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며 거의 1시간 정도를 달려 다시 나하시로 들어와 우에노야에서 내렸다. 같이 탄 승객 중에는 해변을 다녀온 한국 남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노약자석을 점거해서는 여자친구를 데려왔었다면 큰일날 뻔했다는 내용의 대화를 했다. 여자친구가 화를 냈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차를 렌트하지도 않았고, 장시간 고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다음 번에는 꼭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차를 빌리자고들 말하는데, 한국 남자 답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현립박물관미술관(이하 박물관)에 가기 위해 우에노야 근처를 또 헤매었다. 이 근처엔 부자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초현실적인 디자인 등 겉보기에도 돈 들어간 티가 나는 주택들이 많았다. ‘세콤’과 같은 경비업체의 스티커도 제법 보였다. 근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야구 연습을 하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 근방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건물 공사장에서 잠시 도로를 점거해 차가 밀리는 일이 있었는데, 건설노동자가 도로를 막아 놓았던 라바콘을 치운 후에 그동안 기다린 차들을 향해 일일이 90도로 절을 하는 거였다. 건설노동자들의 친절은 슈리성 근처에서도 경험했다. 인도에서 공사를 하느라 차도에 보행로를 만들어 놨는데 김 선생님이 보행로 밖으로 걷자 막아놓은 펜스를 열어 친절하게 다시 보행로로 들어와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 같았으면 본체 만체 신경질이나 내고 말았을 거다. 안전의 문제는 오직 자기 책임인 것이다.
이런 걸 두고 한국인들은 혼네니 다테마에니 하는 말을 동원해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이란 식으로 묘사하지만, 내겐 그게 아니라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해법처럼 보였다. 이 사람들은 20세기 중반에 전세계를 대상으로 참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큰 폐를 끼쳤는데, 그 대가로 핵폭탄을 두 발이나 맞고 국가의 기능을 거세당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집단적으로 경험했다. 반면 우리는 뭔가를 책임지는 것에 대한 경험이 없지 않나 한다. 외세의 침략으로 일관된 반만년의 역사 어쩌구 하면서 스스로를 부당한 경험에 의한 피해자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실제로 ‘잘못한 사람(실제 잘못을 했는지와는 관계없음)’이 되면 순식간에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체제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그래서 한국은 ‘각자도생’이다.
이런 온갖 생각을 하는 중에도 김 선생님의 뚜벅이 여행은 계속되었다. 나는 다리가 부러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하였다. 박물관에 근접할수록 오키나와 특유의 시골스러움은 점점 옅어졌다. 길도 넓어졌고 공동주택 중에 부자들이 많이 사는 걸로 보이는 ‘맨션’들이 출현했다. 이 동네를 ‘신도심’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고생 끝에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멀리서 볼 때 건물디자인이 경기도문화의전당을 연상시켰다. 이곳의 디자인은 ‘류큐 왕조 시대의 성’이 모티브라는데, 경기도문화의전당 역시 처음 만들었을 때 무슨 성곽 같은 게 디자인 모티브라고들 했던 기억이다. 수원 출신이니 내가 잘 안다. 여튼 건물 안에 들어가서 에어컨의 시원함에 감동하였다.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잠시 앉아서 박살난 정신을 추스른 후 자동판매기에서 티켓을 샀다. 모든 걸 볼 수 있는 티켓은 너무 비싸서 상설전시만 보는 걸로 샀다.
상설전시는 오키나와의 해양성과 도서(島嶼)성에 기반한 해설이 포인트라고 하는데, 오키나와의 인간과 동식물 등의 모든 역사를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해보였다. ‘우리는 본토와는 다른 역사적 근본을 갖고 있다’는 어떤 자부심이 작용한 게 아닐까도 추측하였다. 미나토가와인의 모형을 실제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에서도 이런 느낌이 왔다. 또, 왠지 모르게 산신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다. 지식이 많이 없어서 설명하기 힘들지만 미나토가와인과 산신 모두 본토보다 앞섰다는 느낌의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지쳐서 화장실을 이용하였는데, 옆 통로를 이용하니 휴식실이 나왔다. 밝은 창이 있는 커다란 방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들이 죽 늘어서 있다. 자꾸 한국과 비교하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우리 같았으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시설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관람을 끝내고 자동판매기에서 콜라를 사서 마시면서 길 건너 쇼핑몰로 이동했다. ‘나하 메인플레이스’라는 다소 괴이한 이름의 복합쇼핑몰인데 옷 가게부터 극장까지 온갖 것이 다 있었다. 먼저 들른 것은 거대한 오락실이다. 이 곳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인형뽑기 기계들로 가득 차있으며 포켓몬스터 대전액션 등 진기한 게임 머신 등을 이용해볼 수도 있다. 괜히 돈쓰지 말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그 외의 전자제품 등을 이것 저것 구경한 후 다리가 너무 아파 주저앉아 있는데 밖에 비가 오기 시작하는 거였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전에 산 바나나를 먹었는데 아무래도 우산을 사야겠지 싶었다. 몇 천엔씩 하는 고가의 우산들을 제끼고 200엔이 좀 넘는 비닐우산을 샀다. 그걸 쓰고 다시 오모로마치 역으로 가서 유이레일에 탔다. 이제야 숙소로 가는구나 했는데…
갑자기 김 선생님이 무슨 시장을 보러 가자는 거였다. 더 걸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려다가… 모처럼이니 나쁘지 않겠다 싶어 아사토 역에서 내렸다. 여기에는 사카에마치 시장이 있다. 전쟁 직후에 만들어졌는데 아직 현대화 되지 않았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는 계획이었는데 거의 3바퀴나 돌았으나 언어가 안 되기 때문에… 도전할만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 대신 인상깊은 장면들을 많이 봤다. 밤이었기 때문에 대개의 점포들은 문을 닫았고 작은 선술집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대개 중년 남성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으며 개중에는 전자기타와 작은 북 같은 것으로 고전적인 노래를 연주하는 집도 있다. 간판에 ‘블루칼라’라고 쓰여있는 집도 있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블루칼라(ブルーカラー) 가 아니고 풀컬러(フルカラ)다. 어쩐지 이름이 전색주점이더라.
거의 뇌활동이 정지될 정도로 지쳐서 이 다음에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유이레일을 타고 미에바시 역에서 내렸거나, 아니면 걸어갔을 것이다. 하여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미에바시 역 근처의 작은 소바집에 있었다.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듯 했다. 김 선생님은 야채소바를, 나는 소키소바를 주문했다. 500엔짜리 생맥주도 주문했으나 할머니는 600엔짜리 오리온 병맥주를 갖고 왔다. 할머니가 병으로 먹으라는 건지 병 밖에 없다는 건지 그런 말을 한 듯도 했다. 야채소바는 야채를 볶은 후에 오키나와식 소바에 얹은 모양새다. 소키소바는 원래 뼈가 붙은 갈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삼겹살이 얹혀서 나왔다. 가격이 싸니까 그냥 먹었다. 기대했던 소키소바는 아니었지만 맛은 있었다. 고깃국물과 가쓰오부시 국물이 적당히 섞였고 간장이 들어갔다. 이 동네 소바는 메밀이 아니라 밀가루로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꼬들꼬들하다. 미군의 흔적이다.
이후, 잠시 서점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드디어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로 복귀했다. 7사람이 잘 수 있는 이른바 도미토리에 묵어야 한다. 마비된 다리를 간신히 제어해 부들부들 떨며 2층침대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하고 씻는 동안 김 선생님은 맥주 아니 발포주를 사왔다. 술을 마시는 동안 기력을 회복했다. 술이 떨어져 편의점에 가서 생햄과 치즈, 에비수를 샀다. 편의점의 생햄은 정말 대단하였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이날 걸은 걸음 수는 3만5천보 이상, 거리로 따지면 26킬로미터 정도였다.
살이 몇킬로 빠졌나여
안빠졌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