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선거컨설턴트가 지금 상황을 ‘초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얘기를 보았다. 심정적으로는 100% 공감한다. 그런데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초현실적이어서 총선 앞두고 제3당, 4자구도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진단의 현실성은 얼마나 될까?
물론 나도 일단은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제3지대에 대한 국민적 수요는 높다! 각 당이 뭔가를 바로잡지 않으면 큰일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유의미한 신당 출현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는다. 지난 번에 썼듯 어떤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서는, 지금 신당 얘기하는 주요 플레이어들이 그런 걸 모르고 움직인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하고 말겠지’ 하는 생각부터 드는 거다. 물론 이 분들이 어느 당의 비대위원장이나 무슨 단일 후보 역할을 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닌, 그것을 초월하는 끈기를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고 하면 나는 그 신당의 성격이 뭐든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한다. 기존의 상식부터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양당의 삽질은 과연 제3당의 출현 가능성을 높이는가? 요즘은 오히려 양당의 삽질이 양당제를 유지하는 핵심 요인으로 비춰지지 않는가? 한쪽이 정신차리면 아마 다른 한쪽도 정신차리는 척 할 것이다. 제3당이라는 옵션을 놔두면서도 양당은 서로 증오할 수 있는 한 얼마든지 마치 압력솥의 추를 다루듯 여의도 정치의 압력을 조정할 수 있다.
양당제는 기득권이다. 기득권이라는 것의 핵심은 기득권이 아닌 쪽의 선택지를 무력화하거나 제거할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배트맨시리즈를 보라. 여기서 기득권은 배트맨이다. 악당은 보통 원패턴이다. 배트맨은 다양한 악당들을 다양한 수단으로 제압한다. 차를 부수면 그 안에서 오토바이가 튀어 나오고, 오토바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붙이면 비행기로 갈아 타고 나온다. 배트맨에게는 언제나 수단이 있다. 마찬가지다. 제3당 출현? 다 수단이 있다. 역대 제3지대 세력들이 결과적으로는 다 양당제에 흡수되거나 굴복한 것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얘기하면 넌 무슨 안 된다는 얘기부터 하느냐고 면박주는 사람들 있는데 그게 아니다. 첫째, 이 모든 일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옛날에 다 있었던 일이다. 안 된다는 얘기부터 하는 게 아니라, 옛날에 그렇게 해서 안 됐다는 얘기 하는 거다. 둘째,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에 이러 저러한 비관이 있더라도 필요한 얘기를 계속하며 끈기있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전제가 있다면 비관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용기다. 뭔가를 안 하기 위해서 비관을 말하는 것은 비겁이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현실을 인정하는비관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비관을 덮어놓고 비난하는 게 정확히 양당제적 사고방식이다. 양당 지지자들에게 너희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얘기 해봐라. 정확히 ‘네가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배경엔 안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아니냐’, ‘뭔가를 해보겠다는데 왜 재부터 뿌리냐’란 논리로 말하지. 양당의 지지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선거법 개정 문제도 마찬가지야. 오피니언 리더들의 선거법 개정 여론이 있으니까 양당제는 한 발짝 앞으로 갔다가 다시 한 발짝 후퇴하는 걸 앞으로 가는 거라고 속이면서 계속 스텝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비관적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니까 얘기하지 말잔 얘긴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얘기해야 하는 거고, 그렇든 아니든 얘기해야 한다는 거다. 현실적 조건이 어떠하든 해야 하니까 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앞을 똑바로 봐야지 외면하고 정신승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눈 앞을 외면하고 걸어온 사람일수록 앞이 낭떠러지인 걸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때 절망하고 뒤돌아 나갈 확률이 높다. 지금 조선일보랑 인터뷰 하고 막 이상한 얘기 하고 다니는 한 때의 진보들이 거의 그런 사례다. 숀 코너리의 연구 수첩을 갖고 있었던 인디아나 존스는 낭떠러지인데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안 하면 대배우 숀 코너리가 죽게 생겼기 때문!(트릭 자체는 조잡한 것이었지만…) 하여간 저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그런 절박한 태도를 고수하기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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