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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커버스토리]진부한 진보는 가라, 진보의 진화
2010 02/02ㅣ위클리경향 861호

 

“진보에 대안이 없다.”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벌써 오래된 화두다. 대안 부재의 위기의식은 벌써 2년 전 17대 대통령선거 당시에 폭발했다. 새로운 리더십도 형성되지 않고 있다. 사망한 두 전직 대통령, 좀 더 직접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훈을 남긴 ‘진보주의’를 화두로 연구가 진행된다지만 로드맵은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지도부 없는 거리행진’으로 특징지워지는 2008년 촛불시위는 배후론을 주장하는 정부나, 기성 진보운동단체 모두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2008년 6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이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막히자 즉석에서 ‘시민악단’의 북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정지윤 기자


‘진보의 대안부재’는 한국적 상황으로 보인다. 관점을 달리하면 ‘진보’의 외연은 넓어진다. 전 세계적 견지에서 ‘진보’는 확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진보적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이 당선됐다. 지난해 일본에선 54년만에 보수우익 정치가 몰락했다. 전 세계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모임인 다보스포럼에서는 벌써 수년째 ‘사회환원과 책임’이 화두가 되고 있다.

 

최고의 혁명가는 샤넬?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빌 & 맬린더 게이츠재단에 기부 약속을 한 워런 버핏의 행위는 진보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회지도층의 자선·기부 행위 역시 진보다. 최근에 출간한 신작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우석훈 교수는 “당신이라면 최고의 혁명가로 누구를 꼽겠는가”라고 물은 뒤 “나라면 주저없이 1971년에 죽은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린 가브리엘 샤넬을 꼽겠다”고 자답한다. 샤넬은 단순히 명품 브랜드가 아니다. 샤넬은 여성의 몸을 옥죄던 페티코트와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켰고, 장식을 배제한 활동성 높은 옷 이라는 ‘샤넬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우석훈은 자신이 88만원세대로 명명한 ‘20대’들 속에서 샤넬 같은 혁명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386세대를 비롯한 기존 세대에서 새로운 혁명가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 “가슴속에서 여전히 1980년대를 놓아주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너희가 혁명을 아느냐!’고 잘난 척하는 ‘꼰대’들 속에서 샤넬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 아닌가.”


 

우석훈 교수는 여성의 몸을 옥죄던 페티코트와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코코 샤넬을 최고의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코코 샤넬의 활동복 스케치. | Channel


한국에서 진보주의, 진보운동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학계에서는 길게는 분단과 한국전쟁, 짧게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원으로 보고 있다. 자주와 평등이라는 거대 담론은 한국진보운동의 오랜 화두다. 1980년대, 386세대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이라는 ‘혁명이론’으로 이 이념들을 구체화했다. 다시 현재. 이명박 정부 집권 1년차에 벌어진 ‘촛불시위’의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촛불’은 어떤 의미인지, 당시 ‘촛불’을 매개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현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논의가 분분하다.

 

“최초의 시작은 10대였다.” 한윤형은 ‘우리는 왜 무력한 촛불이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촛불시위의 진행 양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위에 나온 10대들에 대한 진보적 포지션의 386세대들은 집단적으로 환호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20대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초기에 대한 분석에 해당되거나 일면적인 해석이다. 과거 1980년, 1990년대와 같이 과 학생회나 노동조합 깃발 아래 있지 않았을 뿐이다. 20대는 깃발 없는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내내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한윤형의 주장에 따르면 “20대는 자신이 해 본 유일한 집단적인 짓거리, 월드컵 거리 응원 방식으로 거리에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시 30대. 시위가 장기화되고 조직화됐을 때 30대 말과 40대 초반의 386과 포스트386세대는 ‘전대협’이라는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왔다.

 

‘2008년 촛불’의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지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허지웅씨는 “그후 이명박 정부도 대중문화의 중요성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방송과 미디어,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파상공세가 그 증거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반 정책은 대중문화 전반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들의 가치관에 편향된 ‘보수적 대중’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우려되는 것은 대중의 기억이 왜곡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마치 한때의 치기처럼, 어린 시절의 방황으로 2008년 촛불의 경험이 기억되진 않을까.”

 

촛불시위 ‘기억’을 둘러싼 싸움


1월 20일 법원은 광우병 보도와 관련해 명예훼손및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MBC 수첩> 제작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정부는 ‘2008년 촛불’의 배후에 이 보도가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촛불’의 당사자들 기억은 다르다. 의 보도가 하나의 기폭제 내지 방아쇠 역할을 했을 수는 있지만 온·오프라인의 크고 작은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토론과 자발적 참여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2008년 촛불’에 나온 군중은 지도부를 거부하고 불신했다. 교조적인 386세대와 이명박 정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통적인 좌파조직 이론에서 지도부 없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봉착한다. 이런 사고의 이명박 정부식 버전이 ‘·좌파 배후론’이다. 양자 공히 왜 클래식을 듣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왜 영화비평 모임이나 화장법·성형 관련 커뮤니티가 촛불시위의 ‘지도부 없는 중심’이 됐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는 말한다. “1980년대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읽는 책이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분들 서재에 가 보세요. 어디를 가도 비슷한 책이 꽂혀 있을 겁니다. 저는 이것을 정치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정치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386세대의 시각에서는) SF를 보면서 ‘무슨 정치화?’라고 반문할 겁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정치화를 가져온 또 하나의 이유는 온전한 보수의 부재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상식적 합리’가 판단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좌파적 시각이나 이론에 기반한 촛불시위가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 집권 1년차에 벌어진 ‘촛불시위’의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촛불’은 어떤 의미인지, ‘촛불’을 매개로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현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논의가 분분하다. |남호진 기자


 

 

MBC ‘PD수첩’ 제작진 무죄 선고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정부는 ‘2008년 촛불’의 배후에 ‘PD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조능희 CP(가운데) 등 ‘PD수첩’ 제작진이 지난 1월 20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광우병 보도에 대해 무죄 선고가 내려진 뒤 법정을 나서며 선고 결과에 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강윤중 기자


‘정치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정치화’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한국적 특성을 띤다. 촛불시위 이후 사회당에서 ‘오타쿠위원회’가 결성됐다. 애니메이션과 진보정치의 결합이다. 논점은 일본 사회에서 대체로 보수우익으로 기우는 ‘오타쿠 문화’가 왜 바다 건너 한국에 와서 진보와 어떻게 접맥이 될 수 있는지였다. 논쟁은 치열했다. 사회운동 영역에서 ‘증강현실’은 이미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났다. 집에서 모니터로 촛불시위 생중계를 보던 한 누리꾼의 제안에 따라 온라인 결제를 통해 수천만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실시간으로 김밥과 물은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 참여자들을 통해 광화문의 대치선으로 전달됐다.

 

정치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정치화


촛불시위 당시 한 장의 사진이 주목을 끌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날씬한 여성이 물총으로 까나리액젓을 전경에게 쏘는 모습이다. 1990년 영화 <파업전야>에서 여성노동자의 몸을 훑는 카메라의 시선을 비판하던 시각으로 보면 이건 진보운동 담론의 가치가 아니다. 그러나 촛불시위 참가 당사자들은 환호했다. 성형이나 화장은 기존 진보담론의 빈 공간이었다. 새로운 진보의 담론은 이미 온라인 공간을 매개로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종전의 진보와 확연히 구분된다는 측면에서 뉴타입진보다. 그러나 뉴타입진보의 내용이나 경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경향>이 인터뷰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누리꾼들은 뉴타입진보를 대표하는 리더나 영웅이 아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진보의 재구성이나 거듭남의 방향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새로운 종류의 진보의 전형성을 보여 주고 있다. <키보드워리어전투일지>의 저자 한윤형은 1990년대 후반부터 ‘아흐리만’이라는 온라인 필명으로 더 유명했다. 역시 키보드워리어이자 오타쿠이던 김민하가 ‘커밍아웃’하게 된 계기는 딴지일보와의 만남이었다. 허지웅씨는 블로그 같은 온라인 공간이 ‘연단’이었다고 말했다. 온라인 공간의 의미에 대해 그는 되묻는다. “온라인이 없었다면 과연 조직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촛불집회가 가능했을까요?”

 

뉴타입좌파의 세력화는 가능한가


사실 온라인 공간을 매개로 발언하고 실천하는 개인들을 새로운 종류의 진보로 볼 수 있는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인터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 자신의 의견을 건네고 주장하는 현실 대부분은 뉴스에 나온 것을 두고 이야기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외연을 넓게 잡은다면 진보 또는 좌파라고 볼 수 있지만 엄밀하게 규정한다면 온라인 공간의 ‘자유주의적 여론선동가’라는 지적이다.

 

전망에 있어서도 이들은 정치적으로 세력화한다든가 조직화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토론을 통한 일시적 합종연횡만 있을 뿐이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일부 조직화된 부분은 비정규직 지원이나 용산, 언론소비자운동으로 나갔지만 정치세력화 또는 정당화를 시도한 흐름은 거의 대부분 실패했다. 그러나 정당운동 견지에서는 진보의 역사가 아직은 태동기이기 때문에 속단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재영 인터넷 언론 레디앙의 기획위원은 “1997년 민주노동당을 진보정당의 시작으로 보면 아직 채 15년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럽식 정당정치가 아직 한국에서는 꽃피우지 않았다는 의견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기존 진보의 고민이다. 이미 새롭게 형성된 ‘뉴타입진보’는 앞으로 어떤 행보를 걸을 것인가.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한국의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 나가리라는 것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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