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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복음주의

2025년 2월 1일 by 이상한 모자

김준우님의 유튜브… 김준우여 신화가 되어라! 에서 명절에 신문도 안 나오고 하니 이런 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했는데, 갑자기 얘기가 기독교 복음주의까지 간 거였다. 복음주의라고 하니 김준우님이 그게 에큐메니컬이냐 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에반게리온이다 라고 했다. 영어가 생각이 안나서… 에반게리온이 아니고 에반젤리컬이라고 하나 그렇지.

김준우님이 말한 에큐메니컬은 교회일치운동인데 쉽게 말해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간의 공통분모를 찾고 연합하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성향상 온건파적이고, 그러다보니 자유주의적인 것 아니냐 이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지. 우리는 NCCK라고 있잖나. 옛날 정치인들 보면 이쪽이랑 가까운 사람들 종종 있음. 손학규? 언론사 중에는 CBS… 근데 지금은 차별금지법 이슈 이런 거 때문에 꼭 옛날 같지만은 않단다. 여기서 한숨 한 번 쉬고.

여기서 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자면, 여러분이 크루세이더 킹즈 3를 하다가 보면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유럽 중심의 게임이니까 기독교 계열로 창시를 하게 되겠지. 근데 교리를 막 마음대로 하게 될 거다. 그러면 아무리 기독교 계열로 해도 천주교 녀석들은 너를 이단으로 볼 거란 말야. 그러면 적대적이 되고 성전을 선포하고 이런다고.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 때에는,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잖은가? 치트를 써야지. 일단 디버그 모드 진입해서 콘솔을 여시고 add_doctrine special_doctrine_ecumenical_christian을 입력한다. 그러면 네가 만든 종교에 세계교회주의 옵션이 붙고, 주변의 천주교 녀석들은 너를 미혹된 신앙으로 여기지만 적대적 신앙으로는 보지 않는단다…

아무튼. 복음주의가 긴 얘긴데, 올타임 레전드 호프스태터 횽님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다 나온다. 아니 그거 한 권 읽고 도대체 얼마나 울궈먹는 거여!!! 미안합니다… 그럼 뭐 어떡해 내가 뭐 교수도 아니고… 아니 제가 다른 책을 안 읽은 건 아닌데… 복음주의의 핵심은 영상에서도 얘기했는데, 신도가 성직자를 거쳐서 신과 만난다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에서는 신도가 신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이게 핵심이다. 가령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중요하다. 비유하자면 유권해석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도 하고 미사에서 특정한 형식과 역할에 맞춰서 집전을 하고 하는 거다. 반면 복음주의에서 목사는 신앙공동체의 촌장 같은 거다. 성경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 구원은 신도가 개인 차원에서 회심을 하였느냐의 문제이다. 성직자의 보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주의 운동의 확산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관계가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폐해가 커지자 ‘기본으로 돌아가자’ 같은 기분으로 대각성 운동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복음주의자들이 반대의 대상으로 성공회와 카톨릭을 찍으면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논리인 즉슨, 사회의 부패와 혼란은 엘리트 때문인데 성공회와 카톨릭 시스템이야 말로 엘리트 시스템 아니냐, 왜 하나님 믿는데 성직자의 위계에 의존해야 하느냐, 하나님 앞에 우리는 평등하다… 이렇게 된 것. 심지어 평신도가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왜? 신도 개인에 성령이 임할 수 있는데, 설교를 목사가 한들 평신도가 한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그러니까 왕과 귀족을 반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꺼내들었던 젠틀맨 후예들의 움직임과 맞물려 민주주의+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되었던 것.

그러니까 이 시기의 복음주의는 엘리트와 비교하자면 언더독이지. 종교적 무관심과 싸우면서(즉 예수의 길을 따라 전도에 열정을 바치면서),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차별화 해야 했다.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야지. 이게 사회복음 운동이다. 가령 레드데드리뎀션2를 생각해보자. 더치네 갱단에 짐만 되는 스완슨 목사라고 있다. 애초에 의문은 여기 목사가 왜 있냐는 거다. 목사도 처음에는 어려운 사람들하고 좋은 일 하려고 한 거 아니겠어? 하여간, 복음주의가 그래도 여기까지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종교 전반에 양자택일의 순간이 와버린다. 모던이냐, 고집이냐. 시대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거여서 종교 전반이 모던에 굴복하는 현상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러면 그 반동형성으로 종교적 위기감은 더 커지는 거지. 1925년에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텨 테네시 주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교사에 대한 이른바 ‘스콥스(교사 이름) 재판’이라는 게 전국에 라디오(그렇다.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미 전역에 라디오가 보급된 거였다!)로 생중계 되는데, 이때 테네시 주 측 변호사가 제 책에도 나오는 그 이름도 유명한 거물급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었다. 젊은 시절엔 민중주의자였는데, 그 때는 복음주의와 개혁(모던)이 같이 갈 수 있었지만, 이 때는 이제 그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 양반은 복음주의를 택한 거지. 그리고? 완전 개발려버림. 완전 처참하게… 다만 법 위반은 사실이므로 판결은 유죄였다. 그러나 복음주의-근본주의가 아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본주의 진영의 위기감은 아주 심각해졌다. 앞서 본 것처럼 복음주의 교리에서 성경은 매우 중요한데, 이제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던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됐고, 그러한 조류에 복음주의자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걸 인정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여전히 성경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자로 변모할 수밖에 없게 된 것.

그리고 나서 혁신주의와 대공황을 거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시대가 열리고, 전쟁을 겪고, 뉴딜이 등장하고, 모던이 전면적으로 사회를 근본부터 바꾸고, 이 덕에 뉴딜연합이 조직되고, 이 위력이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으로 인한 반전시위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동안 복음주의-근본주의 진영은 뉴딜의 반대편에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게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이 때까지 코너에 몰리게 된 기업가, 부유층, 신자유주의자, 대외적 강경파, 사회문화적 보수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말하자면 반뉴딜연합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이것을 조직한 것은 사실상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미는 흐름으로 이어졌기에, 이 연합은 레이건 연합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복음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전근대적 퇴행과 비합리의 정치운동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 시대의 차별금지법 이슈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국내 기독교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짚어낼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미국의 반지성주의, 복음주의, 차별금지법

화려한 일족

2025년 1월 31일 by 이상한 모자

연휴 기간 동안 글을 많이 쓰려고 노력했지만, 성과가 탐탁치 않다. 금요일은 약속도 있고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랄 듯 하고… 그래도 토요일, 일요일이 아직 남았다는 각오로 좀 더 집중해야 한다. 집중… 집중이 문제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흐트러진다. 자꾸 온갖 다른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 눈은 눈대로 말썽이고…

최근 밥을 먹으면서 넷플릭스에서 화려한 일족이라는 제목의 일본 드라마를 보았다. 이렇게 썼지만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원작은 소설이지만 여러차례 영화화 및 드라마화 되었다. 내가 본 것은 2007년판이다. 2021년에도 드라마화 된 것으로 아는데, 언젠가 왓챠에서 본 거 같아서 모처럼 보려고 했더니 없어진 거 같더라. 하여간 내용은 일종의 개막장 드라마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막장 드라마라면 대환영이다. 막장 드라마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짜식들아.

드라마를 보기 전에 사전조사를 좀 해본 바, 2007년판의 드라마는 원작에 각색이 상당히 들어가있다고 한다. 원래 원작의 주인공은 아버지인데 2007년판의 드라마는 기무타쿠가 주인공을 맡은 고로 장남이 주인공이 되었다. 게다가 원작은 장남도 잘한 일만 있는 건 아닌 다소 입체적 인물로 그려지지만, 2007년판의 기무타쿠는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며 윤리적 경영자라 볼 수 있는 이상적 인물이다. 그에 반해 기타오오지 할배가 맡은 아버지 쪽은 뭐 이런 녀석이 있나 싶을 정도의 사악한 인물로 나온다. 기무타쿠와 기타오지상 두 거물이 등장한 만큼 스텝롤을 보면 배우 항목이 기무타쿠로 시작해서 기타오오지로 끝난다. 그 외 거물급 배우들의 호화캐스팅이 나름대로 굉장하다. 스즈키 쿄카, 야마모토 코지, 니시다 도시유키, 니시무라 마사히코… 이거 어째 미타니 코키 사단인데, 연기들 잘하지.

하여간. 진지한 얘기로 가자면… 2007년의 각색이 뭘 의미하느냐를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본질은 기무타쿠가 나온다고 하는 업계의 사정인 것이지만 시대정신의 측면에서 본다고 하면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각색을 기무타쿠 중시로 하는 바람에 내셔널리즘 구현으로서의 제조업 중시 정책과 시장개방과 이윤추구가 본질이라고 하는 구조조정 중시 정책의 충돌이라고 하는 갈등 구조가 대단히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 드라마는 둘 중 어디를 편드는 건가? 그건 주인공이 누구냐의 문제인데, 주인공은 기업가 정신을 갖고 일본의 철강 산업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려는 이상적이고 윤리적인 경영자다. 얘를 아빠인 냉혹한 금융자본가가 지 아들이 아니고 자기 아빠 아들(그러니까 기무타쿠 입장에선 할아버지가 자기 아빠인줄)인줄 알고(그러니까 막장 드라마) 괴롭히고 코너로 모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근데 원작은 이 녀석이 주인공이 아니고 금융자본가가 주인공이다. 이게 중요한 차이다.

즉, 이 드라마는 호송선단식 경제 구조에서 금융이 제조업을 내셔널리즘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조, 즉 고도성장을 옹호한다. 극중에 이 공식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동력은 다시 말하지만 금융시장 개방(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리)과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정부와 거기에 휘둘리는 금융자본, 즉 신자유주의적 압력에서 나온다. 이 압력이 비록 비윤리적으로 살고 혈통과 컴플렉스에 얽매이고 하지만 어찌됐건 뭔가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던 한 부르주아 가정을 파멸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가 딱 나오는 거지.

비슷한 구도를 관료들의 여름에서도 본 일이 있다. 이 드라마는 2009년에 방영됐는데, 마찬가지로 소설이 원작인 걸로 알고 있다. 극의 배경은 관료 사회지만 갈등의 선은 국내산업파와 국제파 사이에 그려진다. 국내산업파는 전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역시 내셔널리즘적으로 국내 제조업을 키우는 일에 모두가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의고, 국제파는 시장을 개방해 도태시킬 것은 도태시키는 등 중복투자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주인공 카자코시 신고는 당연히 국내산업파의 리더이며 등장인물 중 악역은 전부 국제파다.

이런 드라마를 2007년과 2009년에 왜 방영을 하고 있었느냐?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평론가는 이런 식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2007년은 고이즈미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개혁의 잔영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아베 신조가 집권했던 때다. 2009년은 아베 신조로 시작한 포스트 고이즈미 자민당 정권이 권력을 상실하는 시기다. 이 드라마들의 결론이 아베 신조가 지향하던 바(내셔널리즘의 맥락에서 확장적 통화 재정 정책으로 제조업 부활)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게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요소.

그렇다고 아베 신조가 시켜서 만든 드라마다 이런 소리가 아니고… 아베 신조의 주장도 뭔가의 반영일 거 아니냐… 시대의 표현이라는 게 그렇게 흘러가는 거 아니냐… 또 필요조건 충분조건 혼동해서 나한테 막 그러지 말고… 또 블로그에다가 딴 짓 했네… 이제 자야지…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관료들의 여름, 화려한 일족

경제적 여건보다 담론이 문제라고 말한 이유

2025년 1월 27일 by 이상한 모자

내가 윤석열의 계엄 개지랄 이후에 무슨 유튜브 방송에서 한 세 번 쯤 말한 게, 2030 남성의 보수화에는 경제적 여건 등이 아니고 담론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라는 거다. 이 얘기를 하게 된 이유, 건너편에 앉은 분이 서구의 극우포퓰리즘 얘기하면서 불평등이 극우화를 추동한다 이 말씀하셔서… 우리는 꼭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이 얘기 한 거지.

엊그제 경향신문에서 쓴 인터뷰 기사 보면 이렇게 나오잖아.

-남성이 스스로 피해자라고 여기는 ‘피해자 남성성’을 분석한 연구를 소개하면.

“데이터 4개 세트를 썼다. 데이터 4개는 2015년, 2018년, 2020년, 2023년 다른 시점에 측정됐는데 결론은 모두 같았다. 너무 신기하게도 교육수준이나 임금 수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인지, 실업상태인지는 남성이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수준과 별 상관성이 없었다. 오히려 중요한 변수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현재 나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였다. 부모가 현재 내 나이였을 때보다 지금 나의 위치가 더 낮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남자가 더 차별받는다는 취지의 인식을 더 강하게 지지했다.”

-이른바 ‘지위 하락’을 느끼는 남성들 사이에서 조금 더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었나.

“옛날에 특별히 조금 더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중상층 이상에서 ‘나의 지위가 부모보다 더 낮아졌다’고 대답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남성이 더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반대로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는데, 나의 사회적 지위도 변함없이 높거나 혹은 부모보다 더 지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오히려 ‘남성이 더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

-두 논문의 결론은 ‘지위 하락’을 느끼는 남성들에게서 성차별적 인식이나 남성을 피해자화하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위 하락’은 실제 ‘지위 하락’보단 주관적 인식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의 연구들은 실제 이동성이 감소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청년들의 주관식 인식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노력하고 인풋을 넣어도 돌아오는 결과값이 예전 부모세대가 손에 쥐었던 것과는 다르다.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제대로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회의가 더 커진 것 같다.”

-‘지위 하락’ 인식과 최근에 사회를 위협하는 극우 세력의 부상과도 연결이 되는지 궁금하다.

“한국을 비롯해 다수의 전 세계 연구 결과는 사회의 이동성 감소나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이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는 현상과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241813001/

여기서도 나오지만, ‘지위 하락’은 주관적 인식이라는 것. 부모 세대(대체적으로는 베이비붐 세대)보다 지위가 하락했다거나 그럴 거라고(경쟁 심화) 느낀 세대의 상대적 박탈감이 극우화를 추동한다는 건 내가 알기로는 서구권에서도 많이 하는 얘기거든? 그런데 이 연구는 다시 말하지만 ‘주관적 인식’에 대해 한 것임. 이 주관적 인식은 사실인가에 대해 연구 과정에서 참고한 게 있을 텐데, 그 대목에 대해 “한국의 연구들은 실제 이동성이 감소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고 하는 거지. 이거는 일전에 미국 교수가 자기 블로그에 쓴 얘기와도 일맥상통함. 한국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과 달리 실제 지위의 대물림이 심화됐느냐는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 이 ‘주관적 인식’은 어디서 온 거냐? 엄빠한테 혼나서 그런 거냐? 그런 것도 있겠지. 근데 거기서부터는 경제적인 어떤 조건의 문제라기 보다는 담론 문제니까, 그건 일단 미뤄두고. 경제적인 조건부터 짚어보자. 2030 남성의 보수화 이유로 또 하나로 들 수 있는 가설이, 어찌됐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일자리-지위-임금 경쟁이 심화돼서 그런다는 거거든? 어렸을 때부터 비교당해왔는데 말야, 크니까 취업 과정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이런 설명방식 있잖아. 그래서 그런 현실로부터 느낀 공포감 때문에 ‘이러다 내가 엄빠보다 못살게 되는 거 아닐까?’라는 데로 귀인 오류를 저지르게 된 것이냐? 이런 거지.

근데 실제 그런가? 미국 교수 블로그를 보자.

임금상승률의 성별 격차가 <한계 일자리>나 <적당한 일자리>에서는 9%에 달하지만, <좋은 일자리>에서는 4.5%로 줄어들고, 추가로 1-2차 연도 사이의 일자리 변동, 결혼, 직무 변동 등을 통제하면 성별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게 바뀐다. 다시 말해, 대기업의 괜찮은 일자리에서는 성별 임금증가율 차이가 크지 않고, 그 작은 격차도 직무 변동이나 승진 등에 의해서 설명된다. 하지만 그 이하 일자리에서는 어떤 변수를 통제하더라도 상당히 큰 성별 임금증가율 격차가 있다.

동일 일자리에서 성별 임금 격차와 기회 격차가 없다는 주장은 여성 중 상위 10%만이 차지하는 <좋은 일자리>의 스토리를 전체로 일반화한 오류다. 인사부가 크고, 임금과 인사조치가 규정화된 대기업에서의 성별 차이가 작지만, 여성 임노동자의 90%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런데 대기업에서는 다른 방식의 성별 격차가 존재하는데 바로 승진 기회의 차이다.  <한계 일자리>보다 <좋은 일자리>에서 여성의 승진 확률이 남성보다 더 크게 낮다 (성별 격차 5%p vs 8%p). 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여성은 남성보다 승진 때문에 일자리를 바꾸는 확률이 높다는거다. 승진에 뒤쳐지는 현실에 짜증이 나서 설사 임금이 그렇게 높아지지 않더라도 승진이 되는 일자리로 바꾼다. 이런 경향은 여성은 남성보다 한 조직에 충성하기 어려운 구조적 조건이 있다는거다. <한계 일자리>에 있다보니 임금 상승을 위해서, 승진이 안되다보니 승진을 위해서, 여성은 남성보다 일자리를 더 높은 확률도 바꿀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남성은 일자리 변동의 가장 큰 이유는 임금이다. 일자리를 바꿀 때 남성은 임금이 평균 20% 정도 높아지는데, 여성은 10% 정도만 높아진다.

또 다른 발견 중 하나는 결혼의 효과다. 남성은 결혼이 임금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데, 여성의 결혼은 임금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같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임금이 하락하는건 아니고, 여성의 결혼 후 임금 하락은 일자리를 바꾸기 때문이다. 동일 일자리에서는 남여 모두 결혼이 임금에 끼치는 영향이 없다. 그런데 결혼 후 일자리를 바꾼 사람 중 남성은 임금 변동이 유의하지 않은데, 여성은 임금이 16% 낮아진다. 이러한 변동이 자의에 의한 self-selection인지 구조적인 압력이 있는건지는 이 연구가 밝히지는 못한다. 그리고 결혼이 여성에게 끼치는 이런 부정적 영향은 <한계 일자리>에서 상당히 크고, <좋은 일자리>에서는 미미하다.

결론은 클라우디어 골딘이 얘기한 성별 임금 격차는 차별보다는 커리어와 가족 간의 선택의 문제가 되어 성별 격차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일부 국가에 한정된 얘기지 한국의 현실이 아니라는거다. 논문에서는 길게 얘기했는데, 미국, 유럽의 연구에서 일자리가 동일할 때 성별 임금 상승률 격차가 거의 없다는 연구들이 있다. 한국은 이러한 <마지막 챕터>에 들어서지 않았다. 한국의 대졸 청년 여성 노동자는 노동시장 진입 당시 일자리 할당에서, 노동시장 진입 후 임금 상승률에서 이 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

https://sovidence.tistory.com/1282

아니래잖아… 그러니까, 왜, 도대체 어디서 뭘 경험을 하셨길래, 그런 ‘주관적 인식’을 갖게 되신 거냐고. 그러니까 저 같은 놈들은 그러면 이거는 다른 경제적인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의 문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임. 2030 남성 중 일부가 공유하는 어떤 담론의 물적 토대가 있고, 그걸 기반으로 뭔가가 공유-재생산 되고 있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글 써야 되는데… 작업을 시작하기를 끝없이 유예하면서… 이런 얘기를 계속 블로그에다가 끼적이는 것이다…

추가. 불평등의 피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하위계층이 아닌 중산층이 보수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미국 교수의 아래 포스팅을 참고.

https://sovidence.tistory.com/1148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2030, 보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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