이라면 고등어는 왜 먹느냐 라는 비아냥도 보수언론에 많이 등장하지만, 고등어에는 적어도 선택권이 있다. 그 외 그럴거면 이것도 금지해라, 저것도 금지해라 이딴 소리도 하는데, 할 수 있으면 해야지. 하시죠 그럼? 아무튼, 이건 노동이 밤을 자본에게 속절없이 내주고 있는, 전선의 문제라는 게 본질이다. 많이들 보셨겠으나, 경향신문의 김승섭 교수 인터뷰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192122005

앞에서 쓴 내용 다 관련 기사다 칼럼을 링크할 수 있는데, 어차피 읽지도 보지도 않을 것이므로 안 한다. 심야노동에 대한 얘기를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서구권도 다 한다. 다만 노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는 쪽과 아닌 쪽의 상황이 다른 거다. 이런 상황을 조망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면서 메신저에 대해서만 떠드는 일은 이제 피곤하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새벽배송, 심야노동, 쿠팡

하이퍼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

2025년 10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외국, 그러니까 주로 서구에서 민주주의니 능력주의니 하는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보면 이런 구도의 얘기를 많이 한다. 능력주의 세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체제로부터 소외된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하여 자기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단아적 지도자를 찾게 됐고 그게 트럼프니 하는 극우포퓰리스트 집권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너무 거칠게 요약한 것일 수도 있는데, 뭐 하여간 이런 구도다. 요즘 한겨레신문에 나온 몇몇 분들도 이런 구도의 얘기를 했다.

근데 이게 미국 등 서구 모델에는 맞는 설명일 수 있지만 한국에는 꼭 들어 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옛날부터 이런 저런 형태로 했는데, 최근 유튜브에서는 이 얘기를 ‘하이퍼 능력주의’라는, 내 나름의 유머를 섞은 명칭으로 몇 차례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이퍼화… 를 염두에 두고…

그게 뭐냐면, 이런 거다. 한국 능력주의의 낙오자는 서구와 같은 형태로 모욕감을 느끼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느끼더라도 다른 방식이다… 인데 제가 서구 전문가들의 입장을  오독한 것일 수 있으니 이해바란다). 오히려 한국 능력주의에서 낙오자는 자신이 낙오된 상황 자체를 더욱 강화되었으면서도 왜곡된, (즉 하이퍼화 된…!) 능력주의적 세계관으로 포섭한다. 그것은 뭐냐, 낙오와 배제를 능력주의 질서 자체의 부당함이 아니라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의 부당함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은… 나보다 위에 있는 녀석은 나보다 진정으로 실력이 좋아서 내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 부당한 수단을 썼든지 아니면 이 사회의 기준이 잘못됐든지 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진정한 능력주의적 기준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나는 50등이 아니고 최소한 15등은 하는 것이 맞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내 위에 있는 녀석이 부당하게 그 위치에 있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나보다 밑에 있는 녀석은? 그럴만해서 밑에 있는 것이다. 이 밑에 있는 녀석이 부당한 수단(가령 아빠찬스)을 쓰거나 잘못된 기준(가령 할당제)을 갖고 와서 우기는 걸로 내 등수를 위협한다면?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위에 있는 이가 트집 잡을 게 하나도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정이다. 인정! 이 서사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견결한 능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정할 것은 또 인정한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신실한 능력주의자가 맞느냐? 그건 아니다. 이들은 종종 어차피 뭔가 부당하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냥 인정을 한다. 가령 이재용. 상대가 이재용인데 아빠찬스라는 둥 할 거냐? 그게 무슨 실익이 있냐? 이재용이 아빠찬스를 써서 회장이 됐으므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무 실익이 없다. 따라서 이재용은 인정한다.

이러한 양상은 자신이 ‘부당한 기득권’의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령 나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그가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 부당하게 경쟁의 우위를 점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내가 부당한 수단을 써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만약 신실한 능력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는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회를 움켜 쥔다. 아빠찬스를 쓰면 15등이 아니라 5등이 될 수 있다? 무조건 해야지 임마! 다른 애들도 다 하는데! 꼬우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그리하여, 내가 볼 적에 한국에 만연한 이러한 하이퍼-능력주의는 위에 대하여 ‘부당한 수단 혹은 잘못된 사회적 기준에 의하여 지위를 획득한 위선적 엘리트’라는 반대해야 할 대상을 쉽게 상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과, 아래에 대하여 ‘너는 능력이 없으므로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된다’고 한다는 점에서 혐오 즉 극우적 세계관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이걸 해내는 정치를 한 마디로 압축한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이며, 윤석열이 당선된 대선 전후의 보수는 그러한 방식으로 유권자를 조직-동원하는 정치(내가 볼 때는 한국형 극우포퓰리즘)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정치로 조직된 유권자의 목표는 당연히 극우 이념의 관철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위의 상승 및 탈락 방지이다. 이 지위 상승 욕구와 상실 불안을 극우와 연결시키는 수단, 매커니즘이 극우포퓰리즘이다. 이준석이 만든(그가 그렇게 주장하므로) 윤석열의 승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경쟁, 극우 포퓰리즘, 극우주의,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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