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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거의) 운동권들과의 대화

2025년 1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오늘은 운동권 출신들이 많은 곳에 가서 떠들었다. 물론 운동권 또는 운동권 출신이라고 하기 어려운 분도 있었을 것이다. 양해바란다…. 윤석열 계엄 사태 왜 일어났나, 이런 주제인데, 일전에 여기다가 쓴 1987년 체제 해킹 얘기가 주가 되었다. 윤석열 정권에서 일어난 정치적 조건이나 개별 사건들로 계엄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긴 어렵고(물론 김건희 특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것이다), 오직 윤석열의 리더십에 대한 설명으로만 가능한 사건이라고 했다. 오로지 윤석열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거다.

다만,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떻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인데, 그건 1987년 체제에서 경향적으로 소수화 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정치가 ‘독재 대 반독재’ 구도를 뒤집어 자기들이 ‘반독재’ 자리를 꿰차고 상대에게 ‘독재’를 뒤집어 씌우는 바람에 가능했다는 거… 이 얘기로 시작해서 전에도 여기다 적은 1987 해킹 얘기로 죽 간 것이었다.

이외에 일본 정치 개혁 논의의 죽 쒀서 개 준 사례의 교훈,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박살의 교훈 같은 거를 얘기했다. 일본의 경우는, 지금 얘기하려고 택시에서 적어 놓은 메모를 보니까 ‘파벌 해체가 정치 개혁의 핵심이라는 정치적 구도, 즉 파벌 반대 전선에 제도가 하위 변수가 된 때문’이라고 써놨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얘기의 경우 ‘제도가 1) 양당의 상호반대, 2) 윤석열 반대 전선의 하위변수가 됐기 때문’이라고 써놨다. 메모를 보지 않고 떠들었기 때문에, 정확히 이 메모의 문구대로만 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에 대해선 늘 말씀드리듯 심의민주주의 등의 확대를 얘기했다. 그냥 확대하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맥락을 얘기하는 건데, 이것도 메모를 인용하자면 ‘선거제도 개혁과 좋은 정치 하려는 세력의 성장이 대중적으로 매칭돼야. 좋은 정치란? 선거제도 개혁으로 끝나는 게 아닌 민주주의 전반의 영속적인 심화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역시 메모를 보지 않고 떠들었기 때문에 이대로 말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제도의 정당성을 설득하거나 증명하는 건 어렵고 그 제도가 정당하다는 걸 주장하는 사람도 적용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니(연동형 비례대표제,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장하고 시도하는 정치세력의 존재 의의와 필요성 자체에 대중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 사실 이 비슷한 얘기 역시 저쪽이 싫은 책에 써있긴 한데, 오독하는 분들이 꽤 있었던 거 같은 기억이다. 뭐 쓴 사람 잘못이지…

질의응답 과정의 마지막에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정치권이 2030 남성을 스테레오타입화 해서 대상화 하는 건 문제라는 얘기였다. 나는 답했다. 그건 맞다. 정치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레오타입화 자체는 따지고 보면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다. 학생운동 하다 취직 쉽게 하고 돈 모아서 집 사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 교육에 투자해 재생산을 노리며 내로남불 한다는 86세대의 이미지는 사실에 부합하나? 제가 젊었을 때도 20대 개새끼론 같은 게 있었다(이 얘기 하면서 또 산수를 틀렸다). 그리고 학적으로 규명되는 대목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젊은 남성이 경향적으로 보수적이고 여성이 진보적인 것은 연구 결과로 확인된다…

그러자 이 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이 세대가 보수적이라기 보다는 진보 보수로 나눌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닌가?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도 전형적인 보수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다시 말씀드렸다. 2차원의 축에 일렬로 늘어 놓고 좌우를 논할 수 없는 경우는 많다. 논하기 쉽게 진보 보수를 나눌 뿐이다. 트럼프도 결국은 극우포퓰리즘으로 분류하지 않는가. 물론 일리있는 말씀이기도 한데, 저의 책을 보시면, 현대 대의민주주의 문법에서 진보는 보수를 반대하는 것,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썼다. 이게 오늘 논한 서로 반대하면서 유지되는 1987년 구도의 한계와도 무관치 않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면 더 미시적인 영역에서 ‘나’의 이념이 2차원의 축에 존재하는 좌표와 무엇이 다른지를 체제적으로 주장하고 반영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심의민주주의 운운 말씀드렸다…

의미있는 대화였다고 생각해서 따로 기록했고. 오늘 느낀 것은, 운동권들과 대화를 하면 이제는 대개 경청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안 그랬다. 옛날에는 오타쿠와의 대화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비슷하지… 자기 말만 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유대감 같은 게 주위를 둘러싸는… 지금은 다들 힘이 빠지고 절망을 해서… 오늘 직접적으로 절망감을 호소하는 분이 있었다.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슬픈 얘기였다. 뭘 잘못… 이라는 말이… 우린 잘못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인데…… 슬퍼져서 이만…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1987년 체제

좌파-오타쿠 행사에서 한 말

2025년 1월 23일 by 이상한 모자

좌파 오타쿠 행사에서 두서없이 떠든 내용을 주최측이 정리해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떠들면서 망설임이 많았다. 평론가질을 하고 다니면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덧없음을 계속 체화하던 차이기 때문이다. 말을 해봐야,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표현으로 나오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않는 시대다. 더군다나 오타쿠들을 상대로? 오타쿠란 대체로 자기 영역에서 자기가 최고 오타쿠고 최고 잘 알고 최고 맞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과거에는 가난해서(이렇게 말하면 돈 없어도 얼마든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거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은 평론가질을 하느라 오타쿠를 제대로 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많지 않다. 이건 사실이다.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전에도 썼듯, 단지 모여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주제 넘게도 여러 말씀을 떠들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Gr7oRm5cS_TgqYvSa36Zw3X_5q5RoEMn11wlkeTOqY4/edit?tab=t.0

사실 내 생각에는, 제대로 말하려면 더 긴 시간이 주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얘기였다. 하나를 말해도 말이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여러 생각을 담을 수밖에 없다. 가령 우주세기 건담은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다만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이며, 모든 건담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대개의 사람은 그냥 웃고 말텐데,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많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니겠나?

건담의 아버지가 굳이 턴에이건담을 만들어서 그 때까지의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를 하나의 역사로 통합했다. 그러니까 우주세기니 아니니의 논쟁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턴에이 이후에도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의 구분법에 근거한 작품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제 대체역사물 같은 걸 만든다고 하는데… 물론 이쪽에도 모순은 있다. ‘우주세기만 인정한다’라고 했지만, 유니콘을 인정할 수 있는가?

사실 이건 ‘진정한 ~에 대한 논쟁’에 관한 얘기로 끌어올 수 있다. 언젠가 ‘진정한 건담’에 대한 농담을 한 일이 있는데,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진정한 건담이란 퍼스트 건담 밖에는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퍼스트 건담조차 따지면 ‘진정한 건담’답지 않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무엇’이라는 것은 실존하는가(이 비슷한 얘기는 제가 쓴 냉소에 관한 책을 보시면 좀 더 나와있다)? 그러나 이 모임이 건담 푸념 모임은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저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한 건담 애호가와 위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반적으로 좀 그런 느낌인데, 만일 모인 사람들이 ‘저쪽이 싫은 책’을 읽고 왔다면 무슨 얘긴지의 맥락을 훨씬 더 정확하게? 물 흐르듯? 수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내 생각이다. 제발. 내 블로그에 적는 내 생각입니다. 사람의 한계는 곧 정체성이고, 내 한계란 결국 내가 쓴 가장 긴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요즘 하는 얘기도 결국은 이전에 쓴 책들과 같은 맥락 안에 있는 거다.

끝나고 나서 뒷풀이 자리에서 오간 대화에서도 흥미로운 얘기들이 있었다. 가령 모바일 게임에 저당잡힌 인생에 대해 말했다. 나는 랑그릿사 모바일이라는, 중국 회사(중국회사 ’치고‘ 안정적이고 성의있는 운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가 일본 아이피를 갖다가 만든 게임을 5년 넘게 했다. 이런 류의 게임의 정식이 있는데, 매일의 숙제+가챠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12시가 지나기 전에 뭘 눌러서 숙제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새로운 캐릭터가 출시됐을 떼 더 적은 돈을 들여 뽑기를 할 수 있다. 이게 다 매일매일 노력의 댓가인 셈인데, 어느 날 내가 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현타가 와서 지워버렸다. 뒷풀이 자리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한 분은 그 자리에서 평소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넥슨의 유사한 게임을 지워버렸다.

집회 형태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이것도 어느 유튜브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집회에 대한 코멘트는 계급적 기반에 관한 얘기다. 물론 노조나 기타 단체로 조직됐다고 해서 그게 곧 계급이라고 할 순 없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노조나 단체로 조직화 된 대중을 계급적으로 조직하는 게 더 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만 말하자면 집회 형태와 관련한 논쟁을 처음 본 건 2002년의 촛불 시위였다. 앙마라는 사람이 주도했는데, 이 분은 나중에 흑화한 걸로 기억한다. 하여간 그때는 아예 탈중앙화 된 집회 형태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는데, 섬세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와서 평가해보자면 거기서 드러난 요구는 ‘탈정치’였다. 이게 2006년과 2008년에도 반복되었다. ‘깃발 내리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그때는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오면 ‘순수한 시민’들이 깃발을 내리라고 했다. 자신들이 깃발의 소속으로 오인된다는 이유다. ‘숟가락 얹지 마라’는 거지. 그래서 나중에는 처음에 깃발을 들고 모였다가 ‘순수한 시민’들을 위해 깃발들만 옆으로 비켜주는 절차가 생긴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게 ‘탈정치’적 요구다. 계급의 기준으로 보면 ‘탈정치’는 분명 조직이 어려워진 요건이다.

깃발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부활한 것은 박근혜 탄핵 국면이다. 이때는 오히려 ‘순수한 시민’들이 제각기 이상한 깃발을 만들어왔다. 재치와 유머가 돋보였다. 즐거웠다. 그러나 이게 ’탈정치’를 넘어 계급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지향하고 싶어하는 어떤 조직운동)의 쇠퇴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좌파-조직화의 관점에서 유리해진 조건인가, 불리해진 조건인가? 이번 집회에서는 응원봉이 나왔다. 이건 여러차례 얘기했지만 ‘탈정치’를 지나 ‘소비자‘로서 조직된 대중이 표현된 것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뭘 욕하거나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후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과거에 비해 회원으로 가입하기 보다는 일회성 후원에 그치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첫째로 유행의 문제, 둘째로 ’캔슬‘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시민단체의 내로남불이 메인 아젠다인 세상이다. 흠없는 시민단체를 찾기 어렵다. 내 후원금 지출은 흠이 없는 시민단체를 향한 것이었으면 한다. 여기서 시민단체는 상품화된다. 이게 ‘소비자적 문법’이다. 이 ‘소비자적 문법’의 소유자들이 잘못했다거나, 죄를 지었다거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새로운 세상의 문법이라는 거다. 단지, 질문은 이것이다. 이것은 지금 계급을 조직하는 일에 있어서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게 불리한 조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대중에게 ‘소비자에게 벗어나라! 우리가 조직 좀 하게!’ 이렇게 외칠 것인가? 근데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각적 해법이 필요하다. 그 다각적 해법 중에는 같은 소비자로서(결국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도 어떤 처지에서는 소비자이다) 개입, 관여하는 방식도 있는 것이다. 저는 아마, 그 얘기를 한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일 이 다각적 해법의 다른 측면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으시다면 저쪽이 싫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뒷풀이에서 한 말이 좀 더 있는데, 지금은 또다른 얘기를 떠들러 가야 한다. 그래서 그건 또 다음 기회에… 그리고 여기서 한 얘기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어떤 오타쿠적 세계의 얘기이며, 일군의 백래쉬가 법원을 때려부수기 전 얘기다. 법원 때려부순 얘기는 오늘 낮에 택시에서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 얘기긴 하지만 그건 발행되면 알려드리겠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오타쿠, 좌파

파시스트

2025년 1월 20일 by 이상한 모자

계엄 며칠 후에 그런 얘기를 쓰다가 만 일이 있다. 윤석열이 파시스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윤석열의 계엄을 지지한다는 사람은 파시스트인 게 분명하다. 그때 전여옥이니 이런 사람들이 계엄 지지 발언을 할 때인가 그랬다. 윤석열이 파시스트인지 모르겠다고 하려던 거는 계엄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고, 그게 파시즘에 의해 얼마나 뒷받침되는 것인지 모르는 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과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세력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큰 무리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에 대해선 보통 두 가지를 본다. 첫째,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의 폭력(권위든 독재든)에 의존하는가. 둘째, 그 해결 방식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는가. 첫째는 윤석열이 시도한 내란의 전모가 거의 드러났음에도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었다. 둘째는 사실 좀 애매했는데, 극우 시위대가 실체를 가지고 오프라인에 등장해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했다는 점에서 또한 확인되었다.

폭도가 된 윤석열 지지자의 서울서부지법 습격은 두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윤석열 구속 이후 온라인에 나타나는 이들의 ‘국민저항권’ 운운 담론은 전형적인 파시즘적 징후이다. 이를 축소 옹호하면서 끝도 없는 이재명 타령으로 반사이익이나 보려는 여당의 태도 역시 파시스트다. 지난 정권에 대해 연성파시즘 운운하면서 이의 대항담론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주체로서의 윤석열 지지 활동을 사실상 했던 분들의 견해를 듣고 싶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국민저항권, 윤석열, 파시스트,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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