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허무한 삶이다. 예를 들어 이대남 보수화 이런 거를 보자. 이대남이 보수화됐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보수화란 뭐고 근거는 뭔지, 그게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뭔지, 부정적 영향이라면 이걸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이런 걸 논해야 될 거 아니냐.
근데 매번 이런 식… 이대남 보수화 딱 얘기하면 한쪽에서 이대남들 하여튼 ㅉㅉㅉ 이러고, 이걸 실제로 당했는지 어쨌는지 모르는 이대남들 일부가 사전적 대응에 나서 왜 우리를 마녀사냥 합니까!! 막 이러고… 무조건 근거가 잘못됐다 그러고… 실제로 문제 해결이나 뭐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는 거지. 누가 욕을 먹는 거냐, 이것만 얘기하고… 그 와중에 젠더갈등 싸우지 말고 차카게 살자 이런 기회주의자 나오고… 있는 갈등을 어떻게 하루 아침에 없는 걸로 치나?
사람들이 요즘 하는 얘기들 보면 정말 내가 이상해졌나 싶은 생각이… 얼마 전에 유치원생들이 어느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고 허락을 받고 싶다는 방을 써붙여서 주민들이 스티커 투표하는 얘길 봤거든. 근데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이…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관리비 내서 유지보수하는데 아무나 쓰게 할 순 없는 거 아니냐…
또 이런 예도 있어. 부자는 벌금 더 내게 하자는 얘기 있잖아. 이재명-윤희숙 논쟁 같은 거. 그 얘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랬다는 거야.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봐주자는 거냐… 부자 벌금 더 매겨야=가난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매기는 효과=봐주자는 것…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거든? 더 나아가면, 가난하니 봐주자는 건 감성팔이고 선동이다 이거지. 내가 그래도 얼마 전까진 이런 선동에 속아도 주고 넘어가주고 했는데 진보들 하는 거 보니까 지들은 챙길 거 다 챙기고… 안 되겠더라는 거야.
처음 하는 얘기가 아니고, 다 옛날에 한 얘기야. 아래는 2018년 6월달에 쓴 글의 일부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2020년이나 2022년에 보수정치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번 지방선거와 앞서 언급한 2008년 이후 흐름의 유사성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보다는 요동치는 대중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반영된 결과라는 점에서 발견된다. 즉, 최근의 급격한 변화는 구조가 아니라 사건이 주도한 것이란 얘기다.
이 지면에서도 수차례 지적했듯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어떤 가치나 노선의 관철이라기보다는 기만적 행위를 지속하는 비정상적 권력을 하루빨리 제거하려는 욕망의 실현에 가까운 사건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앞서 글에서 지적했듯 이 사건의 영향 속에서 치러졌다. 따라서 앞서의 사례처럼 이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유권자의 지향은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현재의 구도가 구조적 차원으로 고정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문재인 정권이 역대 그 어떤 정권보다도 성공적 마무리를 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여당이 10년 이상 장기집권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세대를 넘는 장기집권은 사실상의 독재체제가 구축되거나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정치가 해결하는데 지속적으로 성공해야 가능하다. 전자는 바람직하지 않고 후자는 집권세력이 지속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양당 중심 대통령제 기반의 구조에선 이것이 쉽지 않다.
만일 정권교체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면 그때 대안으로 각인될 세력이 어떤 내용을 갖추고 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권 인사들이 말하는대로 보수정치가 혁신에 성공하고 전열을 정비해 ‘합리적 보수’라는 새로운 노선을 갖고 대안 세력으로 떠오른다면 최악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현재의 정치권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결과는 서구의 경우처럼 대중의 원한감정이 극우화된 형태로 돌출되는 것이다. ‘공정성’을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에서 이 길로 이어질지 모르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공정성에 대한 갈망은 민주주의와 시장논리의 결합이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 갈망이 좌절될 때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느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사람들은 불공정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약육강식의 질서를 강화하는 시장원리의 확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길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을 내면화한 상황에선 스스로 강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방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같은 ‘요구’도 결국은 정치의 효과인 셈이다.
서구의 경우 이런 요구가 소수자 및 난민으로부터의 분리 시도를 통한 정상성 회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요즘 말하는 극우포퓰리즘이다. 인터넷이 세계만물을 통합하는 시대상 속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이걸 바람직한 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을 자처하는 정치는 태평성대 속에서도 파국을 준비하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실질적 평등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사회적 신뢰가 만들어져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들 역시 마련돼야 한다. 대안적 정치는 이런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얘기, 계속 했었지. 아래는 2019년 3월달에 쓴 글의 일부이다.
최근의 자유한국당은 별다른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극단적 행태로 일관하고 있는데도 지지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 이 덕에 국정농단 정국 이전의 양당구도는 거의 복원됐다. 이것은 대중이 자유한국당의 극단적 행태에 단순히 호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어차피 손해를 감수하는 개혁이 어렵고 또 안 될 거라면 차라리 각자도생을 선택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변화 된 경로와 거의 일치한다.
이 글들 뿐만이 아니고 이 시기 정치에 대해 쓴 거의 모든 글에 이 얘기가 들어가 있다. 심지어 이때 한겨레 이재훈 님이라는 분과 디스팩트라는 팟캐스트 했거든? 거기서도 맨날 한 얘기가 이거였어. 나만 했느냐, 아니지. 대학 졸업도 안 했는데 나만 한 얘기겠니? 석박사 하신 분들도 다 하던 얘기고 난 그냥 따라한 것 뿐이다.
여러분이 절대로 믿지 말아야 될 표현이 있습니다. 단군이래 최초라든지 어쩌구 저쩌구 한 최초의 세대라든지 하여간 뭔가를 놓고 아주 새로운 현상이라든지 세대라든지 이런 얘기는 일단 걸러라. 그런 거 없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똑같은 일이 변주되는 것에 불과하다.
근데 이런 얘기 해봐야 다들 자기들 좋을대로만 듣고 말하거든. 누구 남 욕하는 근거인줄이나 알고… 왜 얘만 욕하고 얘는 욕 안 하냐 이런 얘기나 하고… 그러니 쓰고 떠들어봐야 다 소용이 없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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