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의 메모

글을 몇 개 다뤘는데, 포스트-트루스, 기생충, 민주주의의 대립구도, 세대론이 주제인 글들이었다. 그 중 일부는 이 블로그에 공유한 일도 있다. 아무튼 이 글들에 대해서 한 얘기의 핵심인데, 물론 좀 더 쉽게 설명했다.

뭐 그래도 뻔한 말씀인데, 먼저 포스트-트루스. 포스트-트루스는 여기다가도 썼듯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실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의가 실종된 상태의 대중이 취하는 도착적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타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요구받은 듯 행동하는 것이다. che voui? 이 도착적 몸부림이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사회주의 독재와 검찰공화국이라는 구호로 구현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보여주는데, 그게 인터넷 때문이든 뭐든 대중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정치적 대의의 실종 상태가 오래 이어질수록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여기서 기성정치는 도착적 저항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의 통치구조를 유지한다.

‘촛불혁명’이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사례는 아카데미가 기생충에다가 상을 준 것, 최근의 정치가 세대론에 근거한 86 정치인 비판을 전문가 영입의 근거로 쓰는 상황과 같은 맥락에 있다. 해피핑크당은 김웅과 김태우 씨에게 공천을 주고 더블민주당은 청년정치와 빨간잠바의 대립구도를 아직도 해결 못 해서 끙끙 앓는다. 이건 요즘 논란인 터프도 마찬가지다. 포스트-트루스의 대안이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와 분리되지 않는 공론장의 회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런 현상의 정점에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의를 세우고, 대중이 그것을 자신의 욕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새로 마련해 지금의 질서 자체를 바꾸고 뒤집는 것이다. 누군가 그 짐을 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스스로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사고하면서 낙관을 잃지 않을 때에야 완수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답을 갖고 있지 않지만, 나름의 답을 찾고 다시 그걸 의심하고 또 확신을 갖는 과정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질서의 주인이 아니고 될 수도 없지만 끝없이 질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으로, 중거니횽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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