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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극우주의

내셔널리즘 동원 전략

2021년 3월 23일 by 이상한 모자

중궈니횽 같은 사람들은 옛날 버릇대로 이 정권이 뭘 하면 다 주사파적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닌 것도 있고… 그래 보이지만 아닌 게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령 문통이 김원봉 얘기 하면서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이러는 거는 주사파적 세계관과 관계가 없다. 그 세계관이라면 김원봉은 숙청을 해야겠지…

이건 안티 박정희적인 민족주의 세계관일 뿐이다. 한일회담-일본군-독재의 대립항으로서 친일청산-광복군-민주주의의 조합을 내세우는… 1960년대 이후 장준하 계열의 특징이다. 이 정권이 대북 문제의 성과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통의 후보 시절 행보나 임기 초 행동을 봐도 나타나는데, 이 흐름은 기본적으로 반일과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북한을 용인한다는 태도를 깔고 간다. 실제로는 대북 성과를 내는 게 정무적으로 이익이라는 점을 겨냥하고 있고, 민족주의적 서사에서 대북 온건론이 용인된다는 점을 알리바이로 활용하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왜 재개가 안 됐는가? 결국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런 것 말고 권력의 의도된 내셔널리즘 동원 전략이라는 것도 있다. 권력에 별달리 호소할만한 조직기반이 없거나 이게 훼손된 상태일 때 이런 게 등장한다. 가령 양제츠가 블링컨 거의 멱살잡고 자기 동네 가서 영웅된 것 봐라. 중국의 내셔널리즘 부상은 덩샤오핑 이후 공산당 지배의 근거가 훼손된 것으로부터 기인한 현상이다. 공산당이 부정부패와 반민주로 타겟팅 되면서 새로운 대중동원전략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이게 시진핑대에 와서 완전히 무르익었는데,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형상이다. 즉, 공산당이 내셔널리즘 동원전략을 통해 지지기반 유실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셔널리즘의 동원전략이 시진핑 독재 강화를 정당화하게 된 것이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는 광경의 실체이다.

일본 정치의 극우화 역시 아베 신조의 가문이 아니라 자민당이 조직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 ‘개혁’이 수반한 변화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관저 주도의 정치는 아베 신조 대에 이르기까지 민주당까지 포괄, 정파 불문의 개혁 과제 중 하나였다. 파벌정치가 나눠먹기와 ‘삼각동맹’의 원흉으로 지목 되었기 때문에 그 반대를 택한 결과이다. 메이지 유신에서 ‘막부가 아니니까 천황’으로 간 것과 비슷한 거다. 자민당이 휘청하면서 비자민연립정권과 그 여파로서의 지샤사 연정이 성립됐고, 정권을 잃기 직전의 고노 담화라든지 지샤사 연정의 무라야마 담화라든지 이런 게 중도화 의제로 제시됐던 거다.

그러나 실제 대중이 호응한 것은 교과서 문제로 대표되는 백래쉬였고 자민당이 ‘삼각동맹’ 즉 자기 지지기반을 파괴하는 대신 기댄 것도 극우주의였다. 우정민영화와 극우화를 동시에 추진한 고이즈미 정권은 이러한 현상을 여실히 드러냈다(이 시기 동아시아라는 공간 내에서 일본 외교가 장쩌민의 내셔널리즘에 대응하였다는 특성 또한 있다). 또한 고이즈미가 구현한 극우주의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분열할 시장주의와 국가주의를 봉합하는 아교로 기능했다. 해외 자본에 국가 사업을 넘겨줄 수 있다는 국수주의자들의 우려를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잡아 맨 것이다. 대중적 백래쉬의 배경은 고이즈미의 방북 전후 납북자 문제가 쟁점화 됐다는 것도 작용했다. 이제 일본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 뭔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이 정권에선 조장관님이 죽창가 올리고 김현종 씨가 다카스키 신사쿠 언급하고 유니클로 불매하고 이런 게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주의, 내셔널리즘

극우개신교에 대한 방송 내용

2020년 8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일요일 방송 내용인데, 기독교방송에서 얘기를 하려니 좀 조심스러웠다.

오늘은 전광훈 목사 문제로 잠이 오지 않는다(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방송 컨셉). 바이러스는 북한의 테러라고 하고 정부의 방역대책은 다 잘못됐다고 하고, 지금까지 정치인인지 목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행태 보여왔다.

전광훈 목사 자체가 이상한 사람인 점도 있으나 개신교의 역사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광훈 목사 사례에서 가장 문제인 건 교회 내에서 목사 권력이 너무 크고, 이게 교회 울타리 밖을 넘어 신도들의 생활과 세계관 전반에 영향 미쳤다는 점이다. 여기에 개신교의 특징이 작용한 면이 분명히 있다. 개신교는 과거 로마 가톨릭에 반발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 과정에서 가톨릭의 성직제도와 위계를 부정했다. 이른바 만인제사장 개념인데 성직자와 신도는 사명을 달리할 뿐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 한층 강화된 게 복음주의이다. 성직자, 즉 사람이 중개하지 않아도 회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주장은 언뜻 민주주의적인 걸로 보이기도 한다. 과거 미국 독립혁명 때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개신교가 독재권력과 싸울 때 정치적 역할을 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이런 사례는 개신교 교리의 정치적으로 좋은 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하지만 결국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고 예배를 집전하는 것은 목사이다. 그러다보니 성직제도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 개별 교회와 목사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 개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세속의 다른 권력이나 교단의 권력이 아니라 목사(나)의 권력을 따르라는 거다.

이게 정치화 된 게 전광훈 목사 사례일 텐데, 방향이 하필 반공인 것에는 한국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 각국에서 서로 다른 교단 출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지역을 나눠서 선교를 하기로 합의를 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의 경우는 미국 북장로교였는데, 복음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당시는 유교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었는데, 유교 질서에서 차별받던 서북지역은 상공업 중심지 중 하나가 돼있었다. 그러다보니 서구 시민사회가 형성될 때와 마찬가지로 구질서인 유림과는 구별되는, 재력을 갖춘 예비-엘리트들이 여기서 성장했고 이들은 대개 서북지역에서 세를 늘려가던 개신교와 결합했다. 조선이 식민지화 되고, 이후 해방 국면이 되면서 이들은 새로운 엘리트 권력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탄압을 피해 서북 출신 사람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남한 사회 엘리트 권력도 서북지역 출신들 중심으로 짜여지게 되었다. 서북인맥의 지연은 매우 끈끈했고 종교적 주류도 마찬가지 였다. 한국 개신교의 반공적 색깔은 이때부터 뚜렷했다.

물론 개신교가 필연적으로 반공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근대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한 전근대적 근본주의자들이 우파들과 결합한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 근대화는 과거 계몽주의 시절부터 진보의 실천적 결론이었다. 미국의 경우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뉴딜 정책 등을 통해 주도한 혁신주의가 근대화를 이끌면서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비주류화 되는 현상이 발행했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혁신주의 때문에 비주류화 된 이념적 우파, 자본가 및 고액자산가들과 손을 잡고 ‘침묵하는 다수’가 돼 1980년 레이건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 냈다. 한국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한 근본주의자들이 극우화되는 현상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장사’를 하려는 목적도 있다. 개신교가 사실상 포화상태가 되면서 새로운 사업 모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극우정치로 손을 뻗은 거다. 이들이 오늘날 새롭게 발굴한 게 공산주의 타령 등 유튜브를 활용한 ‘아스팔트 우파’이다(성소수자 혐오가 극단주의적 개신교의 메인 컨텐츠가 된 것도 마찬가지 원리). 전광훈 목사 교회 신도들 보면 원래 동네여서 다녔던 사람들도 있지만 유튜브 등으로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을 접하고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많다. 전광훈 목사는 이걸 활용해 주변 환경 변화로 인한 난국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결국 신도들은 이용당하는 것인데, 이런 사례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훌륭한 교회와 목사님들 많기 때문에 현명하게 판단하자.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개신교, 극우주의, 전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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