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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올해 초, 영국에서는 20년간의 보수 일색 정치구도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 이변이 있었다. 지나치게 좌익적이라는 이유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지도부의 갖은 방해 속에 당내 런던광역시장 후보 경선에서 분패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노동당 좌파 하원의원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써 초대 민선 런던광역시장에 당선된 것이다. 사실 리빙스턴은 당내 경선에서도 2/3 정도의 지지를 얻었었다. 하지만, 블레어 지도부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나 볼 수 있는 선거인단(간접투표) 방식을 도입해서 그를 억지로 경선에서 밀어냈고 급기야는 당에서 쫓아냈다. 많은 관측통들은 리빙스턴의 당선을, 런던광역시의회 선거에서의 녹색당, 런던사회주의연합(여러 소수 극좌파들이 모여서 만든 전선체)의 약진과 더불어, 영국 정치 풍향계의 일대 전환으로 보았다. 

하지만, 리빙스턴이 런던시의 수장이 된 것이 이번이 첫 번째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1981년에 런던광역시의회 노동당 의원단장으로 뽑혀 1985년까지 4년간 런던 시정을 책임졌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시의회의 다수당 의원단장이 일종의 시 내각을 꾸려 지방정부를 이끌었던 것이다. 올해 리빙스턴이 소속당 지도부로부터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기층 당원들과 런던의 보통시민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 그가 이끈 노동당 런던시정부의 괄목할만한 성과에 대한 대중들의 강렬한 기억 때문이었다. 

1980년대 초반 노동당 좌파 지방자치체의 등장 

1980년대 초반 영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있었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 1974년 ‘대안 경제 전략’이라는 급진적 강령을 내걸고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당내 우파와 중도파의 전횡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했다. 아니 개혁은커녕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이제까지의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시장지상주의 경제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노동조합(특히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이런 가운데,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18년 장기 통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권좌에서 밀려난 노동당 안에서는 패배의 책임을 묻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애초의 선거강령을 실천하는 데 훼방을 놓은 당내 우파 세력들에 대해 공격이 집중됐다. 특히 정부  안에서 산업부 장관으로 개혁을 주도하다가 정치적 희생양이 됐던 토니 벤 하원의원을 중심으로 비판세력이 결집했는데, 이들을 흔히 ‘벤 좌파’라 부른다. 이들 벤 좌파는 사회주의 강령의 채택, 당내 민주주의의 신장, 대중운동에 기반한 정치활동 등을 주장하면서 노동당의 낡은 체질에 일대 혁신을 가하려 했다.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 세력과 당내의 청년 좌파 세력, 그리고 60년대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70년대의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을 통해 등장한 다양한 신진 세력들이 벤 좌파에 결합했다. 

1983년까지 벤 좌파는 당내 우파, 중도파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대결을 계속한다. 하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1968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노동당이 대패하면서 2차대전 이후 지방자치체를 꿰차고 앉았던 노동당의 구세대들이 자연스럽게 물갈이되는 상황이 빚어졌는데, 이 덕분에 벤 좌파 세대들이 지역 차원에서는 비교적 쉽게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당 지구당과 각 지회가 지방정치 영역에서 단순한 선거 조직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인 정책 수립과 투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시작한 ‘지방당 조직의 민주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중앙정부를 대처의 보수당이 장악하면서 그 반대로 런던과 주요 산업도시들의 지자체 선거에서는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이들 지역의 대부분에서 지방당 조직은 이미 청년 좌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극우 정권이 차지하고 있는 반면 주요 지방정부는 급진적인 노동당 좌파가 장악하는 긴장된 상황이 벌어졌다. 켄 리빙스턴이 주도하던 런던광역시정부가 그랬고, 리버풀, 셰필드 같은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들이 그랬다. 

노동당 좌파 지방자치체의 사회주의 실험

새로이 지방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노동당 좌파는 이중의 곤경에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우파 중앙정부의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한 지방자치체에 대한 대처 보수당 정부의 노골적인 공격이었다. 애초에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대처 정부는 지방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에 대해 극히 적대적이었고, 선거를 통한 단체장의 선출이라는 민주주의 절차도 경제적 효율성에 부합하지 않는 눈엣가시로 여겼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지방정부에 대한 공격의 핵심 고리일 수밖에 없는 재정 교부금 문제를 통해 중앙정부는 좌파 지방정부들을 압박했다. 대처 정부는 정부 보조금을 대폭 감축해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방세를 확충하려는 지방정부의 모든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노동당 좌파는 지방정부의 복지 지출을 압박하는 보수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노동당의 오랜 전통과도 대결해야만 했다. 2차대전 이후 노동당은 애틀리 정부 아래서 이뤄진 양대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노동계급의 확고한 지지를 받아왔다. 그 하나는 중앙정부 차원의 복지정책인 국영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라는 (사실상의) 무상의료체계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공공임대주택의 대대적 건설이었다. 노동당은 지난 50년간 이 두 개혁의 성과를 갖고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제까지 노동당 지방정부를 주도한 우파 세력은 관료기구를 통한 시혜에만 강조점을 두었지 이런 복지서비스에 노동자․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는 무관심했다. 이는 대처 정부의 공격에 좋은 기반이 되어주었다. 대처 정부는 기존 복지서비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공공복지정책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호도했고 이에 따라 광범한 민영화의 일환으로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해체가 뒤따랐다. 

노동당 좌파 지자체들은 우선 공공부문의 이점이 확연히 드러날 수 있는 부분에서 공세적인 정책을 펴는 것으로 시대의 역류에 대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공교통정책이었다. 런던광역시정부는 런던시가 운영하는 공영버스와 지하철의 요금을 대폭 인하했다. 지금까지도 런던 시민들이 켄 리빙스턴을 ‘교통문제의 해결자’로 기억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정책은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80년대 초 한때 런던시는 자가용 승용차의 범람으로 인한 교통 정체가 사라진 전 세계의 유일한 거대 도시였다. 

두 번째로 좌파 지자체들은 1974년의 노동당 정부가 중앙정부 차원에서 그 실현을 약속했다가 불발로 그친 ‘대안적 경제 전략’을 지방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려 했다. 이들 강령의 핵심은, 민간부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계획 당국을 건설해 이를 통해 친노동자적인 구조조정과 고용확대, 더 나아가 공공부문의 확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런던광역시정부는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를 만들어 런던광역시 차원의 경제계획을 수립․추진했다. 자본가가 수익성을 이유로 폐쇄시키려는 작업라인을 단체협상을 통해 살려내고 이에 대해 자주관리를 추진하려 한 루카스항공회사의 실험에 공적 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협동조합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이 추진됐다. 마침 초국적 자본의 해외 이동으로 인해 고용 대란을 경험하기 시작한 산업도시 셰필드에서도 시정부 차원에서 고용확대정책이 모색됐다.     

또 다른 인상적인 조치는 참여민주주의 실험이었다. 좌파 지자체들은 기존에 노동당 지자체가 의존했던 관료주의, 후견주의(특정한 대중 단체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대가로 선거에서 표를 얻는 정치 관행)를 극복하기 위해 시의 주요 행정에 노동조합, 공공임대주택 거주자 조직, 여성운동 조직, 흑인 지역사회 등을 결합시켰다. 런던광역시정부의 경우, 동성애자 조직에게도 문호를 여는 선구성을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80년대 초반 노동당 좌파의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혁신적 측면이었다. 영국 좌파 전통 안에는 이미 그 전부터 ‘지방자치 사회주의’라는 구상이 존재했지만, 이는 대개 중앙정부의 관료주의와 다를 것 없는 지방정부의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또한, 중앙정부 차원의 급진적 변혁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도 강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지방자치 사회주의’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노동당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려던 벤 좌파 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국적 변혁의 필요성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지자체 차원의 실험이 가지는 ‘진지전’으로서의 제한된 성격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지역 공동체 수준의 참여민주주의적 실험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중요한 숙제였던 ‘국가의 민주화’라는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것이다. 

이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는데, 그 하나는 보수적인 지방 관료들의 제압이었다. 비록 시의회를 좌파가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자체의 행정 라인을 장악한 소위 전문 관료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내세우며 젊은 지방 정치가와 사회운동가들의 개혁 조치를 훼방놓는 데 지칠 줄 몰랐다. 지방정부의 노동당 좌파는 계획의 수립과 실천 과정에서 대중운동 세력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이들을 일정하게 제압했다.  

또 다른 결과는 노동당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수세에 몰리던 상황에서 당의 풀뿌리 토대를 새로이 구축했다는 것이다. 노동당 좌파의 시정부 행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대중운동 세력들이 노동당의 든든한 토대로 결합했다. 셰필드 같이 아직도 전통적인 산업 노동계급이 다수인 곳에서 이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확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고, 런던 같이 산업 노동계급이 수적으로 열세인 곳에서는 전문직,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여성운동, 흑인운동 등 새로운 사회운동 세력을 노동당의 정치적 연합에 초대하는 성과를 낳았다. 

80년대 초반의 실험과 현재 

1981년 당대회에서 벤 좌파가 정치적 패배를 겪으면서 좌파 지자체의 실험은 더욱더 영국 진보세력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런던광역시정부의 켄 리빙스턴, 그리고 맹인이면서 셰필드 시정부를 이끈 데이빗 블렁켓(리빙스턴과는 달리 그는 이후 블레어 지도부에 투항했다)이 전국 차원에서 영국 정치의 새로운 총아로 부상했다. 중앙정부가 IRA(아일랜드공화군)에 대해 마냥 사냥에 광분하는데도 오히려 IRA를 지지하고 나서는 수도의 시장은 과연 자본주의 국가가 견딜 수 없는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1985년 결국 대처 정부는 두 가지 결단을 추진한다. 그 하나는 런던광역시정부의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정부 재정 교부금의 대폭 삭감이었다. 처음에 좌파 지자체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후 과정은 확실히 지자체 차원의 실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당시는 1984년 광부파업에서 노동운동 세력이 이미 결정적 타격을 입고 이에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던 벤 좌파의 주장이 노동당 내에서 패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세력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또한, 대처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당 시의원들이 제도권 정치의 제한을 벗어나는 대중투쟁에 나서야 했는데, 일부 좌파 의원들조차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가장 다양한 세력에 의해 구성된 런던광역시정부가 제일 먼저 항복을 선언했고, 셰필드 등의 산업도시들도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리빙스턴이나 블렁켓은 하원에 진출하는 것으로 정치적 생명을 유지했지만, 진보적 지방자치체 실험의 성과는 현실정치가 아니라 사회주의 학자들의 저서 속에만 남게 되었다. 당시 폐지된 민선 런던광역시정부는 바로 올해에야 부활했고, 리빙스턴이 그 첫 번째 직선 시장으로서 복귀했다. 15년을 기다린 귀환이었다. 

런던의 시민들은 여전히 리빙스턴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사롭지 않게도 그는 이번에도 공공교통정책(블레어 정부의 지하철 민영화 계획에 맞선 ‘지하철 민영화 반대’ 공약)을 전면에 내걸고 선거에 승리했다. 지하철에서 쉽게 만나 악수할 수 있는 이 ‘사회주의자’에 대해 런던 시민들은 이미 일개 정치인에 대한 신뢰 이상의 애정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80년대 초반 노동당 좌파의 지자체 실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무엇보다도 이 실험이 지방행정 영역에서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펼쳐보임으로써,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공공부문이 아닌 민주적으로 혁신된 공공부문이 가능하다는 것,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한 국가기구의 급진적 민주화가 가능하는 것을 그 단초나마 보여주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실제로 우리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펼쳐지고 있는 브라질 노동자당 좌파의 참여민주주의 실험에서 영국의 사례에 대한 세계사적인 반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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