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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에 대한 방송 내용

2020년 9월 5일 by 이상한 모자

한국 뉴스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니 일본으로 도피를… (농담이니 제발 흥분하지 마시오. 시사펭론가가 뉴스로부터 어떻게 도망을 가…)

아래는 금요일 오전 방송 내용이다.

오늘은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는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에 대해 알아보자. 14일 총재선거가 치러지고 16일 총재를 총리로 지명하는 임시국회가 열린다.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 레이와 아저씨로 알려져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다. 당내 다수 파벌이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 확정이라고 봐야한다.

스가 요시히데는 1948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업에 종사했고 모친은 교사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도쿄에 상경해 골판지 공장과 쓰키지 시장 등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당시 비교적 학비가 저렴했던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입학, 1973년 졸업 후에는 건설전기설비공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꿈을 품고 1975년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오코노기의 선거구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였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지만 11년간 비서로 일하면서 이 지역에서 정치경력을 쌓았다. 1987년 요코하마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재선까지 됐다. 비록 시의원이었지만 지역구 의원 비서로 일하면서 지역의 정관계 인맥을 탄탄하게 해놓았었기 때문에 ‘밤의 요코하마 시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러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 마찬가지로 가나가와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 진출 성공했다. 상대 후보 쪽에서 가나가와 사람이 아니라는 공격을 했지만 오히려 아키타현 출신이라는 사실을 공격적으로 밝혀 해당 지역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때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자민당이 부패스캔들 때문에 정권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에서 파벌 간 분열이 극심했던 시기다. 스가 요시히데는 파벌을 옮겨 다니면서 굉장히 복잡한 처세를 했다. 원래 소속 파벌은 오늘날의 다케시타파였는데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적대한 자신의 정치 스승(가지야마 세이로쿠)을 따라 1998년 파벌을 탈퇴했고 오늘날의 기시다파인 굉지회로 옮겼다. 2000년 모리 요시로 총리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됐을 때 굉지회는 찬성파(가토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불신임안 찬성 입장에 섰지만 정작 조직이 쪼개질 때는 반대파(호리우치파, 이후의 고가파)에 가담했다. 이러다가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지지하면서 1차 아베 집권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대박을 친다.

이렇게 보면 양지만 찾아다닌 것 같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임하고 난 후 2007년 총재 선거에선 모든 파벌이 아소 다로 견제를 위해 후쿠다 야스오 지지 방침을 밝혔는데, 이때 소속 파벌 방침에 따르지 않고 아소 다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승자는 후쿠다 야스오였다. 그런데 후쿠다 정권 이후 아소 다로가 총리직을 이으면서 스가 요시히데는 다시 요직에 발탁됐다. 자민당이 정권을 잃은 이후인 2009 총재 선거에서는 고노 다로를 지지해 또 패배자가 됐는데, 2012년 총재 선거에선 아베 신조의 복귀를 위해 아소 다로와의 동맹을 성립시키는 등의 활약으로 정권 창출의 공신이 됐다. 이때부터 아베 신조 정권의 운영에 없어선 안 되는 인물이 됐고 이 덕에 8년간 관방장관직을 유지했다. 철새라기보다는 수완이 좋고 수에 능하다고 봐야하고 주로 그런 역할을 해왔다(관방장관으로서 관료 인사를 장악한다거나 앞서 가지야마와 오코노기의 아들들을 중용하는 등 파벌을 만들지 않았으면서도 조직가의 수완을 뽐내고 있다).

애초 아베 신조의 후계자란 말이 나왔던 사람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 사임 직후에 면담을 하고 지지를 요청했는데 사실상 거절당했다. 뒷통수를 맞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근거없는 기대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출마를 강행했다.

기시다 후미오는 1957년생이고 아베 신조와 마찬가지로 3세 정치인으로 볼 수 있다. 도쿄에서 나고 자라 1982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코스를 밟았다. 1987년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 입문했고 1993년 아버지의 출신지인 히로시마에서 출마해 중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했다.

우리에게는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아베 신조 1차 집권기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특임장관인 특명담당대신으로 입각했고 후쿠다 야스오 때도 같은 직책을 유지했는데, 이게 중요한 직책은 아니다. 그러다 2012년 소속 파벌인 굉지회의 회장을 맡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이후 2012년 말 외무상으로 입각, 2017년 1월까지 직을 유지했다. 외무상으로서는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와 군함도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록 등을 추진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외무상을 맡았는데, 이 기록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넘어 요시다 시게루에 이은 역대 2위라고 한다.

아베 신조가 기시다 후미오를 중용한 이유는 소속 파벌인 굉지회가 대외정책에 있어서 비둘기파로 알려져 있어 주변국들에 생색내기 좋은 인사라고 판단한 측면도 있을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당내 주요 파벌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입각을 시켜 자기 밑에 묶어두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베 신조가 2차 집권 때 자민당 간사장으로 중용한 것도 굉지회 출신의 다니가키 사다카즈란 사람이었다(앞서 글에서도 썼듯 엄밀히 말하면 다니가키는 가토파, 기시다는 고가파 출신이다). 이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기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지금의 니카이 도시히로로 바뀐 건데, 아무튼 아베 신조가 굉지회와 여러모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알 수 있다(주요 파벌에 대한 정치적 안배, 이른바 총주류화는 아베 신조 2차 집권기의 주요 전략이었다).

기시다 후미오에게 항상 따라붙는 평가는 업적이라고 할만한 게 없고 무난한 인사지만 자기 의견이 확실치 않다는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총재 선거에서도 굉지회 내부에선 출마를 강행하자는 주전론이 있었지만 기시다 후미오가 아베 신조 총리 3선을 지지해 이후 선양을 기대하자는 신중론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닭 쫓는 개가 된 것이니 여러모로 결단력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이시바 시게루는 아베 신조가 이 사람만은 안 된다 라는 인사이다. 1957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곧바로 돗토리현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버지가 돗토리현 지사 출신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1979년 게이오대 법학부 졸업하고 미쓰이 은행에 입사,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루트를 밟았다. 1981년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이때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정계진출을 권유했다. 다나카파라고 불린 파벌 조직 목요클럽 사무국에 취직하는 걸로 정계에 입문했고 1986년에 돗토리에서 당선됐다. 이때가 28세로 전국 최연소 의원 기록이었다.

이후 행보는 그야말로 풍운아라고 할만 하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1985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나카소네파로 소속을 옮겼다. 1988년엔 정책모임 유토피아정치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는데 이때 함께 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이다. 1994년에는 비자민 연립정권이었던 호소카와 정권이 추진한 정치개혁입법에 찬성해 자민당에서 징계를 당하고 탈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자와 이치로가 창당한 신진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1995년 안보정책에서의 이견(오자와 이치로의 구상은 유엔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이를 위해 유엔대기군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로 보면 해석개헌에 가깝다. 하지만 이시바 시게루는 평화헌법 9조에 직접 손을 대는 개헌이 지론이다)을 내세우며 다시 탈당, 1996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다가 1997년 자민당에 다시 복귀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으면서 주요 인물로 부상했는데 이때 방위청의 현안은 9.11 테러 발생에 따른 법안 제정과 육상 항공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등 민감한 현안들이었다. 이후에도 주로 농업 분야와 군사정책에서 역할을 맡아왔다.

아베 신조의 라이벌로 각인된 것은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되면서다. 이때 지방조직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후보 5명 중 1등을 기록했다. 그러나 앞서 탈당 등 이력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로서는 당내 기반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2차 투표에서 당내 파벌들이 복귀한 아베 신조를 지지하기로 합의하면서 이시바 시게루가 패배했다. 아후 자민당 간사장으로 기용됐고 2014년에는 지방창생상 등으로 입각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아베 신조 총리와 마찰을 일으켰다. 2016년에는 직을 내려놓고 포스트 아베를 준비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2018년 총재 선거에 결국 출마했지만 아베 신조에게 패배했다. 이때도 지방 조직들의 지지세가 유지됐기 떄문에 아베 신조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가 여론조사로는 1등을 지켜왔는데 아베 신조 총리와 정치적 마찰을 일으켜 왔기 때문에 대척점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총리는 자민당 내 파벌들이 나눠먹기식으로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이번에도 기회는 없을 것이다. 본인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과거부터 파벌을 없애자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고 복당 당시 지금의 다케시타파로 복당했다가 당직을 맡으면서 탈퇴했고 그 이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2016년 결국 본인의 파벌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인 셈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이시바 시게루, 일본 자민당

닭 쫓던 개가 된 기시다 후미오

2020년 9월 2일 by 이상한 모자

기시다 후미오의 총재 선거 출마를 보며 일본 정치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아베 신조가 선양을 해줄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사임을 하면서는 기시다? 누구세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시다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들 거다. 이시바 시게루는 그렇다 치고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기시다는 뭐하러 출마해 3파전을 하는 건가. 어차피 진검승부의 때가 내년 9월 이전엔 오지 않는가. 내가 종종 편의점 주인을 할래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느냐… 그러는데, 정치인이 뭘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거다. 기시다의 출마 역시 역시 ‘반대’를 조직화 하는 민주주의의 단면이다.

기시다파, 그러니까 굉지회라고 그러면 유서 깊은 전통의 파벌이라 그러는데, 아무튼 지금 자민당 내에 주요하게 꼽을 파벌은 5개다. 아베 신조가 속한 호소다파, 아소 다로의 아소파, 니카이 도시히로의 니카이파, 기시다파, 그리고 다케시타파. 다케시타파는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을 배출하며 7~80년대를 주름 잡았던 파벌이다. 지금은 다케시타 노보루의 동생이 영수이다. 아무튼 이외에도 이시하라파니 수월회니 다니가키그룹이니 뭐니 있지만, 결국 이 5개 위주로 봐야 된다고 본다.

기시다가 닭 쫓는 개가 된 것은 굉지회의 부침과 함께 봐야 한다. 굉지회의 분열은 역설적이라고 해야 될까 90년대 다케시타파의 분열에서 촉발됐다. 록히드 사건이니 리쿠르트 사건이니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면서 다케시타파는 어떤 놈은 뛰쳐 나가고(오자와 이치로) 어떤 놈은 남고 엉망진창이 되는데, 이게 다케시타파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자민당이 정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파벌정치는 고질적 부패의 토양으로 지목됐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자민당 내부 정치는 파벌에 세대 갈등의 성격이 덧붙여지게 된다.

이때 부패를 일소하고 파벌정치를 극복하자며 나온 게 야마사키 타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소위 YKK연합이다. 이들은 각각 나카소네파, 굉지회, 청화회(지금의 아베 신조네 식구)의 중견 간부 정도의 위치였다. 이때 부패정치 척결은 정경유착의 일소였고 작은 정부-건전재정과 동의어였다(그래서 사회당은 부정부패와 직접적 관련은 없었으나 자민당 파벌과 구태정치라는 카테고리로 묶이고 만다). 정부가 크니까 임마 정치-관료-자본이 이익동맹을 맺는 것 아닌가. 일본 정치에서 정치개혁과 신자유주의가 동맹을 맺은 베이스 중 하나다.

아무튼 이들이 움직이기 전 이들이 속한 각 파벌들은 본래 질서대로 움직였고 그 결과가 다케시타파의 손을 잡고 굉지회 영수 미야자와 기이치가 집권한 거였다. 다만 부패정치로부터 뭔가 벗어날 거라는 의지를 보여줘야 해서 미야자와 정권은 록히드 사건 때 뛰쳐 나가 신자유클럽을 결성해 활동하며 청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노 요헤이를 영입해 관방장관을 맡기는데, 그 유명한 고노 담화의 탄생이다. 이런 얼굴마담 정치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가토 고이치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YKK연합의 활동이 본격화 된 것이다(애초에 고노 요헤이는 우리 식구도 아니잖은가!). 하지만 결국 부패 이미지로 인해 자민당은 정권을 잃고 말았다.

부패 이미지를 벗기 위해 청렴한 고노 요헤이가 총재를 맡게 되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결단으로 사회당 자민당 연정이 성립되었지만, 파벌 영수인 미야자와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했다. 이제 굉지회 내부 갈등의 핵은 고노 요헤이와 가토 고이치 사이의 후계를 둘러싼 대립이 됐는데 난리 끝에 결국 가토 고이치가 굉지회를 넘겨 받게 되자 고노 요헤이는 일군의 지지자를 이끌고 새로운 파벌을 만드는데 그 휘하에 아소 다로가 있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아소파이다.

하시모토 류타로가 정권을 되찾아 온 이후 마찬가지로 다케시타파의 오부치 게이조가 그 뒤를 잇는데, 오부치는 YKK를 주도하며 반다케시타파의 선봉에 섰던 가토 고이치를 제끼고 청화회와 손을 잡았다. 오부치 급사 이후 밀실합의를 통해 청화외의 모리 요시로가 2000년 총리가 된 것은 이 맥락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후예인 모리 요시로는 그답게 “일본은 천황이 중심에 있는 신의 나라”라는 등의 발언을 해 야당에 의한 내각불신임안 제출을 자초하는데 이때 가토 고이치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모리 요시로의 인기가 땅에 떨어져 이대로는 선거가 안 된다는 명분으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 표결을 하자고 한 것이다.

아마 ‘리버럴’에 가깝다고 하는 본인의 세계관에도 맞지 않는 일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굉지회 원로들은 이에 반대했고 파벌 전체 합의를 이루지 못해 거사는 실패했다. 기대했던 YKK도 모리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건 아니라고 해서 일이 안 됐다. 결국 가토 고이치는 혼자서라도 적진으로 달려가 산화해 무사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했으나 이때 측근인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가토 선생은 대장이니까 혼자서 돌격은 안 됩니다!”라며 만류한 얘기는 유명하다. 아무튼 이 용두사미 사건을 기점으로 굉지회는 또 가토파와 반-가토파로 분열해 각자 굉지회를 자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시기 YKK의 한 명인 야마사키 타쿠 일당들의 나카소네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가토가 무슨 스캔들로 퇴갤하고 나서는 충신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가토파를 이어받는데, 자민당을 부셔버리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개혁을 부르짖으며 총리가 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정권에서 다니가키가 주류와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이즈미의 승리는 다케시타파의 최종적 패배였고 우정민영화는 이들의 씨를 말리자는 거였다.

그런데 고이즈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아베 신조는 도련님들끼리 통한 것인지 파트너로 아소 다로를 선택했다(총재선은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3파전이었다). 지금과 달리 이 둘은 거의 코미디 같은 국정을 연출해 아베 신조 사임 이후에는 아소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이 ‘아소 포위망’을 결성하고 모리파 출신(지금의 아베 신조네 식구) 후쿠다 야스오를 총리로 밀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그러잖아도 구원이 있던 아소 다로에 대한 반대를 고리로 굉지회는 아소파를 제외하고 재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엔 고이즈미와 아베의 외교 노선(아소 다로가 외무상…)에 대한 반발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이 시기 야마사키 다로와 굉지회의 분열된 양쪽 파벌인 가토파와 고가파는 신YKK연합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후쿠다 야스오의 뒤를 이은 아소 다로 총리 시대를 거쳐 정권을 잃고 난 후 총재 선거에서 굉지회는 다니가키의 출마를 두고 다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정권을 잃었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해 또 세대론을 얘기했고, 그러다 보니 파벌 갈등에 세대 갈등이 다시 겹친 거다(이때 젊은 세대의 기수가 우리나이로 불과 47세의 고노 다로였다). 분열 속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총재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비슷한 일이 2012년에도 벌어지는데 이때는 민주당 정권 말기로, 총재가 되면 곧 총리가 될 수 있다는 메리트까지 더해져 분열이 극심했다.

결국 반-가토파 출신이자 파벌 영수였던 고가 마코토가 재선을 노리던 다니가키에게 당신은 너무 늙었고 젊은 세대가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며 다른 사람을 밀면서 갈등은 폭발했다. 파벌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 다니가키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고가도 물러났고 다니가키를 따르던 사람들은 탈퇴했다. 이렇게 탈퇴한 이들이 느슨한 형태로 모여있는 게 지금의 다니가키그룹이고 고가 마코토의 뒤를 이어 회장을 맡은 사람이 바로 기시다 후미오이다. 아베 신조로부터 누구세요? 란 말을 듣고 기시다 후미오가 바로 다니가키 사다카즈부터 찾아간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거다.

아무튼 기시다가 아베, 아소와 한 배를 타면서 생각한 모델은 오부치 사후 모리가 뒤를 잇는 모델이었겠으나 생각대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다. 스가의 시대는 아베의 연장전이지만 코로나19에 경제에 도쿄올림픽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일본 사람들이 아베 신조에 대해 좀 짠한 마음을 갖지만 내년 9월에는 모를 일이다. 이때도 구도는 아베 식구들 대 반-아베들이 될 수 있다. 이시바 시게루가 한줌도 안 되는 밑천을 갖고 계속 개기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자력으로는 안 되지만 반-아베의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메리트를 얻는다. 선양을 원했던 기시다 후미오가 출마를 강행하는 것은 반-아베의 상징을 노린 경쟁에 뒤늦게라도 나선 걸로 볼 수 있다. 지금이야 스가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다케시타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다만 선수가 없고 모테기 도시미쓰 같은 카드로는 반-아베를 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내년에는 이시바를 밀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건데… 다케시타파들이 지지고 볶은 얘기는 또 나중에 기회 되면…

뭐 그냥 망상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죽 보며 뭔가를 계속 ‘반대’하면서 합종연횡하며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정치의 서사를 만끽하셨길 바라며…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기시다 후미오, 아베 신조, 일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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