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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비난을 위해 남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

2025년 7월 7일 by 이상한 모자

유튜브 세계에 살다 보니 부쩍 그런 느낌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많은 건지, 아니면 많아진 건지, 그동안 그냥 내가 무시하고 살아왔던 건지 모르겠다. 그건 오로지 자기가 올바로 살고 식견이 있고 고민이 깊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만 남의 처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건설노조에 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았다. 협상이나 교섭을 위해서야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일상에서 마치 ‘힘들게 사는 사람’의 전형처럼 건설노동자가 다뤄지는 것은 좋은 일인가? 물론 그럴만한 맥락이면 괜찮다. 기획기사를 쓴다든지… 근데 그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인식과 대화의 과정에서 말이다. 어떤 녀석이 “땡볕에서 땀 흘리는 건설노동자도 있는데, 이 정도로 불평하면 안 되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좋은 일이냐는 거다.

하물며 비난을 하는 맥락에 동원한다면 어떨까? 오늘은 ‘유튜브 방송도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어떤 분이 ’30도 넘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에 비하면 에어컨 바람 쐬면서 입 터는 것 정도는 꿀 빠는 일 아니냐’라고 하는 거였다. 내가 말한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건 기계의 조작 등 신경쓸 게 많아 정신이 없어 속보를 놓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혼자서 방송과 내용 준비, 조작을 다 하다 보니 시청자가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거였다. 여기다가 ‘꿀 빠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는 것으로, 즉 이 말 하신 분은 남의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이다. 근데 이런 분이 많다. 그냥 자기 혼자 생각한 바를 화면에 나오는 사람에 적용을 해가지고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결론내고 하는 분들이 천지다.

그냥 못 알아 먹고 마는 거면 크게 상관이 없는데, 거기서 30도 넘는 바깥 운운 하니까 성질이 나는 거다. 이게 처음 보는 지랄이 아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입으로만 싸우고 어쩌고 하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두 가지 맥락. 첫째로 건설노동자와 같이 ’30도 넘는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신성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둘째로 이러한 태도를 남을 도착적으로 깎아내리는데 동원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노동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결과가 진보(학출 노출의 대립이나 학출의 기만적 자기연민)나 보수(계급연대 해체)를 가리지 않고 각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연상하게 되어, 입 털어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도 전-직업적 운동권으로서도 현재진행형의 정신적 운동권으로서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른 것 다 떠나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노동이 힘들어서 신성한 게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실현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수단이기에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건설노동자에게는 뉴스 해설이 필요 없겠느냐’라고 했다.

아무튼 꿀 빤다느니, 이런 현실 인식에도 작용하는 구조라는 게 있어 보이는데… 그런 건 나중에 또 논해보자.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노동

VIVANT을 보고

2025년 7월 3일 by 이상한 모자

밥 먹으면서 VIVANT이라는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를 보았다.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런 노골적인 군사팽창주의적인, 아베신조적인 열망을 숨길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는구나 라는…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보기 싫으면 적당히 끊고 가시기 바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별반’이라는 육상자위대 산하의 초법적 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이 드라마 소개와 더불어 ‘별반’의 모티프가 된 실제 ‘별반’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사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81901260000926

하여간 이 ‘별반’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대단한 녀석들인데, 주인공인 사카이 마사토는 국제적 테러 조직 ‘텐트’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어… 일부러 휘말린 건지 휘말리게 된 김에 개입하는 건지 아무튼 휘말리게 되어 ‘텐트’를 조사하게 된다. 이 과정에 일본 경찰의 멋진 정보분과인 외사과 소속의 아베 히로시와 사막을 건너는 등 대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얘기로 시작해서 뭐지 인디존스 같은 얘기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고 뒤에 가면 사카이 마사토가 ‘텐트’ 지도자인 야쿠쇼 코지의 어릴적 헤어진 아들이라는 걸 깨닫는 등 꽤 흥미진진한 전개로 이어진다.

여기서 이제 일본 국뽕과 대일본제국 만세 같은 얘기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게 뭐냐면, 사실 젊은 시절 하야시 켄토였던 야쿠쇼 코지는 아베 히로시와 마찬가지로 공안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공안 소속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가상 국가인 발카에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내전에 휘말리는데, 이래 저래 하다보니 발카인들과 용병집단을 형성해 군사 활동을 대신 해주고 돈을 벌어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일에 평생 몰두해 거대 테러조직을 만들게 되었고, 그 테러 조직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내전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등의 활동을 뒤에서 펼치고 있으며 전과가 없는 ‘깨끗한’ 후계자도 키워 가상국가 발카를 번영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더라 라는 것인데…

이게 뭐냐면, 결국 아베 시절의 적극적 평화주의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인 야쿠쇼 코지가 발카인들을 돕다가 무장세력화 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다. 그런데 거기서 비극으로 가지 않고 발카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실제 성과를 낸다는 것은 무슨 얘긴가?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평화도 가져오고 개발도 하고 부도 쌓게 만들고 다 해준다 이거다. 대동아공영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이렇게 하는 와중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이건 별반 소속인 아들 사카이 마사토가 해결해주게 된다는 것이다. 별반 사카이 마사토의 활약 덕분에 가상국가 발카에는 실질적 번영이 찾아온다. 근데 별반은 뭐다? 초법적 특수부대이다 이거다. 여기서 아베 시대의 특정비밀보호법, 안보법제 이런 걸 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결국 야쿠쇼 코지는 마지막엔 일본으로 돌아와 개인적 복수를 하려다가 사카이 마사토에게 죽는데, 그 순간에도 ‘역시 일본을 지키려고 아버지까지 죽이는 너는 역시 내 아들! 자랑스럽다!’라고 한다. 사카이 마사토는 눈물을 흘리고… 근데 야쿠쇼 코지가 하려던 개인적 복수가 뭐냐면, 자신과 가족이 발카에 파견됐을 때 희생되도록 내버려 둔 부패 정치인을 죽이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애국자… 였던 피해자 대 부패 정치인’, 이 구도는 극우정치를 보며 이미 익숙해졌다. 그러니까 구세대가 손에 피 묻히고 전쟁 일으키고 이런 게 다 외국에 번영을 안겨주고 이후 세대를 잘 살게 해주려고 한 거다, 책임은 뭐 지라면 어느 정도 지겠지만 잊지 말아야 한단다 알겠니? 뭐 그런 정서겠지.

그 외에도… 발카인들이 계속 일본 칭송을 하는 등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수가 있나 싶은 장면이 계속 나온다. 뒤로 갈수록… 극우 드라마 어쩌구 라고 해도 이건 정말 부인할 수 없겠군 싶은 생각이 강해진다. 아니 근데 요즘 극우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얘길 많이 보았는데, 2030 남성 얘길 하면서 말이다. 함부로 극우라고 하지 마시오! 이 얘기 엄청 봤거든? 근데 다들 일본 정치에서는 뭐 스스럼없이 무조건 다 극우라고 하더라고. 아무튼 군대도 없고 무언가가 거세?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일본 버전의 극우적 세계관을 느끼고 싶다면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VIVANT, 비반, 사카이 마사토, 아베 히로시, 야쿠쇼 코지

진정한 극우?

2025년 6월 14일 by 이상한 모자

여러 글을 보는데, 결국 그런 얘기 아닌가 싶었다. 다들 관심 갖는 얘기. 그래서 한국 사회에 극우란 얼마나 되는 거고, 그들로부터 나의 삶은 얼마나 위협 당하고 있는 것이며, 향후에 이들을 어떻게 처리(배제든 분리든 설득이든 감화든…)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분석, 저런 통계, 이런 숫자, 저런 조사를 막 가져와서 이렇게 갖다 붙이고 저렇게 갖다 붙이는 일을 끝도 없이 반복하며 지 하고 싶은 얘기 계속하고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건데.

과연 그런 숫자로 ‘진정한 극우’의 정확한 퍼센티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반대의 정치’라고 이름 붙인 개념을 계속 말해왔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 지향이  ‘진정한 ~’은 아니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아직은 진정한 극우가 출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는 원래 그런 거니까. ‘진정한 극우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결국 다수는 진보라든가, 중도라든가, 상식이라든가 뭐 이런 얘기를 증명하려는 것일텐데, 그 진보 중도 상식은 ‘진정한 진보’, ‘진정한 중도’, ‘진정한 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왜 극우에 대해서만 혹은 이대남의 보수성에 대해서만 그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안도를 얻으려 하는가?

그래서, 전국민 중에 ‘진정한 극우’가 몇 퍼센트 정도 되고, 그냥 보수는 몇 퍼센트고, 합리적 보수는 몇 퍼센트고, 범진보가 몇 퍼센트… 이따위 분류법은 중요치 않다는 거다. 그건 정치적 국면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 숫자들의 중요성은, 그러한 숫자들이 등장하는 국면에 현실 정치가 유권자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조직하였는지를 동시에 분석할 때에야 유효한 데이터가 된다. 여기서 숫자들 즉 전자는 후자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일 뿐이다. 전 국민 중 극우가 몇 퍼센트 되느냐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특정 국면에 특정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게 되었는지 그 동학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의 정치’를 얘기했던 나는 ‘개념의 사슬’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개는 관심이 없고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우는 몇 퍼센트고, 앞으로 뭘 해야 이들을 없앨 수 있느냐만 묻고 싶어 한다. 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대단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치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관심이 없고, 누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그 죄를 책임지도록 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치 쇼핑하면서 상품을 둘러 보듯이 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납득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답답해서 쓴 말이고 큰 의미 없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길.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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