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에 대해 보도하면서 ‘온건파’란 꼬리표를 붙이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굉지회는 ‘로우폴리틱스’를 지향한 요시다 시게루 노선의 계승자임에는 틀림없다. 근래로 와도 가토 고이치라든지 고가 마코토라든지 그런 사람들의 예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조류인 구 경세회의 경우를 보면 요시다 노선의 후계라는 게 반드시 온건파를 전제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가령 신자유주의와 보통국가화의 결합(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 개혁 논리를 활용한 보통국가화의 정당화)에 대해서는 오자와 이치로가 선구자이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일시적인 리버럴 집권(호소카와, 무라야마)의 반동으로 형성된 우익-백래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인물 중 하나였다.
따지고 보면 구 경세회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자와 이치로와 같은 흐름의 원류가 오히라 마사요시에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적 국제협조의 관여라는 측면에서 ‘오히라가 전환점에 서고 오히라의 브레인을 이어받은 나카소네가 전환을 완료했다’란 표현이 나오는 책도 있다. 오히라야 말로 굉지회의 역사적 포스트 중 하나 아닌가. 이쪽이나 저쪽이나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해오면서도 실은 같은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이끌어 온 것에 가깝다. 정치적으로 어떤 논란이 어떻게 불거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보통 이렇게 가면 역시 일본인은 반성을 안 하는 악독한 놈들이다라고 결론을 짓는데, 그렇다기 보다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란 결국 체제적 사건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세력이 광야에서 뭐라 떠들었든 통치자의 자리에 앉으면 대북관계를 풀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근혜가 천안문에 올라간 이유는 뭔가? 그럴만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보통국가화 저지란 체제적 저항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얘기를 하지 못하게 된 일본의 리버럴은 그래서 악세서리에 불과하고 정권을 잡아봐야 똑같은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한국의 민주당이 그렇듯.
이쯤에서 역시 혁명해야 한다 라고 끝을 맺으면 좋겠지만 요즘은 그럴 마음도 아니다. 늘 떠들어 댔지만 결국 권력자가 됐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늘 논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탈레반을 보라. 탈레반! 요즘에는 탈레반을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얘기를 한다 싶으면 밑도 끝도 없이 운동권이니 반제투쟁이니 민족주의니 하지만, 다 관심없다. 처음 집권했을 때 그들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산과 들에 있었다. 그것은 어떤 저항이었다. 문화유산을 폭파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근의 이들은 통치자의 권좌에 반쯤 앉은 모습이다. 물론 그들 통치의 시작점은 역사적으로 지체되었다. 김영미 씨 말대로 그들의 현재는 물론 미래 역시도 여전히 중세이다. 무자헤딘의 싸움 이후 그나마 통치자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북부에서 싸우고 있는 반탈레반 세력 두목의 영웅적 부친이다. 물론 그도 중세를 사는 사람의 한계는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어떤 통치의 구현이긴 했다. 탈레반은 그것을 끝장냈지만 동시에 이제 그것과 비슷한 뭔가를 하려고 한다. 그런 좋은 의도대로 될리 없고, 후퇴라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여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것은 어쨌든 뭔가의 종말인 동시에 통치의 시작이다. 좀 더 나은 실패를 할 수 있는가, 이 세계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결과는 오직 이것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민주당이 싫어서 윤석열, 윤석열이 싫어서 홍준표를 지지하는 정치가 횡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상의 원리 때문… 인데 분명히 일본 얘기로 시작했는데 왜 여기로 왔지?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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