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을 말하는 정치

정치라는 게 각각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한데 모여 피터지게 싸우다 보면 총론이 만들어진다 이런 개념으로 접근할 때가 많다. 사전에도 그렇게 써있는 것 같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운운…

과거에 노동자 정치론이라는 것도 그런 건데, 각자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면 노동자가 머릿 수가 많으니까 결국 노동자에 유리한 총론이라는 게 조성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런 얘기 하는 사람에 대고 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상을 바꾸는 이유는 다수여서가 아니라 잘나서 입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젠가 그런 질문을 한 사람도 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거라면 자본가는 자본가당을 지지하는 게 당연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느냐. 왜 난리냐… 사실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그래서 정치의 본질이 이익분배의 효율화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앞서의 노동자 정치론도 마찬가지인 게, 이제 더 이상 옛날같지 않다. 적색과 녹색의 대립, 가부장제와 결합한 노동계급과 여성주의의 대립을 해소하고 다수파 대표성을 내세우며 소수자를 탄압하는 환원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이익이 아니라 총론적 대의에 합의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필요하다. 이미 2004, 5년 ‘전진’ 만들 때도 이 얘기 다 했다(그때 같이 얘기 한 사람들이 이제 난 녹색은 안 하고 적색만 한다고 얘기하는 게 미웠다).

볼셰비키 혁명을 할 때도 뒤에서 돈을 대던 자본가들이 있었다. 자기 앞길이나 챙겼으면 잘 먹고 잘 살았을 사람들이 혁명의 대의에 동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주판알 튕긴 결과가 없진 않겠지만, 세상이 이대로여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먼저다. 혁명이 당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말로는 그래서 부족하다.

그럼 그러한 총론적 대의라는 건 누가 만들고 어떻게 설득하나? 당 중앙이 교시를 내리고 감옥에 가두고 뚜들겨 패면 되나? 아니다. 정답이 없는 정답을 만들기 위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해야 된다. 정치상품을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에이 잘못샀네 호구됐네 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택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를 해야 된다. 박근혜 뽑은 사람들 반성하라고 공격하면서 정신승리 하자는 게 아니라 실제 투표행위가 ‘나의 통치’가 되는 체제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다. 실패가 남탓으로 잊혀지는 게 아니라 퇴적되어야 하고 한 발짝 나아가는 진보로 이어져야 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계속 되어야 한다.

근데 이런 말 하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 다시 앞의 논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까? 답답하고 우울해서 그냥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