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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역사의 거름이 된 20년
- 1980~1990년대의 진보세력 정당 건설 흐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였고 지금도 위대한 맑스주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추앙 받는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감옥에 갇힌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역사의 경작자가 되고 싶어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했다. 아무도 역사의 ‘거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먼저 땅에 거름을 주지 않고 경작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경작자와 거름은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으로는 모두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름’은 희미한 그림자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되돌아보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 땅에 진보정치를 꽃피우려던 모든 노력들도 ‘역사의 거름’을 대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과는 요원하고 고통은 참담한 긴,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민주노동당이 있기에 이제는 그 시절을 절망 없이 회고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항상 미래로부터 심판 받는 미결정의 장(場)인 게 분명하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세월의 노고가 헛되지 않은 것으로 남으려면 앞으로 진보정당운동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야말로 천근의 무게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난 20여 년간의 진보정당 건설 운동을 돌아보려 한다.

1.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 그리고 NL-CA-PD 논쟁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완전히 한 세대의 공백을 거친 뒤에 1980년대에 기적처럼 부활했다. 그 결정적 계기는 미국과 군사파시즘 세력이 만들어주었다. 1980년의 광주항쟁은 민주화 투쟁 세력에게 두 가지의 뼈저린 깨달음을 던져주었다. 하나는 잔혹한 군부파시즘 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할 주체는 결국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 민중이라는 점이었다. 이로써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는 사회주의와 혁명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다른 깨달음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성에 대한 학습이었다. 이는 단지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혈맹 관계를 전제로 해서 씌어졌던 해방전후사와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을 요구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망 찾기 작업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도서관의 금서 코너에서 발견한, 혹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맑스․레닌주의 사상이었다. 과거 항일 혁명가들이 민족해방혁명의 나침반으로 수용한 코민테른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이 이제는 군부파시즘 정권과 그 비호 세력인 미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혁명의 지침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외국의 이론을 받아들여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 혁명 이론을 주조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이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도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소위 NL-(CA 혹은) PD 논쟁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논쟁은 이후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도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므로, 여기에서 잠시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회성격 논쟁이라고도 불린 당시 논쟁의 핵심 쟁점은 과연 전두환 군부파시즘의 등장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였다.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 그룹은 가장 간명한 해답을 제시했다. 남한 사회는 마치 일제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식민지라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일제의 식민지가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두환 정권은 독자적 실체를 가지지 못한 채 미국의 마름 역할을 할뿐인 식민 통치의 대행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식민지인 남한 사회는 아직 제대로 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 반(半)봉건 사회일 뿐이다. 이런 남한 사회에 필요한 당면 혁명은 일제 시대와 꼭 같은 반제국주의 반봉건 민족해방혁명이다. 이러한 NL의 이론 체계는 대부분 북한의 공식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일제 시기의 민족해방혁명론에서도 그랬지만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혁명론에서도 혁명의 주체에는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만 포함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력이 일부 매판 자본가와 손  잡고 국내의 자본주의적 발전마저 억압하는 식민지 반봉건 사회이기 때문에 국내 자본가 중의 일부마저도 세상을 바꾸는 데 동참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민족 부르주아지다. 그럼 1980년대에 NL이 민족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노동자․민중 세력의 중요한 동맹군이라고 보았던 정치 세력은 누구일까? 그게 바로 김대중 세력이었다. 이후 NL 계열의 운동가들이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깊은 이론적 뿌리를 지니는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반면 민족민주혁명파(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ND)라고도 불린 제헌의회(CA) 그룹이나 민중민주주의(People's Democracy, PD) 그룹은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NL의 주장에 반대했다. NL과 비교해 통칭 ‘좌파’라 불린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흐름들이 있어서 그 주장도 천차만별이었는데, NL의 식민지 반봉건사회 이론에 반대한다는 그 출발점만은 동일했다. 이들은 남한이 분명히 독자적 주권을 지닌 독립국가라고 보았고, 독점자본 단계에 이를 정도의 자본주의 발전도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에 종속된 신식민지적 성격 때문에 자본의 착취와 수탈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고 이로 인해서 국가기구도 극히 폭압적인 모습을 띤다고 설명했다. 남한 사회에 대한 이들의 설명은 대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꾸기 위한 당면 혁명은 식민지 시기의 민족해방혁명과는 성격이 다른 민주주의 혁명, 즉 민족민주혁명이나 반독점 반파쇼 민중민주혁명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당면 혁명의 성격을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인 민주주의 혁명으로 본다는 점에서 NL과 다른 그룹들 사이에는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 이 민주주의 혁명을 노동자․민중이 주도함으로써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구상 역시 동일했다. 그러나 민족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변자라는 보수정당 일부에 대한 판단에서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NL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천명하면서 현실 정치에서 대체로 김대중 세력과 행보를 같이 한 데 반해, 좌파는 보수정당과 구별되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데 매진했다. 
 
2. 당 건설을 향하여 - 비합법정당과 합법정당 

NL이든 좌파든 모두 코민테른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조직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을 건설하는 게 지상 목표였다. 80년대 상황에서 전위정당은 당연히 비합법 상태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위정당은 비합법정당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전위정당 건설이라는 점에서 NL은 다른 정파들에 비해 좀 복잡한 입장에 있었다. NL 경향의 운동가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대다수가 북의 조선노동당을 지도 기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남한에 독자적인 전위정당을 건설한다는 데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 CA나 PD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전위정당을 건설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서로간의 격렬한 논쟁과 헤게모니 다툼을 통해 혹은 협력과 연대, 조직 통합을 통해 당 건설을 향해 나아가려 노력했다.

많은 정파들이 명멸했지만 이 중에서도 당 건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그룹은 PD의 일부로 분류되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모습을 드러낸 이 조직은 <정세와 실천>, <노동자의 길> 등의 기관지를 내며 인천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룹들과 연계를 맺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부터는 <사회주의자>라는 새로운 정치신문을 내는 전국적 정치조직 ‘<사회주의자> 연합’을 형성한다. 1991년에는 다시 또 다른 주요한 PD 계열 조직인 민족통일민중민주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삼민동맹, <노동자의 깃발>이라는 기관지를 냈다), <노동계급> 그룹(<노동계급>이라는 기관지 제호에서 비롯된 명칭) 등과 통합해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약칭 한사노당 창준위)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한사노당 창준위는 수 천 명의 활동가를 보유한 조직으로서, 그야말로 비합법정당 건설의 일보직전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CA 그룹의 일부가 만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도 거의 비슷한 규모로 성장해 당 건설의 또 다른 축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당 건설의 노력은 이렇게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 공간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199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합법 정치 영역에서도 당 건설운동이 진행되었다. 선거와 의회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에 참여하는 이러한 당을 당시에는 합법정당이라 불렀다. 이 때 합법정당은 전위정당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전위정당은 사회주의 운동의 전략적 목표인 혁명을 지도하는 기관인 데 반해 합법정당은 부르주아 정치 제도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적 의의만 지니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흔히 전위정당을 전략정당, 합법정당을 전술정당이라 불렀다. 또한 전위정당이 투철한 노동자계급 의식에 기반해야 하는 데 반해 합법정당은 노동자 외에도 다양한 근로 대중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전위정당은 (노동자)계급정당, 합법정당은 계급연합당(혹은 민중정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세계 사회주의운동사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델은 아니다. 코민테른 노선을 따르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은 아예 비합법 상태로만 존재하든지 아니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완전히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든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독재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민주화의 과도적 단계에 있는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곧바로 공개적 활동을 벌일 수 없으므로 혁명정당이 제도정치 진출의 수단으로 활용할 위성정당이 필요했다. 그 고전적 사례는 1920년대 일본 공산당과 노농당(勞農黨)의 관계다. 1925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실시될 때 공산당은 불법 상태에 있었으므로 직접 선거에 뛰어들 수 없었다. 그래서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창당한 노농당에 당원들을 대거 입당시키고 이들이 노농당의 틀로 활동하게 했다. 비슷한 양상은 1980년대에 필리핀에서도 나타났다. 1986년의 민주화 투쟁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필리핀 공산당은 바얀당이라는 합법정당을 창당하여 이를 통해 선거와 의회 공간에 개입했다.

합법정당의 건설에 대해서도 NL은 비판적이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들은 현실 정치 영역에서는 김대중 세력의 집권을 돕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합법정당을 만들어서 김대중 세력과 경쟁하는 것이 해악적이라고까지 보았다. 한편 좌파 진영에서도 모두가 다 합법정당의 건설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 정치공간에 대한 개입에 치중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 이에 포섭되어버리고 마는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게 그 주요한 이유였다.

반면 합법정당의 건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인민노련과 CA-사노맹이었다. 이들은 모두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민중후보를 추대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총선에서는 ‘민중의 당’이라는 합법정당을 만들어 대응했다. 민중의 당은 88년 2월에 창당해(창당준비위원장: 정태윤) 전국 27개 지역에 지구당을 꾸리고 총선에 25명의 후보를 냈다. 비록 한 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해 해산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합법정당 건설운동이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인민노련은 민중의 당보다 훨씬 광범한 세력의 지지에 기반해서 새롭게 합법정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실은 1990년 새해 들어 당시 민중운동의 최대 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이 민중민주정당 건설 방침을 대의원 대회 안건으로 채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월 3일에 열린 전민련 2기 대의원 대회는 이 안건을 부결시켰다. 이는 1987년 대통령 선거와 함께, 민중운동 세력이 비판적 지지파(소위 비지파)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파(소위 민독정파)로 양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대의원 대회 결정에 불복한 전민련 지도부 일부는 전민련을 이탈하여 새로운 합법정당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1990년 6월 21일 발기인대회, 11월 10일 창당대회를 거쳐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상임대표 이우재를 비롯해서 장기표 정책위원장, 이재오 사무총장 등 민중당의 상층 지도부는 전민련에서 이탈한 재야 명망가들 중심이었다. 그러나 당의 토대를 이룬 것은 인민노련, 사노맹 등 지하 노동자정치조직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공단 지역의 지구당들을 직접 관리하며 민중당의 ‘또 다른 지도부’를 이루었다.

민중당 강령은 당의 이념을 ‘민중주체민주주의’라 표현했다. 이는 민중당의 과제를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한 몫을 담당하는 데서 찾은 사회주의 정파들과,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기피한 지도부 사이의 일정한 타협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전반적인 내용은 지금의 민주노동당 강령이 그렇듯이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현재 노선보다는 훨씬 급진적인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선거와 의회를 중요시하면서도 다른 한편 직접민주주의의 확산과 심화를 강조했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의회의 권한 강화와 지방자치의 완전한 실현(당시는 아직 지방자치가 재도입되기 이전이었다)을 강조했고, 직접민주주의의 기관으로는 ‘생산현장 대중조직들’과 ‘지역현장 대중조직들’을 명시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미 이 때부터 정당연기명 비례대표 투표 방식의 도입과 민중 발안권․소환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경제 대안으로는 경제민주주의가 철저하게 관철되는 민중주도경제를 제시했다. 민중주도경제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와 사적 소유가 공존하지만, 주요 기간산업, 금융기관, 천연자원은 분명히 국유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일정 규모의 비농지 역시 국유화를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사회적 소유 기업에서는 노동자공동체자주관리가 실시되고, 사적 기업에서도 노동자의 경영참가와 이윤균점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공동결정제 추진). 경제 운영 방식으로는 시장과 계획의 유기적 결합으로서 계획적 시장경제체제라는 표현을 썼다.

평화․통일에 대해서는 남북 군축과 한반도의 비핵지대화, 미군의 철수를 제시했다. 그 중에는 미군 보유 핵무기의 철거와 비동맹운동 참여 등의 내용도 있는데, 지금과는 다른 90년대 초반 상황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통일 방안으로는 ‘평화정착-낮은 수준의 연방제-높은 수준의 연방제’라는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이후 6․15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앞서서 제기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 차원의 대안들에 비해 사회복지 관련 내용들은 민주노동당 강령에 비해 중요도나 구체성이 떨어진다. 다만 강령과 함께 발표된 「기본정책(안)」에는 주택 관련 정책이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토지의 국공유화와 대량의 공공임대주택 건설). 이는 주택 문제가 폭발하던 6공화국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3. 1992년, 모색과 패배의 해 

한국 사회에서 거북이 걸음의 민주화가 진행되던 89~91년은 세계사적 전환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전범(典範)으로 생각하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내부의 모순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 운동가들에게 극도의 혼란과 위기를 초래했다.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었고, 사회민주주의, 유로코뮤니즘, 트로츠키주의, 신좌파, 포스트 맑스주의 등 새로운 사조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전위정당 건설에 골몰해 있던 비합법 정치조직들도 기존 노선의 재검토와 방향 전환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지속적 확대 역시 새로운 모색을 강요했다. 서구 수준의 대의제가 복구되고 대중운동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합법 정치 공간의 중요도는 더욱 증대하는 반면 비합법 조직의 개입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합법정당운동에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고 있던 인민노련(91년 무렵에는 한사노당 창준위)이 이 점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민노련 내에서는 이미 88년 초부터 6․29 선언 이후 점진적인 민주화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했다. 민중당 건설 과정에서도 인민노련은 민중당이 단순한 전술정당이라는 위상 이상으로 발전할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민중당을 비합법 사회주의 정당의 ‘우당’(友黨)으로 규정했으며, 민중당이 성장함에 따라 사회주의 정당도 비합법 상태에서 합법 상태로 전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91년 5월 투쟁 직후, 6월의 광역의회 선거에 민중당이 과연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인민노련은 민중당 내의 다른 사회주의 정파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했다. 이 선거에서 민중당은 한 명의 광역의원(강원도의회, 성희직)을 당선시키고 출마지역에서 평균 14.8%의 득표율을 거두었다.

1991년 여름은 이러한 흐름들을 합류시켜 변화의 격랑으로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로 증폭된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합법 정치 공간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서로 만나 핵융합 반응을 일으켰다. 소련의 쿠데타가 있은 지 불과 한 달 뒤인 9월에 전위정당 출범의 문턱에 서 있던 한사노당 창준위 내에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이라는 기존 노선을 전면 재검토하고 아예 합법 노동자정당을 건설하자는 ‘신노선’이 제출되었다. ‘신노선’은 조직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었고, 그 결과 한사노당 창준위는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약칭 노정추)로 수면 위에 떠오른다.

이미 활동 중인 민중당에 합류하는 대신 합법 노동자정당을 따로 건설하자는 주장이 나온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민중당은 현재의 민주노동당과는 달리 노동조합운동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다수의 진성당원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조직 운영과 재정의 상당 부분을 상층의 일부 간부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당권파’라 불린 이들 소수의 명망가들(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정태윤 등)이 사실상 당을 좌지우지하다시피 했다. 이들은 독자 역량으로 92년 총선을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민중당보다 더 큰 폭의 새로운 민족민주대중정당의 건설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당을 중심으로 보수야당과 함께 민주대연합을 이뤄 선거에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민중당 내 좌파에게는 보수야당과의 선거연합을 정당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졌다. 당권파는 좌파의 반발에 대해 사노맹 등 좌파 계열 당 간부들을 징계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래서 한사노당 창준위는 민중당에 곧바로 합류하는 대신 합법노동자정당의 건설을 제기하여 노동조합운동 내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킨 뒤 그 힘을 바탕으로 민중당을 압박하고 그래서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통합 진보정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91년 말 (가칭)한국노동당의 창당을 제안했고, 12월 15일에는 전노협 중앙위원 5명을 포함하여 241명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한국노동당의 추진위원으로 발표해 전노협 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2년 1월 19일 3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창당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6공 정부는 이 시도를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창당발기인대회를 앞두고 주대환 창당준비위원장을 비롯한 한국노동당(준)의 지도부 5인이 검거되었다. 지도부가 구속된 위기 상황에서 한국노동당(준)은 민중당과 통합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애초에는 민중당 내 좌파 계열 지구당위원장들의 호응 아래 한국노동당 당명으로 공세적 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민중당이라는 당명으로, 당권파의 기득권이 유지된 상황에서 통합이 이뤄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총선에 대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결정이 합리화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이는 크나큰 과오였다는 게 드러난다.

통합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51개 선거구에 후보를 내 출마 지역 평균 6%의 득표율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선자는 없었다. 당은 해산과 재창당의 과정을 밟아야 했다. 물론 이는 형식적 서류 절차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권파는 이미 생각을 달리 하고 있었다. 원내 진출에 정치적 생명을 건 당권파는 총선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간판으로는 결코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총선 직후 열린 민중당 15차 중앙위원회에서 사실상 당의 자진 해산 결정을 통과시켰다. 좌파 중앙위원들은 연말까지 진보정당을 재건해서 대통령 선거에 당의 후보로 대응하자는 안을 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이 때부터 진보정당운동은 2000년에 민주노동당이 새롭게 창당하기까지 ‘잃어버린 10년’이라고나 할 침체기에 돌입한다. 구 한국노동당 세력과 사노맹, 그리고 기타 좌파들이 연합하여 다시금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 후보(무소속)로 추대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을 재건하려 했으나 불과 1%, 23만여 표의 득표에 그치자 이 시도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 96․97 총파업이 벌어지기 전까지 사회주의 정파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지리멸렬한 상태에 놓였다. 한 동안은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과제 역시 노동조합운동이 주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4.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잃지 않은 진보정당 건설의 희망 

대통령 선거에서 참담한 결과를 맛본 직후 구 한국노동당 세력의 후신인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주대환 정책선전위원장(현재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시급히 고민해야 할 이론적 문제 중 하나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의 전술 문제’를 들었다. 그는 “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경우라는 것이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의 경험이 말하는 바”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형태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혁명 전략의 유형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맑스주의는 적절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말 그 시절에는 해답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한때 찬란했던 혁명의 꿈은 고된 일상 사업의 현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과거의 투사들은 제대로 길을 찾지 못했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구 한국노동당 출신 인사 중 일부가 민주당이라는 보수정당(개혁정당을 자임하기는 했으나)의 간판으로 선거에 나가려고 했던 사건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사례였을 뿐이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딛고 일어설 대안을 찾기는커녕 그것에 먹혀 버리고 만 모습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90년대 초반 진보정당 실패의 근본 원인은 노동계급 대중운동의 미성숙에 있었다.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이 아직 채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정당운동은 항상 취약한 대중 토대 위에서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당 건설의 시도들이 너무 조급했다거나 오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시도들이 있었기에 민주노총이 95년 출범 당시부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강령의 중요한 내용으로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결국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거름’ 역할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민중당의 경우는 만약 92년에 해산하지 않고 계속 당 활동을 지속했다면 지금의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규모 있게 발전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지금은 90년대 이후 10년 이상 지체된 진보정치의 대행진을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의 다시없는 기회다. 진보정당이 대중운동에 깊이 뿌리박아야 한다는 교훈은 이미 우리의 뼈 속 깊이 새겨져 있고,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상태다. 다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맞는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 노선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그 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게 90년대의 숙제는 아직 극복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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