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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커버스토리] “당신들의 그 길을 그냥 쭉 가라”
2010 02/02ㅣ위클리경향 861호

 

ㆍ뉴진보에게 거는 기대, 이전 세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Weekly 경향> 편집진으로부터 ‘뉴타입 진보에 대한 정통좌파의 충고’라는 제목의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적절한 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결국 글을 쓰게는 됐지만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왼쪽부터 우석훈 교수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김민하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 허지웅의 <대한민국 표류기>.


우선 ‘뉴타입 진보’라는 분류 자체에 대해 여전히 선뜻 공감이 안 간다. 두 번째 내가 ‘정통좌파’인지 잘 모르겠다. <Weekly 경향> 편집진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 정서로는 오히려 ‘뉴타입 진보’로 분류된 사람들 쪽에 가깝다. 세 번째 이른바 ‘뉴타입 진보’에 대한 ‘정통좌파’의 ‘충고’는 정말 가당치 않은 짓이다. ‘충고’는 오히려 ‘정통좌파’ 쪽이 들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원고를 쓰겠다고 한 것은 애초에 ‘충고’를 위해 마련한 지면이라 하더라도 ‘뉴타입 진보’라는 주제와 관련해 이 지면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편집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이 글은 ‘충고’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 됐다.

 

사실 진보 앞에 ‘새로운(新, 뉴 또는 네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 자체가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 지속되는 만큼 진보 역시 세대를 달리하면서 그 횃불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의 성과가 어중간한 성공 또는 대체적인 실패로 끝나고 나면 이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언어와 습성으로 무장한 새 세대가 등장하곤 했다. 그리고 이 교체의 순간마다 이전 세대는 새 세대의 등장을 기대보다 의심에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우리 시대 20대~30대 초반 진보 논객의 등장을 ‘뉴타입 진보’로 분류하는 시선에서도 이러한 낯설지 않은 장면의 반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구세대의 분류법에서 자유로워야


‘뉴타입 진보’의 특성으로 분류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새 세대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런 분류법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것, 즉 이들의 거울 영상일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회한이 있고, 선망이 있으며, 그러한 정념을 타자를 통해 표출하고자 하는 삐뚤어진 투사(投射)가 있다. 말하자면 ‘뉴타입 진보’에 대한 서술의 상당수가 이들 자신의 목소리에 기반한 것이기보다는 사실 구세대 좌파의 병리학일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세대가 이런 구세대의 덫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타자의 시선에서 비롯된 명찰과 딱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구세대의 분류법에 호응해 그 틀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항상 구세대라는 거울만 쳐다보는 어리석음에 빠져들 수 있다. 386세대가 20대를 탓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게도 20대 역시 항상 386세대를 탓하면서 세월을 허비하게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구세대의 낡은 과거 시간이 새로운 세대의 미래 시간마저 납치하고 짓밟는 최악의 폭거가 될 것이다.

 

나는 이른바 ‘뉴타입 진보’에게 단 하나의 ‘충고’만 해 줄 수 있다. 당신들에게 ‘충고’라는 걸 하려 드는 사람들의 어떠한 ‘충고’도 듣지 말라고. 과거 세대가 쟁취한 것, 실패한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은 당신들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누군가로부터의 ‘충고’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실 당신들은 벌써 잘해 나가고 있다. 나는 ‘뉴타입 진보’로 분류된 이를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이들이 생산한 글이나 책들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민하나 한윤형 같은 저자의 열렬한 애독자다.

 

이들 저자는 이미 몇 가지 대목에서 괄목할 성취를 이뤄가고 있다. 첫 번째 이들은 과거에 짓눌리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작업 재료로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인용이나 패러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전 세대의 성취와 한계를 헤쳐 나가면서 새로운 지평을 찾는, 더욱 어려운 도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선배들 구호와는 차원이 다른 ‘외침’


예를 들어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보자. 그는 1980년대 민족주의·민중주의 이데올로기의 맹점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뉴라이트의 극우 수정주의 사관을 솜씨 있게 무장해제시킨다. 이것은 글발로만 될 일이 아니다. 제 눈으로 역사를 읽고 그로부터 다시 우리 시대를 읽는 안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이들은 과거에 짓눌리지 않는 꼭 그만큼 좌파의 익숙한 구호들로부터도 자유롭다. 말하자면 ‘노동계급’이니 ‘반미 자주’니 하는 구호에 강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에게도 결국은 새로운 구호가 필요하리라는 사실 자체를 눈치 채지 못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민하가 자신의 책 제목을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라고 달았을 때 ‘레닌’이라는 상징을 통해 환기하려 한 것도 바로 이런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구호를 무작정 따라 외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설령 과거의 구호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자기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고민을 거듭하는 데서 출발하려 한다. 그래서 김민하는 밴드 활동도 했다가 공장에도 들어갔다가 게임에도 빠져 지내다가 노동조합 상근자로 박박 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그때 확인한 결론에 따라 진보신당 활동을 하기도 하고 책도 쓰고 ‘레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입에서 나온 ‘진보’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들은 선배들의 구호를 흉내내는 것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이런 외침은 결코 쉽게 움츠러들거나 포기될 수 없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이미 세계인이다. 386세대도 과거 세대에 비해 그렇기는 했지만 이들은 386세대보다도 더 ‘서구’에 주눅 들어 있지 않다. 유럽이나 미국의 최근 흐름도 이제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의 대화 상대일 뿐이다. 아직도 북한이든 어디든 어느 외국의 정전(正典)을 떠받드는 사람들이나 사회민주주의를 ‘선진문물’로 칭송하는 사람들과는 단순히 나이 몇 살 차이를 떠나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의도치 않은 자식들이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비로소 한국 토양에서 꽃 피는 보편성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어줍운 ‘충고’ 말고 내가 이들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당신들의 그 길을 그냥 쭉 가라. 나도 그 동반자가 되고 싶다.”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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