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모든 논의가 지켜야 할 일과 아닌 일로 귀결돼 도식화 되는 세태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에 정의당 김종철 사건에 대해 방송에서 얘기를 하는데, 진행자가 일이 일어난 곳이 실내가 아니라 실외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거였다. 거슬렸다. 그게 중요한가? 진행자는 성폭력이란 말을 성추행으로 정정하려고 하기도 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한 마디 했다. 가령 박원순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이란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더냐… 성폭력이란 범주는 너무 넓으니 성추행으로 명명하자 라는 게 그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옳은 얘기일 수 있으나 실내가 아니고 실외란 말과 결합된다면 그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뭐라고 부를 거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게 어떤 맥락이냐는 게 중요하다.
피해호소인이란 단어가 처음에 등장한 맥락은 ‘피해자 지위 박탈’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에 박원순 사건 당시 여당이 올바른, 또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단어를 썼다면 나름의 설명이 가능했을 거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중에야 밝혀진 거지만 자기들끼리 모여서 실제 피해 사실의 소극적 부정을 목적으로 이 단어를 쓴 게 사실이란 것도 드러났다. 피해호소인이란 단어가 맞냐 틀리냐가 아니라 이 맥락이 문제인 것이다. 얼마 전에 정춘숙 의원도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민주당에서 피해호소인, 2차 가해 문제, 피소사실 유출 논란이 있었다. 정 의원은 피해자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데.
“피해호소인 문제는 많이 아쉽다. 이번 사건으로 어느 정도의 젠더 감수성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피해호소인이라는 건 원래 있는 말이었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냐의 문제가 있었다. 피해호소인이 문제가 된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느낌이 다르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지 잘났다는 듯 떠들 문제가 아니지만 떠들고 쓰고 하는 일로 먹고 살기에 지난 주에 잡지에 사건에 대한 글을 보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9880.html
그랬더니 편집장에게 전화가 왔다.
잡지에 보낸 글에 대한 수정 요청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자기 맘대로 바꿔놓고 일언반구도 없는 경우다. 그런 편집장도 있었다. 일본에 대한 얘기였는데, 나중에 보니 글의 핵심 줄기를 바꿔 놓은 것이다. 항의를 했더니 “내가 특파원을 3년 반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더 잘 아는 문제이니 외부 필자 글을 멋대로 수정한 것도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는 안 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시간이 너무 없어 급해서 그랬다든지 뭐 하여간 둘러댈 말은 많지 않나? 어떻게 외부 필자에게 ‘너보다 많이 아는 내가 볼 때, 네 얘긴 틀렸고 그래서 고쳐줬다’는 취지의 얘길 당당하게 하지?? 저도 작은 매체이지만 편집장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외부 기고도 많았고요. 비문이나 맞춤법을 고친다든가 한 일은 있어도… 하여튼 기이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서… 내가 보낸 글은 절대 고칠 수 없다 고쳐선 안 된다, 이런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걸 먼저 분명히 하고. 편집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말을 했는데, 고발과 수사에 대한 대목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아예 빼달라는 거였다. 그건 곤란했다.
이런 얘기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고발의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그게 부적절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공당이기 때문에 ‘선한 의도’의 고발도 있을 수가 있다. 어떤 지지자가 관음증적 시도가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정당 대표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용서가 안 되니 고발하겠다는 식의 주장도 나올 법 하다. 공당은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고발은 안 된다’는 규범화는 필연적으로 친고죄 얘기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건 익히 알듯 함정이다. 사건의 맥락에 따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수사기관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사건이 그 맥락이 아닐 뿐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형사고발을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상의 얘기를 해야 한다. 공중파에서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변호사의 멋진 글도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런 거다. 왜 고발과 수사와 재판은 반드시 2차가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그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무튼 그런 취지를 설명했고 표현의 수위를 적당히 다듬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장혜영 의원이 KBS 인터뷰에서 말씀을 잘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지켜야 하는 어떤 규범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건의 맥락 속에서 바람직한 해결 방식을 함께 찾아갈 것을 요청하는 정치가 중요하다.
“물론 일각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생각할 때 , 가해자를 명확하게 형사고발해서 법적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견해에도 일견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저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는 길에 있어서 형사고소를 진행하는 것이 저에게 가져다 줄 여러 가지 고통들, 쏟아질 2차 가해와 여러 가지 관심과 끝없이 제가 당한 피해들을 소명하고 설명해야 되는 이 절차들을, 그 지난한 재판 과정에서 겪어야 되는 고통을 제가 겪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형사고소의 단계를 진행하지 않은 것이고, 당도 피해자인 저의 마음과 저의 결정을 존중해서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점을 함께 이해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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