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부류는 이런 혐오를 하고 저런 부류는 저런 혐오를 하고, 우리는 혐오를 하지 말아야 되고… 이런 설명은 대개 어떤 규범을 논하는 걸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분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엊그제 글쓰기 수업 시간에 한 얘기인데, 여성주의를 말하면서 트랜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 하는 것은 그냥 어떤 이상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시대정신이다. 명분을 기만적으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적이해관계의 득실로 세상만사를 번역하는 세계관이다.
트랜스 여성인 게 문제라는 인식의 핵심 뼈대는 그 존재가 사익추구를 위해 가짜-성별이라는 걸 통해 만든 명분을 뒤집어 쓰고 ‘우리’가 확보한 ‘이익’에 ‘숟가락’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게 세계관이라는 뜻이다. 안전이든, 학벌이든, 아니면 어떤 혜택이든… 이 세상은 오직 이해관계라는 세계관이란 거다. 여기서 이익을 공유하는 주체가 늘면 늘수록 개별 이익은 감소한다. 이게 여기서는 여성주의를 말하면서 저기서는 트랜스 여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을 일관적으로 설명하는 단 하나의 틀이다.
이런 세계관에서 투쟁이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진정한 여성’의 허들을 끝없이 높이면서 ‘이익’을 공유할 대상을 반복해서 줄여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랜스 여성, 기혼 여성, 쓰까페미? 흉자? 등등… 집회에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투쟁에 참여한 사람만이 이익을 얻을 자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돈을 많이 버는 것 뿐(능력!)이란 주장도 이 세계관에서는 그래서 당연한 거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투쟁은 ‘우리’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에게 있어서 여성주의적 투쟁은 만인을 대상으로 한 만인의 투쟁이고 그것은 곧 각자도생이다.
각자도생은 명분과 대의를 기만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냉소적 세계관의 결론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분절된 세계를 다시 하나로 통합해 총체적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정치라고 부르고… 이제 여서부턴 지겹지? 맨날 하는 말… 그냥 수많은 똑같은 일들의 반복이라고 이게…
물론 그냥 집에 있는 내 생각이지. 난 종종 여기서 이러는 나도 SNS인지 뭔지에서 열심히 지적질 하는 여러분도 어떤 부분에선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남을 지적할 자격이 없다거나 닥치고 있자는 얘기가 아니지. 그게 우리의 조건이라는 거고,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좁은 집의 가구 배치도 바꾸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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