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국 교수님 블로그를 보다가 또 그 전형적인 문제의 얘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여촌야도 뭐 이래가지고 옛날에 도시가 더 진보적이다 이런 개념이 있었다. 우리 뿐만이 아니고 세계가 다 마찬가지다. 경향적으로 대도시가 더 진보적 성향을 보인다.
이건 당연히 경제-학력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것은 사실 이게 단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는 아니란 거다. 전통적 진보 담론은 변화+대의라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거나, 도덕과 윤리를 따라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선진국은 이러저러한 기준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거나… (선거제도 타령도 담론의 성격으로만 보면 여기에 해당한다) ‘~해야 한다’는 것에 익숙한 고학력층이 수용하기 쉬운 논리 구성이다. 그래서 도시적 진보는 대의를 따르기 위해 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끌린다.
반면 농촌의 저학력 저소득층에게는 이런 논리가 매력적이지 않다. 경제에 있어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하고 당위를 추구하는 것에 있어선 전통적 가치 수호 이상의 맥락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1차산업 위주의 경제권이라면 더욱 전통적 가치가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전통을 지키거나 되살리고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해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담론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근데 트럼프의 담론은 복고적 변화+현실적 이득이라는 형태로 구성돼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그런 점에서 대도시의 중산층이 BLM 등의 정치적 올바름과 기후변화 이슈에, 농촌이나 쇠락한 지역의 저소득층이 트럼프식 속물주의에 상대적으로 더 끌리는 것은 뭐 당연하다.
이 정권들어 유행인 공정 담론은 ‘현상유지를 위한 변화’, ‘현실적 이득을 추구하기 위한 대의’라는 식의 포장에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맞서는 진보의 담론은 대의를 추구하기 위한 변화를 더 철저하게, 더 근본적으로, 더 완결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가령 대의의 추구가 또다른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하지만 현실은 진보의 담론조차도 ‘변화에 동참해야 나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과거에는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나의 이익이 훼손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변화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건 날이 갈수록 어렵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단지 ‘착한 소비’에 동참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삶을 버려야 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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