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늦으리
얼마 전에 한겨레 방송에서 잠깐 얘기했는데, 90년대 김영삼 시절에 ‘내일은 늦으리’라고, 환경보호 캠페인의 일환으로 하던 콘서트 씨리즈가 있다. 내일은 늦으리… 내일은 늦겠지 물론. 그때는 공해고 지금은 기후위기라는 초점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내일은 늦으리’라는 구호는 30년째 똑같이 얘기하는 거 같아서 씁쓸하다.
얼마 전에 김선생님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였는데, 그런 거였다. 탄소중립 뭐 시계가 몇 분 남았다 이런 얘기 많이 하는데, 그래서 이제 되돌릴 수 없어졌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건가? 이 문제는 오히려 등한시되고 있지 않느냐, 그런거. ‘내일은 늦으리’식으로 얘기하면, 내일은 늦으리 했는데 내일이 됐어. 늦었어 이미.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기성의 담론 소비 방식은 늦었으면 망하는 거거든? 근데 그게 그렇게 말하고 말 일이 아니라는 것이 기후위기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분들의 말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있다. 늦었기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니다. 기후위기에 따른 변화를 되돌릴 수 없고 막을 수 없게 된다는 거다. 즉, ‘변화’가 오는 것이다. 그 ‘변화’를 지금 이 상태로 맞이한다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든 적응하고 대응하면서 살 수 있다. 희생되는 것은 ‘없는 사람들’이다. ‘변화’를 막는 데에 실패했다면, ‘없는 사람들’이 그 ‘변화’ 속에서 버틸 수 있어야 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논의가 하나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 라는…
기후지체담론이라는 게 있는데, 그 개념을 확장해보면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기후위기 담론의 절반 정도는 오히려 (확장된)기후지체담론의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다. 기후위기를 입버릇처럼 주워섬겼던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어느 운동권 고참이 2012년엔가 그랬다. 뭐가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냐! 난 이제부터 적색만 하겠다… 그런데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란 구호의 핵심은 적색과 녹색이(물론 각론의 실행에서 충돌하는 일은 있으나) 근본적 차원의 이행 전략에선 본질적으로 분리되지 않게 되었다는 거거든? 그거 한참 얘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관심이 없었던 거지.
뭐든 관심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내일은 늦으리’ 이거는 이제와선 반만 관심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세상만사 다 마찬가지다. 아유 말해 뭐하나… 잠이나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