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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이론과 실천 2002년 7월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1981년에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장 조레스의 무덤이었다. 또한 프랑스 사회당이 운영하는 재단 이름도 ‘장 조레스 재단’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인 <뤼마니테(인류)>는 1904년에 조레스가 창간한 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만큼 조레스는 프랑스 좌파의 사표로 추앙 받고 있다.

하지만, 조레스만큼 그 역사적 평가가 상반되는 사람도 보기 드물다. 한쪽에는 사회민주주의의 개혁 노선이나 코민테른의 혁명 노선, 어느 한 쪽으로 전형화될 수 없는 풍부한 정치적 실천의 사례로 조레스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다(B. 까갈리쯔끼, 『변화의 변증법』, 창작과비평사).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조레스의 실천은 ‘변증법적 종합’이기보다는 ‘기회주의적 절충’일 뿐이다. 그래서 레닌은 그를 “애매한 말의 구사자”, “소부르주아 이념가”, “부르주아 개혁주의 이론가”라고 혹평했고, 코민테른 지도자 지노비예프는 “두 얼굴의 야누스”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더 부합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조레스라는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였고, 프랑스 사회당의 성장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정치적 실천은 어떤 것이었는가?  

개혁적 부르주아 정치인에서 사회주의자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던 파리 코뮌이 잔혹하게 진압된 후,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제도 정치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가 오랜 침체기에 빠졌다. 코뮌 노동자들의 피 위에 건설된 제3공화국은 비록 제도상으로는 분명히 민주공화국이었지만, 왕정의 부활을 꾀하는 극우 반동파가 주도권을 쥐었다. 제3공화국 시절 프랑스에서는 이들 극우 반동파와, 민주공화제를 옹호하는 개혁적 부르주아 세력 사이의 대립이 계속됐다. 당시 프랑스에서 ‘좌파’라고 하면 이는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화파, 즉 개혁적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 서서히 사회주의 세력이 복구되긴 한다. 그러나, 영국과 같은 대규모 노동조합운동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사회주의 단일 정당은 아직 요원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새로이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도 최소 5개의 흐름으로 나뉘어 있었다. 맑스,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수입해서 북프랑스의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세를 모으던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있었고, 코뮌 전사였던 바이양이 프랑스 특유의 혁명적 전통인 블랑키주의를 이어받아 만든 ‘혁명사회당’이 있었다. 파리에는 영국식 노동조합운동을 추구하던 브루스의 ‘사회주의노동자연맹’이 있었는가 하면, 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알레만의 ‘사회주의노동자당’도 있었다. 그리고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당파 사회주의자들이 또 존재했다.

1885년 총선에서 26살의 나이로 의원에 당선된 장 조레스는 당시 이 중 어느 흐름에도 속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화파의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당선자였다. 즉, 개혁적 부르주아 정치인이었다. 남프랑스의 소부르주아 가문 출생이며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고등사범학교를 나와 중학교 교사, 대학 철학 강사 등의 경력을 갖고 있던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만 보면 노동운동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부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우선 공화파 의원으로 등원하고 나서 그가 겪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의 계승을 위해 공화파를 선택한 이상주의자 조레스가 목격한 현실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대의보다는 대자본가의 뇌물에 목매단 동료 공화파 정치가들의 추태였다. 게다가 그는 남프랑스의 공화파 내부에서, 금권정치를 일삼는 재벌 솔라쥬 가문과 경쟁해야 했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뀐 1889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논문의 제목은 「독일 사회주의의 기원」. 이렇게, 한 좌절한 이상주의자는 사회주의의 세계로 접근해갔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레스·프랑스 사회당과 정당명부비례대표제 사이의 관계다. 1893년 이후 소선거구제 아래서 5번이나 의원에 당선되면서도 조레스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레스가 죽기 직전인 1914년 7월에도 프랑스 사회당은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참고로 덧붙이면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은 1893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 결의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조레스의 지역구가 될 남프랑스 카르모의 광산노동자 투쟁이었다. 카르모의 광부들은 광산 소유주인 솔라쥬 가문과 싸우면서 굳건한 투쟁의 전통을 다져왔다. 1884년 지방자치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자 이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는 장으로 시장 선거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1892년 지자체 선거에 카르모 광산노동자운동의 지도자인 칼비냑이 시장 후보로 나섰다. 카르모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투쟁가를 합창하면서 대오를 이뤄 투표소로 향했다. 결과는 칼비냑의 당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솔라쥬 가문은,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새 시장 칼비냑을 광산에서 해고해버렸다. 이는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광부들은 파업으로 이에 대응했다. 1893년 총선은 이 파업 투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황에서 닥쳐왔다.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은 칼비냑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노동자 후보’를 내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당시 카르모시는 농민 유권자가 과반수였다. 소선거구제 아래서 승리하자면 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후보가 필요했다. 최근 사회주의자로 전향했지만 사회주의자보다는 공화파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젊은 정치인, 솔라쥬 가문의 정적(政敵), 전 해의 파업 투쟁에 신문 논설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 선거대책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웅변가 ― 조레스가 그 적임자였다. 조레스는 카르모 광부들의 ‘노동자 후보’로 선출됐고, 결국 당선됐다. 이 때부터, 조레스의 이름 앞에는 늘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따라붙게 됐다.

이 1893년의 총선에서는 조레스 외에도 모두 50여명의 사회주의자 의원들이 당선됐다. 여러 정파로 찢겨 있긴 했지만, 그 전까지 자칭, 타칭 사회주의자 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약진이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았는데, 우선 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운하 관련 뇌물수수사건이 터지면서 그 동안 개혁파로 인식돼온 공화파 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극에 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 막 프랑스 자본주의에 불황이 시작돼 계급갈등이 치열해지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또한 무소속 사회주의자 조레스가 카르모의 노동자 시정부에게서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처럼, 브루스파와 게드파가 각각 파리와 북프랑스 공업도시들에서 지자체에 적극 진출하여 이를 통해 제도권 진출의 실력을 길러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거리의 의원, 혁명을 잊지 말자는 개혁주의자 

의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뇌하던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공화파 의원 출신인 조레스에게 원내 입법 활동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차츰 개혁주의자가 되어갔다면, 조레스는 애초부터 개혁주의자였다. 공화파가 제출한 노동법안들에 대해 다른 사회주의자 의원들은 원천 거부 입장을 견지한 데 반해, 조레스는 심의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당이 끝없이 자본주의에 항의할 뿐, 생활에 개입하여 사회의 작동에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당은 단지 이름만 혁명적일 뿐이다.”(1899년, 노서경[1999] 78쪽에서 재인용, 인용자가 일부 수정)

그러나, 조레스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추진되는 사회개혁의 지향에 대해 나름의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개혁을 통해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약속하는 인민 주권의 원칙을 노동자 주권으로 확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개혁의 주된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그의 입장은 어떤 이론보다도 투쟁의 경험을 통해 다져진 것이었다. 조레스가 아직 공화파 의원이던 1886년에 드 카르빌의 광산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을 통해 광부안전대표법을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었다. 조레스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이 법안은 단순히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측이나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광부안전대표의 감시 활동을 통해 지속적인 작업장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입장은 젊은 조레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1895년에 벌어진 카르모의 유리병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도 비슷한 사례였다. 이번에도 투쟁의 대상은 남프랑스의 대재벌 솔라쥬 가문이었다. 조레스는 신문 논단을 적극 활용해서 “노동자 파업이야말로 특권에 대한 저항이며 민주공화국의 수호”라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리고, 의회 의원의 신분으로 직접 시위대에 결합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전국을 순회하며 파업 지지를 호소하고 투쟁기금을 모았다. 투쟁이 장기화되자 유리병공장 노동자들은 아예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는데, 조레스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그 결과, 1896년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카르모 인근의 알비에 노동자 소유(노동자 개개인의 주식 소유가 아니라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집단적 소유 형태를 띠었다)의 유리병 공장이 세워졌다.

1910년에 10여년간의 논란 끝에 연금법이 통과되었을 때 조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노동계급의 의식과 힘과 보장, 또 성찰과 투쟁의 능력을 키우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노서경[1999] 140쪽에서 재인용). 이는 개혁 투쟁에 대한 조레스의 원칙을 잘 말해준다. 개혁을 위해서는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타협도 필요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개혁 투쟁을 계기로 대안 사회를 건설할 대중의 능력이 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역사가 A. 타스카는 이렇게 평했던 것이다. “모든 개혁주의는 대중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 조레스만은 대중을 신뢰한다.” (오광호[1992], 245쪽에서 재인용, 인용자가 일부 수정) 더 나아가, 조레스는 대중이 혁명을 선택할 가능성을 여전히 진지하게 고려했다. 혁명적 수사의 남발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에게 혁명이 이론 속의 추상적 개념에 불과했다면, 조레스에게 혁명은 살아있는 전통이자 현실이었다. 그는 1789년 이후 적어도 20년에 한 번씩 수도의 거리에서 바리케이트전을 벌인 프랑스 민중의 자식이었다. 1898년에 극우 반동파의 무고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유대인 장교 A. 드레퓌스를 단호히 옹호한 것 때문에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 조레스가 모처럼의 휴식기간을 송두리째 바쳐 시작한 작업은 바로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의 집필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혁명적 개혁주의’라고나 해야 할 자신의 미묘한 입장에 역사의 무게를 부여하려 했다.

“개혁주의 노선이 옳다. 나는 개혁파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 개혁파에게는 의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어떠한 간청을 한다 해도, 혁명적 방식, 즉 혁명에 대한 권리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광호[1992], 207쪽에서 재인용, 인용자가 일부 수정).

프랑스 사회주의의 분열과 혼선 

1896년에 무소속 사회주의 의원 밀르랑이 주최한 생-망데 연회에서 사회주의 각 정파가 대통합의 양대 원칙(첫째, 프랑스 은행·광산·철도의 국유화, 둘째, 보통선거권을 통한 집권)에 합의하면서, 프랑스에도 독일처럼 사회주의 단일 정당이 들어설 날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통합은 뜻밖의 암초에 걸려 표류했다.

1898년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군국주의·반유대주의를 주창하는 극우 반동파가 다시 득세하자 이에 대한 전술적 대응을 놓고 사회주의 세력은 분열과 혼란에 빠졌다. 1년 후 상황이 반전돼 공화파 내에서도 개혁성이 강한 급진공화파가 정부를 구성하자 사회주의자들은 더욱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밀르랑이 급진공화파 정부에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세력과의 연정에 본격 참여한 것이었다.

이를 놓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격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조레스가 밀르랑의 입각에 찬성하고 나선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게드와 라파르그(맑스의 사위)가 이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수정주의 논쟁과 얽혀 더욱 복잡한 형국을 이루었다. 과연 노동계급 정치세력이 부르주아 국가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인터내셔널 내의 이론적 쟁점이었지만, 사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밀르랑이 참여한 내각의 국방상은 바로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 갈리페 장군이었다. 어떠한 논리를 들고 나온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자가 갈리페와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파리 코뮌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조성된 정세의 긴박성에만 매달려  선배 사회주의자들의 정당한 거부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아무튼 밀르랑의 입각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통합은 미뤄졌다. 1902년 입각반대파인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과 바이양의 혁명사회당이 따로 합당해 <프랑스의 사회당>(PS de F)을 만들었고, 나머지 브루스파, 알르망파, 조레스 등 무소속 세력은 <프랑스 사회당>(PSF)을 창당했다.

하지만, 1903년부터 밀르랑이 노골적으로 반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PSF조차 밀르랑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자, 통합의 가능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두 사회주의 정당의 통합을 강요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등장했다.

우선, 1901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1902년에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노동총동맹(CGT)이 등장했다. 독일과는 달리 CGT의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두 사회주의 정당 모두를 불신하고 노동조합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지역의 노동조합 서기가 당조직 서기를 겸임하는 등 당과 노동조합이 일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제 둘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개의 기관이 되어버렸다. ‘혁명적 생디칼리즘’(라틴 유럽 국가에서 노동조합은 ‘생디카’라고 불렸으며, 따라서 ‘혁명적 생디칼리즘’이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를 뜻한다) 노선이 등장한 것이다. CGT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했다. 이들은 독일 노동조합의 간부들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인 게 사실이었지만, “언젠가 터뜨릴 장엄한 총파업”이라는 꿈은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하나의 순수한 ‘신앙’으로 전락해갔다. 아무튼 이 제3의 경쟁자의 부상은 두 사회주의 정당의 시급한 공동 대응을 요구했다.

또한, 부르주아 정치권에서는 급진공화파가 급성장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꾸준히 원내 의석을 늘린 급진공화파는 1899년 최초로 연정을 주도하고 1901년에는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정당 구조를 건설한다. 그때까지도 프랑스에서는, 게드파를 제외하면,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조차도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대중정당 구조를 알지 못했다. 선거구의 노동조합·사회단체들이 선거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선거 때마다 후보를 결정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진공화파가 먼저 지구당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고, 중앙당 구조를 만들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이들은 1906년에 드디어 단독 집권에 성공한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뒤늦게 강력한 단일 정당을 건설할 필요를 느꼈다.

이밖에도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충격, 그리고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에서의 국제적인 통합 압력 등이 PS de F와 PSF의 합당을 재촉했다. 결국 1905년 4월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을 달고 통합 사회당이 창당됐다. 밀르랑 입각의 결과에 대한 역사적 책임으로 인해, 조레스는 창당 초기, 무대의 뒤편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사회주의는 ‘통합’이다? 
-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 당과 노조의 화합을 향해

그러나, 통합 사회당은 여전히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분파연합의 성격이 강했다. 상무집행위원회와 사무총장 외에는 중앙당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당은 없고 광역지부가 사실상의 기초 단위였고, 각 광역지부는 특정 분파가 선점하고 있었다.

SFIO가 비로소 하나의 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1908년의 툴루즈 당대회를 통해서였다. 이 당대회에서는 당내 우파의 개혁노선과 좌파의 혁명노선이 첨예하게 맞붙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웅변가 조레스는 이상할 정도로 각각의 주장을 묵묵히 경청만 하다가 대회 막바지에 회심의 열변을 토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이른바 ‘혁명적 개혁주의’를 하나의 노선으로, 당 노선으로 제시했다. 그는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역으로 그는,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인가, 아니면 서로 상반되는 두 정파간의 대립을 봉합하기 위한 애매모호한 요설인가? 조레스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개혁의 작품들은 한층 더 강력하고 한층 더 야심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확장되고 지속되다가 드디어 혁명의 실현과 맞닿는 경계선에서 서로 혼합되는 경향을 띨 것이다. 나는 오늘의 사회가 깊이 개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일의 새로운 사회로 필연적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상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충돌과 위기와 파탄, 도약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위기와 파탄과 도약이 일어나는 시점에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의 수준은 목적을 저버리지 않을 만큼 높이 고양돼 있을 것이다. (노서경[1999] 71쪽에서 재인용. 인용자가 일부 수정)

개혁이 누적된다고 해서 혁명이, 즉, 노동자계급이 생산수단과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와 도약”의 시기에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개혁 투쟁을 통해 단련된 프롤레타리아뿐이다.

당의 정치행동, 개혁적 행동을 나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려고 한다. 여러분 중에서도 가장 불안해하는 분들에게 말하건대, 이것은 부르주아의 개혁주의가 아니다. 관료적 개혁주의도 아니고, 사회평화의 개혁주의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의 정신에 의해 지탱되며 사회주의 이상의 순수성에 의해 생동하는 힘차고 열광적인 개혁적 행동이다. (노서경[1999] 71쪽에서 재인용, 인용자가 일부 수정)

제도 정치의 타협에 붙박인 ‘수동적이고 냉담한 개혁’이 아니라 “투쟁의 정신”과 “이상의 순수성”을 갖춘 “능동적이고 열광적인 개혁”이 비로소 혁명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혁명이 필요한 때 혁명을 단행할 수 있는 주역, 혁명적 노동계급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조레스는 ‘노동계급의 주체적 능력의 고양’을 중심축으로 삼아, 개혁과 혁명 사이의 ‘긴장 속의 연속성’을 찾아내려 했다.

툴루즈 당대회 이후 조레스는 더욱더 급진적인 행보를 취하면서 차츰 통합 사회당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전에 게드파의 본거지였던 북프랑스 지부조차도 조레스 지지로 입장을 선회해갔다. 당내 통합에 일단 성공한 조레스는 다음에는 당과 CGT 사이의 화합에 나섰다. 총파업 전술 자체를 부정한 게드와 달리 조레스는 총파업 전술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보여 CGT 지도부와의 공조 가능성을 텄다. 1910년 철도파업 당시 <뤼마니테> 사무실을 파업투쟁본부로 사용케 하는 등,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연대를 모색했다.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당하던 CGT는 점차 SFIO에 마음을 열었다.

더구나 전 유럽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SFIO와 CGT 사이의 굳건한 연대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부터 군부의 영향력 증대와 정면 대결하길 꺼리지 않았다. 이제 조레스는 당, 노동조합을 막론하고 프랑스 노동계급의 반군국주의·반전평화 투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13년 파리의 프레 생-제르베에서 파리 코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여 당과 CGT가 최초의 대규모 연합집회를 벌였을 때, 단상의 조레스뿐만 아니라 프랑스 노동계급은 그들 삶의 한 전성기에 도달해 있었다.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들이 내적으로 통합되고 또한 자연과 화합하는 화해와 융합,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던 조레스의 사회주의 이념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모순을 살고 죽다 

조레스가 덧문 뒤에 숨은 비겁한 ‘투우사’에 의해서 일격에 황소처럼 쓰러지자 낙심한 파리에서는 그 커다란 행렬, 그 구슬픈 장례식이, 연설에 뒤이은 연설이 행하여지고, 이미 입을 열 수 없는 조레스 위에, 추도 연설의 비가 퍼부어졌다. 그리고 모두들 조레스의 관에 와서, 관 속에 누워 있는 조레스를 애도하는 사람도 있고, 또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관 속에 누워 있는 분이, 오히려 편할 거야….’ 하고. 

- 로맹 롤랑, 『매혹된 영혼Ⅰ』, 김창석 옮김, 정음사, 440쪽. 


1914년에 SFIO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98명의 사회주의 의원이 프랑스 의회에 등장했다. 또한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반전투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열쇠로 독일 사회민주당만 바라보았고,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조레스, 당신이 나선다면…’이라고 되뇔 뿐이었다.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로 전쟁 위기가 닥치자 프랑스 사회당은 7월 16~17일에 곧바로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군수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전 총파업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7월 29~30일의 인터내셔널 브뤼셀 임시대회에서도 조레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당 지도자들의 비관적인 분위기와 달리 반전대중행동을 선동했다. 사실 이 때 총파업이란 것은 긴장 현안을 국제재판에 회부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다분히 온건한 것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발전시키자”는 식의 구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 같은 사람에게도 낯선 것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다분히 온건한 저항의 가능성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브뤼셀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7월 31일, 라울 빌랭이라는 극우파 청년이 노천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조레스의 등뒤에서 권총을 발사했다. 조레스는 즉사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 국민총동원령이 내렸다. 8월 4일, 조레스의 장례식에서 당과 CGT의 지도자들은 모두(게드와 바이양마저도), 전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수백만 민중의 학살은 그렇게 해서 현실이 되었다. 혹자는 조레스가 살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조레스야말로 “살아 있었다면 전쟁광이 되었을 인물”이라는 힐난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평소 야박한 인물평으로 유명한 L. 트로츠키마저, “기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혁명가”라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출구 없는 모순 속에 빠졌지만 어정쩡한 타협 정치가는 아니었다”고 평가한 이 인물은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여전히 복잡한 누군가였다.

조레스의 ‘혁명적 개혁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때 이른 암살로 면죄부를 받은 이 이념은 하나의 대안이라기보다는 통합 사회당의 내부 봉합을 위한 책략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현실의 모순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그는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혁명과 개혁의 긴장과 대립이라는 현실 정치 실천의 모순에 정직했고, 그것을 ‘살았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죽었다’. 이후 100년의 세계 진보정당운동사에서도 그와 같은 지도자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참고한 글들

- 노서경, 「프랑스 통합사회당 창당과 장 조레스」, 서울대 프랑스사 연구회 편, 『프랑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느티나무, 1989.
- 노서경,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85~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 노서경, 「제2장: 반전과 사회주의 지식인 ― 장 조레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 책세상, 2001. 
- 송충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사회주의자: 7월 위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2. 
- 오광호, 「프랑스 제3공화정 전기 사회주의 연구」,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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