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왜? 가 중요하다. 이유가 중요하다. 무엇이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유가 없는 것에도 최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 좋다. 그래도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게 있지만, 어쨌거나 이유는 있어야 한다.
오늘은 한겨레분들과 방송을 끝내고 회식을 했는데, 집에서 나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알 수 없어 분위기를 맞출 수 없었다. 그것은 방송 중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시작할 때에 티가 좀 났을 것이다. 떠들다 보니 컨디션 회복이 좀 되었으나… 어렵다.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 나와 대기실에서도 수퍼 마리오 3를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수퍼 마리오 3는 올타임 레전드 세계 최고의 게임이다. 닌텐도 스위치로 모든 버전의 수퍼 마리오 3를 할 수 있는 시대다. 패미컴, 슈퍼 패미컴, 게임보이 어드밴스… 온라인 서비스에 가입해야 하지만, 어쨌든. 나이를 먹어 실수가 잦아졌다면 닌텐도 녀석들이 만들어 놓은 에뮬레이터의 기능으로 리와인드를 걸어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뭐 내가 오늘 들고 나간 게임기는 GBA SP였지만…
어쨌든 PD님이 물었다. 뭐 서운한 거 있으시냐. 방송국 다니면서 서운한 거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을 때가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질문이다. 일이라는 건 서운하고 말고와는 관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제작이나 섭외에 반영이 되면 되겠는가.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그건 정말 극단적 경우겠지. 근데 어쨌든 이건 내 기준에 그런 거고 남들이 서운하냐고 묻는 것은 그냥 그럭저럭 표준적인 대화 스킬일 뿐이다… 그래서 서운하다기 보다는 난 잘 모르겠다 라고 대답을 해드렸다. 왜 세트가 학교인지, 왜 학생과 선생님 컨셉인지 등등… PD님은 이유가 없는 것도 많고 저희는 다만 평론가님 같은 분들의 장점을 최대한 잘 살리려 할 뿐이다 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 제가 그만둘 경우에는 프로그램 컨셉도 바뀌나요 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시비거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또 요즘 같은 때에는 말이 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써갖고, 진짜 씨가 되나?
서운한 거 있느냐란 질문과 함께 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질문이 뭐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이다. 이것도 마찬가진데, 내가 뭘 하고 싶고 말고에 방송 내용이 좌우되면 되겠는가. 그날 해야 할 것을 해야되는 거지… 근데 사실 이것도 내 기준에 그런 거고 남들은 그냥 아이템이나 컨셉을 추천할 것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찌됐든 이런 하나 하나를 신경을 써가면서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 대하는 것이 피곤하다. 그래서 회식도 피곤하다. 평소 같으면 그러한 피곤함을 디폴트로 깔고도 잘 헤쳐나갔겠으나, 어려운 날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지 난 회식이라는 것은 4명까지가 좋다고 본다.
하여간 운동권 이후 왜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운동권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늘 점심을 안 먹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세계 정세부터 살펴야 하는 족속들이다. 뭐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지금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걸 해야 하고, 이런 걸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며, 이런 사람들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컨디션 난조로 집에 와서 이런 것을 쓰고 있는 이유는,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엊그제는 어떤 분이 당신은 글재주는 없고 말재주를 살려야 하니 뉴스레터 따위는 그만두고 방송에 집중하라 했는데, 극소수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유튜브 방송을 해서 과연 수익이 나겠는가? 그러니 옆에 있던 어떤 분이 또 그러시더라. 평론가님… 지금이야말로 한쪽 편에 서실 때입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이다. 태생이 그렇지가 못해요 나는. 결국 시사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 실제 수요가 있는 층에다가 뭘 팔아야 하는데… 그러면 직군이 상당히 좁혀진다. 문제는 이 분들이 저한테 지갑을 열 확률이…
오늘 한겨레 방송에서 어떤 고마운 분이 블로그에다가 팬이 없다며 징징거리길래 글을 남긴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그 멘트를 진행자가 소개하였는데, 혹시 돈을 내라고 해도 팬이신가요 라는 말이 나올 뻔하였으나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아니잖은가. 나는 괴물이 되고 있는 것인가! 자책하며… 그런데 오늘 한겨레TV 회식 1차 비용은 같은 고깃집 옆 테이블에 있던 김준일님 팬(본인 능력으로 구매하였다고 주장하는 몽클레어 바지 착용)이 지불하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