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니라 저널리스트 노정태 님에 대한 얘기다.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노정태 님이 며칠 전 경향신문 판에 "미분양 아파트에 젖소를"이란 글을 기고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261745415&code=990000
그리고 이 글을 둘러싼 반응에 대해 필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파트, 젖소, 정치적 상상력 이라는 코멘타리를 남겼다. 문제는 코멘타리 이후 글을 둘러싼 반응이 더 격화되었다는 것인데, 이 리플 논쟁이 나와 관련이 없지 않아서 약간의 정리글을 쓰려고 한다.
(사실 나는 이번에 노정태 님 블로그에 익명의 덧글을 두어개 남겼다. 어느 순간 내가 익명의 덧글을 남긴 것처럼 비꼬는 듯 내 이름이 언급된 리플을 보고, 하지 않은 짓에 대해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그 짓을 하자는 장난스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노정태 님 블로그에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논쟁을 포함해서, 그의 블로그에 익명의 덧글을 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 생각에 그의 블로그에 덧글을 단 이들의 숫자는 노정태 님이 생각하는 숫자보다는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 그가 타인의 블로그에서 내 기고문을 비판한 그러다가 캐발리고 벌호우한 일을 계기로 그의 블로그의 근황을 일별하다 이 재미있는 사태를 관전하게 된 것이니, 유감없기를 바란다.)
1. 글의 목표설정의 문제
일단 나는 노정태 님이 스스로 글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애초에 경향신문에 실린 글은 이명박 정부를 적당히 풍자도 하면서, 몇몇 사회문제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는 목적을 설정했다면 별로 무리가 없는 글이었다. 진지한 정책적 제언으로 읽는 이들이 있기야 했겠지만, (칼럼 덧글에도 그런 것이 보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대개의 사람들 혹은 주의깊은 독자들은 이것을 일종의 풍자문학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노정태 님의 글은 경향에 실리자마자 모 웹진의 칼럼에 언급되었는데, 이 필자도 이렇게 반응한다.
그는 “농담이 아니다”며 자못 진지하게 여러 자료를 들어 가능성에 대해 독자를 설득했다. 그는 그러면서 “처음에는 내가 직접 이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어볼까 했다”고 너스레를 떤 뒤 “이 사업은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 김성이 전 보건복지부장관,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담당자로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며 끝맺었다. 기막힌 반전이다.
진짜 웃긴다. - [이균성] 6개월만에 3억 만드는 길, http://column.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375429&g_menu=043101
목적을 이렇게 설정했다면, 그는 최근 며칠 동안 그의 블로그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리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글의 가치를 너무 높게 평가한 탓인지 블로그에 상세한 코멘타리를 올리면서 사태가 이상해졌다. 더구나 그 코멘타리에 대해서 덧글 논쟁을 하는 도중에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코멘타리 본문에서보다도 더 진지하게 설명해 버렸다. 이로서 갑자기 관전자들은 갑자기 한 20대 청년의 예술가적(?) 아이디어를 정책적으로 검증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굴러떨어져 버렸다.
노정태 님 본인이 첫번째 코멘타리에서 적절히 구분했다시피 그의 글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크게 1) '미분양 아파트'로 대별되는 부동산 문제와, 2) '젖소 키우기'가 대변하는 축산업, 대체에너지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에 대해서 노정태 님은 "도시와 농촌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그런 그림을 그렸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충격요법을 위한 비유였다는 것이니, 그것까지는 인정된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김대영 님과의 덧글논쟁에서 미분양 아파트와 미준공 아파트의 개념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미분양 아파트냐?"라는 질문에 "그게 요새 이슈가 되고 있어서 팁으로 갖다 붙였어."라고 대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의 취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었다고 해명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의 논점으로 가면 상황은 더욱 해괴하다. 노정태 님이 바이오매스 발전의 산업적 타당성을 논하는 업계 관련자의 글에 http://jocelyn.tistory.com/400 정면으로 반박해 버렸기 때문이다. 업계의 입장과 환경주의자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는 만큼, 노정태 님이 만일 이에 대해서도 반론을 하고 싶어했다면 자신이 이 문제에 관련해 살펴본 레퍼런스를 블로그에 공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건 너스레였고, 이 문제가 한큐에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바이오매스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비적인 자세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노정태 님은 모르는 이가 아는 이를 가르치려고 들면서, 듣도 보도 못한 잡학 강의를 시작하셨다.
그림 1. 이게 인간이 화석연료를 쓰기 전까지 지구 대기 내 탄소가 순환하던 모습입니다. 대기 중에서 불을 떼고 똥을 싸고 방귀를 뀌어도, 그것은 대기권이라는 '닫힌 계' 안에서 순환하므로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일치합니다. 따라서 CO2에 의한 온난화도 발생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죠.
그림 2. 이제 인간이 '땅 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꺼내 쓰기 시작합니다. 이러면 대기권은 '닫힌 계'가 아니게 되죠. 외부로부터 다량의 탄소가 유입되었습니다. 그것이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고, 열 배출이 안 되어서 지구는 점점 더워집니다.
그림 3. 이 시점에서 바이오매스를 활용한다고 해봅시다. 기술을 발전시켜서 외부 에너지 유입 없이 곧장 바이오매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림 1.에서 봤던 것처럼 대기권을 다시 '닫힌 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대기중에 뿌려진 이산화탄소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지금처럼 온난화 대책을 세우면서 동시에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요.
이 순간 이 논의는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어차피 배출될 운명인 소똥의 이산화탄소를 인류가 연료로 쓴 후 배출하는 것은 이산화탄소 절감에 도움이 된다." 정도인 것 같다. 이건 그 자체론 말이 된다. 대개 소똥은 바다에 투기하는데, 그 경우 소똥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미생물들이 분해해서 이산화탄소로 배출하게 되니까. 그리고 운송거리를 줄이게 되니까 그 와중에 소모되는 화석연료도 줄이고 어쩌구 저쩌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도시에서 축산업을 하려면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설비가 필요하고, 아마도 이 설비들을 유지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소도 호흡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존재아닌가. 물론 이에 대해 노정태 님은 "소를 늘리자는 소리는 한 적 없고, 기존에 있는 소를 활용하자는 거다."라고 답할 것이다. 축산업을 도시에서 육성할 경우 소가 늘어날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다. 그도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나, 이런 식으로까지 자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논리를 구성한다면 물리학도들은 매순간 "실현가능한 영구기관"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논의가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 정도 수준에서 감축된 이산화탄소양이 '아름다운 지구'와 '슬픈 지구'를 구별짓게 한다는 농담은 참으로 사람을 슬프게 한다.
이 농담에 대한 반론으로는 굳이 내가 쓸 필요도 없이 이미 정리된 바가 있으니 인용하도록 한다.
http://jocelyn.tistory.com/407 -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개략적인 논의가 궁금한 사람은 이 게시물 전체를 참조해도 될듯하다.
정리하자면 그는 농담이나 풍자문학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글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하고, 오히려 자신보다 더 많이 아는 이의 논의를 무식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무식을 화끈하게 드러내는 황망한 실수를 범했다. 그의 포스트를 읽으면서 느꼈던 허탈함을 생각한다면, 그의 행동 전체를 풍자문학적으로 고찰해봐야 한다는 필요성이 들 정도다. 이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면, http://thepine.egloos.com/2199159 을 들 수 있다. 그림판 패러디가 예술이다.
2. 앎과 무지를 판단하는 문제
노정태 님 본인의 반응을 통해 논쟁이 격화되자 plath 님 등은 농담, SF소설, 마징가 Z 기지 건설 등의 예시를 들어 노정태 님의 논지를 옹호하려 했다. 마징자 Z 기지 건설을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일회적인 사업이니 논외로 빼자. 어떤 글이 한편의 훌륭한 농담, 혹은 SF소설이 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가장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비현실적이거나 비과학적일 수는 있어도 다른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어야 한다. 즉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리얼리티가 아닌 것이 포함되어 있을 때 농담이나 SF소설은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노정태 님 글의 문제는 어떤 부분에서도 손톱만큼의 리얼리티, 혹은 엄밀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나는 풍자문학이라는 범주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되었던 모든 것들을 간략하게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
1) 경제위기 - 성장동력을 찾아내면서 극복 : 개념적 모순. 김대영 님과의 덧글 논쟁에서 이명박 정부를 패러디하려는 의도였다고 선회함. 마침 지금 프레시안 메인에는 '녹색'과 '성장'은 양립할 수 없다는 글이 떠 있다.
2) 성장동력 - 미분양 아파트 해소 : 미분양 아파트 해소하면서 성장동력을 유지하겠다는 얘기는 이명박 정부의 거품 조성 경제정책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 지적되면서, 그의 경제학적 맥락에 대한 무지가 대두되었다.
3) 미분양 아파트 해소 - 축산업 : 본인도 이것 둘을 엮는게 억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정말 아파트에서 젖소키우자는 말인 줄 알았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4) 축산업 - 친환경 : 역시 잘못된 전제라는게 덧글 토론 결과 밝혀졌다. 나도 어디선가 요새 한강물 깨끗해진 게 경기도 쪽 목장이 다 죽어서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물론 여기서 '환경'을 지역환경으로 볼 것인가 지구 전체 환경을 볼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는데, 여하튼 온난화 문제 하나만 두고 친환경 운운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5) 바이오매스 - 온난화 해소 : 이것 역시 별다른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바이오매스 논의에서 이산화탄소 감소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쪽은 오히려 식물성이다. 연료를 연소하는 한 탄소배출량은 같을 수밖에 없지만 식물성의 경우 그것을 키우는 과정에서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성 바이오매스 산업을 적극 육성할 경우 농경지를 확대해야 하고 그러다가 산림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부작용이 있으며, 이는 브라질에서 실제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사회문제, 그렇게 쉽지 않다.
6) 온난화 메커니즘 - 닫힌계 : 개소리임이 밝혀졌다.
7) 결론 : 뭐 하나 맞는게 하나도 없다. 이걸 누구 코에 갖다붙이겠다고 설치는 건지...
이런 논의를 펼쳐놓고 그는 "정치적 상상력의 모범"을 보였다고 자평한다. 상상력은 적어도 어떤 부분에선 치열한 현실인식에 기반해 있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을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잣대로 보는 한 그는 망상을 펼친 것이 된다. SF로 본다 해도 자료조사가 부족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다나카 요시키도 이렇게 허술하게 쓰지는 않는다. 두 소설가에게 죄송.) 고급한 농담으로 봐주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그는 경향신문의 사설과 어느 칼럼니스트의 경구를 인용하며 주저없이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한 이들이 모두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글의 목표설정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겠는데, 여기서 보이는 그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도무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노정태 님이 모르는 것은 대개 나도 모른다. 그리고 앎이라는 것은 앎과 무지에 대한 판단을 더욱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사실 무지한 이가 자신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무지한 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잘 모르는 이들이 항상 긴장하는 이유다.
그래서 잘 모르는 이들은 대개 피드백을 통해 주장을 검증해 나가는데, 노정태 님의 경우 일단 지면에 글을 발표한 후 피드백을 받는 형식을 택했다. 이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잘만 이루어진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긴 한데, 문제는 그가 피드백에 참여하는 이들을 무식하다고 성토하면서 그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검증의 구조를 이탈하면서, 그는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수사로 자신의 논의를 끝맺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그가 일전에 공언했던 "정치의 철학화"이기는커녕, "정치의 예술화"다. 예술적 감수성이 없는 이가 그런 짓을 벌이는 감수성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제 그의 글은 고-중생대 키보드워리어들이나 그 이름을 알 왕년의 수군작과 같이 비평하기에도 귀찮은 경지에 들어섰지만, 혹시라도 그의 낭만주의적인 수사들이 멋있어 보이는 독자들이 있을까 우려하여 시간을 들여 써보았다.
물론 환경주의 입장에서 에너지 소비를 왕창 줄이자, 라고 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입니다만, 그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거나, 말만 듣고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던듯. 차라리 육식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쪽이 더 정합적이겠다는 리플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토를 달아놨더군요. 노정태 님이 사용하시는 수사는 보통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맞아들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1) 제가 노정태 님에게 인정받아서 뭐하나효?
2) 그게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했다면, 좀더 유명한 사람을 까지 않을까요?
3) 그것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들은 무섭고 노정태 님은 만만해서 그런 거라면, 왜 꼴랑 자기 블로그에서 까고 있을까요? 하다못해 웹진에라도 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을까효? 근데 별로 그럴 생각은 없네효...
하여튼 저 지랄맞은 자뻑은...무슨 자기는 중권찡이고 우리는 변듣보인줄 아는 모양이빈다...한때 친구였던 죄로 씹는 형식만으로나마 에프터 서비스를 했던 건데, 이짓도 그만 두어야죠... 취직은커녕 졸업도 못한 암울한 20대가 편집장님의 헛소리를 캐어하고 다녀야 한다면 우습겠죠? 저도 제 살길이나 뚫어야죠. ㅎㅎ
노지아
우선, 내가 한 말의 핵심은 닫힌 계 내에서도 화학반응의 우위가 정반응이나 역반응 둘 중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평형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에너지 소비량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그 정도의 화학에너지 사용이 계속된다면 당연히 탄소배출량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 두 가지였다. 나도 말을 하다보니 좀 오버한 구석이 없잖아 있는데, 아무튼 정리해보자. 이래저래 바이오 연료에 대한 환상을 품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으니..
1. 바이오연료가 탄소중립적이라는 말은 맞지만, 닫힌 계 내에서 탄소순환이 일어난다고 해서 역반응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하게 바이오연료가 좋은 대안이라는 나이브한 사고의 한계는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탄소중립적 연료라고 해도, 이산화탄소의 총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소의 투입(광합성:유기물)과 배출(연소:이산화탄소)의 상쇄가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연료를 소비하는 한, 당연히 그만큼의 광합성이 필요한데 과연 그걸 만들 수 있느냐, 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2005년 기준으로 세계 에너지 소비량은 11,433,918ktoe, 한국 에너지 소비량은 212,548ktoe이다. (WRI 자료임. 단위 ktoe는 thousand tonnes of oil equivalent) 그러나 "국내 바이오매스 가용자원은 07년 기준 연간 2,285천toe(석유환산톤)으로서 전체에너지 소비량(2억4천만toe)의 0.9% 수준"이고, 특히 "한국은 전체 최종에너지 소비량의 55%가 산업부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에너지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산업부분의 강력한 에너지효율화와 점차 에너지저소비형 산업구조로의 개편 없이는 에너지소비 저감이 어렵다. 또한 수요관리중심의 정책이 필수적이다. (중략) 이번에 발표된 정부의 고유가 대응방안의 효과가 의심스러운 것도 정부가 국내 에너지의 적절한 목표 수요량을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각도 에너지저감 정책과 에너지원의 보급을 모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지금 당장 화석연료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고 바이오매스를 이용한 에너지공정으로 완벽하게 대체된다고 가정해도, 에너지로 사용되는 양만큼의 바이오매스는 실제로는 산소를 만들어내는 공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으므로(바이오매스를 통한 에너지공정에서 산소 배출과 이산화탄소 배출의 알짜탄소량이 0, 즉 완전히 동일하다고 가정해보자) 바이오연료로 사용될 매스를 제외하고도 현존하는 식물량이 유지되어야 최소한 "지금의 CO2 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올라가면 식물의 광합성량이 약간 증가하기는 한다. 그러나 역시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만큼의 광합성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가용에너지의 한도 내에서만 소비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려면 현재 유기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탄소를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작용만이 남게된다. 그렇다면 화석연료로부터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어차피 썩어 없어지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죽은 나무나 폐자재 등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역시 그것만 가지고는 에너지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상당한 면적의 토지가 에너지작물 경작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관하여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의 스텐 닐슨 박사는 “2030년까지 에너지의 10분의 1을 바이오연료로 대체하는 데 아르헨티나만 한 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막이나 한대 지역을 개간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닐슨 박사는 “결국 숲이나 습지가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세계 저명 과학자들은 앞 다투어 강이나 지하수의 고갈, 숲이나 습지의 파괴를 경고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토지는 한정된 자원이다. 다른 작물들과 경합할 뿐 아니라 숲이나 습지 등과도 경합한다. 내가 위에 링크한 브라질의 바이오에탄올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보다 식물이 자라나는 환경이 훨씬 좋은 그 동네에서도 결국 식량 생산을 위한 농토는 바이오연료를 위한 작물을 키울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열대우림 파괴 이야기도.) 그렇다면 국토면적은 좁지만 에너지소비량은 상위권이고, 농업환경은 그렇게 우수하지 않은 한국에서 바이오매스를 통해 에너지를 순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3. 그렇다면 소는 어떤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중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에서도 영양단계의 상위로 갈수록 생물량과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즉, 소를 이용한 바이오매스는 식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보다도 훨씬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건 내가 인용했던 "쇠고기 1kg을 만들기 위해 곡물 10kg이 필요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더군다나 소의 트림이나 방귀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이다. 또한 노정태의 가정처럼 닫힌 공간에 소를 키워서 메탄을 모으겠다면, 소는 질식할 것이다.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열병합발전이 가능할 정도의 소 배설물을 채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규모는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결국 도시와 농장을 공간적으로만 가까이 두자는 말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할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4. 나는 바이오연료가 화석연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을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아 보인다는 식의 사고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 모든 이야기가 그냥 농담이었으면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네.. 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부기관에서 이미 몇 년 전부터 논의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는 실행 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근본적 발상의 전환"이라는 식의 자화자찬까지 나오는 걸 보니 참.. "근본적 발상의 전환"은 이미 래디컬한 환경론자들이 거진 다 해놓았다고 본다. 에너지의 소비를 크게 감축하는 것, 그러므로 크게 봐서 성장을 멈추고 오히려 퇴보하는 것 말이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것에 심정적인 거부감이 들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누구 말마따나 "녹색"과 "성장"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다. 중간에서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식의 사고는 얼핏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함정에 빠졌던 일군의 집단이 떠올라 씁쓸할 뿐이다.
오늘 그분의 자뻑(근본적 발상의 전환)을 보니 눈물이 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