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 아수리언 또 아수라
저번에 신문사가 만드는 무슨 인터넷 방송에서 경찰은 아수라가 된다 그랬는데, 아수라 하니까 또 아수리언이 연상되었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옛날엔 안남시 깃발 들고 나오고 이랬다. 트위터가 사랑한 아수리언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아수라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여기에 언제 쓴 일이 있었는데 소시민을 착취하는 정치를 법이 똑같이 소시민을 이용해, 자기만족적으로 응징하려다가 정치에게 두들겨 맞는 영화… 최후의 승리자는 정치지만 소시민에게는 총알 한 발이 우연히 남았다라는… 그런 메시지라고 쓴 일이 있다. 좀 상당히 비관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촛불 정서 같은 거지.
그건 이제 나 같은 정치마니아들 해석이고, 아수리언이란 뭐냐를 물어보면 또 다르게 생각할 거리가 있다. 가령 아수리언들에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뭔가 폭력의 미학을 즐기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게 좀 뭔가 앞뒤가 어긋난다. 정우성이 어색하게 욕을 한다든가… 어딘가 비꼬는 정서가 있는데, 아수라라는 영화를 작정하고 비웃는다기 보다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롱이란 맥락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가령 북한 국영방송 아나운서가 자기네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모습은 그들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운 장면일 뿐이다. 만일 남한에서 누가 그러한 태도로 누군가를 칭송한다면 그것은 조롱이지 찬양이 아니다. 아수리언은 영화에 대해 이 역할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그 모습이 ‘보여지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스스로를 타자화 한다. 그러니까 배우와 감독이 당황을 할 정도의 상황을 진심을 다해 만들어 놓고 그것을 또한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수라의 과장된 남성적 폭력성의 연출은 중립화 된다. 인식의 세계에서, 칼 들고 설치는 도둑의 모습은 그것을 “귀엽다”고 평가하는 순간 장난감 칼을 든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자야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