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한다는 것의 불명료성
무슨 프로보커터? 케이터? 뭐 그런 말도 잠시 유행한 모양인데, 좀 웃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중궈니횽 행태의 본질은 두 가지. 1)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그야말로 자유로운 마음대로의 행보 2) 막대 구부리기 이다. 노동계급 시절 막스-레닌주의자와 쏘련 붕괴 이후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중궈니횽의 행태는 일관성이 있는 거다. 이걸 보지 못하면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된다.
문 정권의 본질에 대한 양쪽의 오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도 그것도 아니다. 문 정권 만의 문제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 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게 지금 쓰는 글의 핵심인데, 결론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안 쓰느니 못하다. 이걸 통해 하고 싶은 말은, 그렇기 때문에 또 한 번의 동전 뒤집기가 아니라 근본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김 선생님이 번역한 힐러리 웨인라이트의 ‘국가를 되찾자’ 서문에서 웃긴 대목을 옮겨 본다.
오늘날 대의기구의 정당성에 관한 신뢰가 결핍된 현실은 우리가 대의 정부와 대의 민주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과 함께, 역설적이게도 대중 민주주의에 기초한 강력한 기구들 없이는 대의 정부가 곧 대의 민주주의로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대의 정부는 다음의 네모들 속에 가부를 표시하게 한다. 정규적 선거를 하는가, 의회에 형식적으로 책임을 지는 정책 집행자가 존재하는가 등등. 그러나 이런 형식적 기제들이 마련돼 있다고 해서 민중이 통치 방식에 관한 통제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의 민주적 잠재력과 대의 정치 기구들이 민주주의를 점차 소진해가는 현실 사이의 충돌은 ‘대의’의 이중적 의미 속에 내표돼 있다. 한편으로는 ‘누구를 대신하는 것’ 또는 ‘상징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하게 하는 것’ 또는 ‘재현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일단 정당의 강령 또는 쉽게 말해 브랜드 이미지에 기대어 선출되고 나면, 정치인들은 다음 선가까지는 대체로 손이 자유롭게 되는 게 현실이다. 투표를 빼면 시민은 사실상 부재 상태다. 정치 무대에서도 청중석에서도 시민은 멀어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업과 미디어 관련자들은 정치적 의사 결정자는 물론 때로는 국가 기구에도 거의 무한한 접근권을 갖는다.
‘대의’의 또 다른 의미, 곧 정치 기구들 안에 민중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주 다른 논리를 열어젖힌다. ‘존재하게 한다’는 말은 대의자와 그 대의자가 대표하는 민중들 사이의 항상적이고 상호적이며 투명한 관계를 함축한다.
역사적으로 두 의미 사이의 구분은 종종 흐려졌는데, ‘누구를 대신하는 것(to stand for)’이라는 아이디어가 ‘누구를 표상하기(being typical of)’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 노동자 정당의 지도부는, 가장 악명 높은 영국 노동당 지도부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의원이 산업 노동자나 육체노동자 출신인 만큼 사실상 ‘노동하는 민중’이 의회 안에 존재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취되려면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존재하게 돼 자신의 대의자들하고 연속적인 관계를 갖고 그리하여 그 대의자들을 책임성 있고 반응적이게 만드는 다른 매커니즘이 필요하지만, 이런 관점은 그런 관심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반대로 그런 주의를 기울이는 적극적인 관계 덕분에 정책 집행자는 투명하며 접근성을 갖춰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대신한다’와 ‘존재하게 한다’라는 두 의미 사이의 미끄러짐이 갖는 문제는 최근 브라질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전직 자동차 노동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하자마자, 대중운동은 정부의 의사 결정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온 대답은 이미 ‘대중(popular)’이, 곧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이상 대중적 참여는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결국 ‘대의’의 불명료성은 참여 민주주의 개념의 미끄러짐에도 기여하게 된다.
최근의 상황은 웨인라이트가 쓴 위의 상황보다는 두 세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노동자당 정권은 소수파로서 다수적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참여’의 대의를 정치 경제적 자원의 ‘배분’로 대체했다. 그게 거의 모든 권력의 핵심부가 검찰 권력의 ‘세차 작전’의 피해로부터 실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 다시 룰라였다는 사실은 이걸 보여주는 거다.
대의명분이 이해관계를 나누는 일로 대체되는 과정에는 과거 기득권에 의해 피지배자의 위치를 강요받았던 사회의 현실이 일부 작용했다. 사회적으로, 이들은 유럽 강자들의 거짓 대의명분에 의한 강요를 앞에서는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뒤로는 무시하는 생존 전략에 익숙했던 것이다.
브라질 사례가 지금 쓰는 책의 중심적 내용인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 사례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인 결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대의민주주의의 공통된 사각지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중의 다양한 시도의 실패와 좌절을 다루면서 대안적 체제를 그저 상상하는 것까지 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