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통제
한겨레 사설의 한 구절이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검찰총장은 업무에 복귀했지만, 중요한 논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법원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행정부 일원인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을 집행 정지시키는 것은 공공복리를 침해한다’는 법무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정무직 공무원인 검찰총장을 징계한 것을 두고 ‘선출되지 않은 판관’인 사법부가 최종 판단하는 게 과연 적절하냐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 문제는 대통령제의 효시인 미국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삼권분립과 대통령 권한 및 책임에 관한 건설적인 논쟁은 앞으로도 필요하리라 본다.
거의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다. 선출된 권력이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체제란 무엇인가? 아돌프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 그래서 법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 법은 누가 만드나? 선출된 권력이 만든다. 징계도 법에 맞게 하라는 취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게 문통일 거다. 보도를 보니 참모들은 사과를 말렸다는데, 결과적으로 문통이 동의는 했겠으나 징계를 통한 우리윤총장 내쫓기 프로젝트에 대한 판단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법관 포함 모든 걸 선출하면 지금과 상황이 다를까? 정파의 대립은 그대로일 것이다. 서초동 촛불과 태극기를 보면 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건? winner takes all 인가? 전에 한겨레21 글에 미국 잭슨주의 얘기를 괜히 언급한 게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모든 걸 대중이 직접 결정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결정에 참여하면 모두를 위한 대안이 마련될 거라는 이상은 자동으로 현실이 되는 게 아니다. 그 안에는 당파성의 경합이란 요소가 포함돼있는 거고, 이걸 보장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를 불편부당으로 바꿔 말하면서 실제로는 정파적 이해관계의 관철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게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적 통제의 본의이다. 그게 위의 사설과 같은 사례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건 ‘불순한 의도’란 차원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촛불혁명과 조국 숭배, 검사장 직선제와 검찰총장에 대한 초법적 징계는 어떻게 하나의 바구니에 담길 수 있는가? 이것은 은화자유주조를 민주주의와 등치시키고 농민의 편에 서서 자본 독재를 비난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말년에 창조론의 수호자가 된 ‘일관된’ 과정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