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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Author: 이상한 모자

팔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2021년 2월 4일 by 이상한 모자

오늘 중앙일보 이정재 씨 글을 보고 한 생각.

내가 옛날에 덤프트럭 아저씨들이랑 일을 할 때,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아저씨들이, 남북통일이 절실하다는 얘길 자꾸 하는 거다. 이게 왜 이러지 이게 아닌데… 알고보니 조직에 들어온 자주파 성향 상근자가 통일되면 북한에 개발을 해야 되고 그러면 덤프 일거리가 아주 많다고 했다는 거다.

이게 먹히는 거야. 알겠어? 남북통일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그동안은 반대한다고 했어. 근데 실생활의 문제로 오면 솔직히 다 그런거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는 거야. 남북통일이 어쨌든지 남의 일이고 돈! 먹고 사는 문제!

원전 이거 마찬가지라고. 남북관계가 개선이 된다? 뭐 상관없어. 원전만 할 수 있으면 되지. 북한에 원전을 건설하라! 탈원전은 잘못됐다! 그러다가 다시 오늘날에 이르면… 탈원전이라면서 북한에 원전을 지어준다니! 이 얘기를 왜 탈원전을 안 하냐로 가면 나는 맞는 비판이라고 본다. 근데 아니잖아. 이게 뭐냐 도대체?

이러고 있는데 이정재 씨가 정답을 제시했다. 북한에 원전을 지원하고 싶다면, 탈원전부터 바꾸자! 그러니까 이적행위는 핵심이 아니지 지금… 아 너무 웃기다 진짜.

이해를 못할 듯 하여 이정재 씨 글을 부분 인용한다.

대북 원전 지원은 할 수 있다. 다만 두 가지 전제가 꼭 필요하다. 북한의 비핵화와 한국 원전 산업의 발전이다. 이 둘이 충족돼야만 명분과 실리가 생긴다. 보수 정부 시절엔 이런 전제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결이 다르다. 대통령은 언제부터인가 북한 비핵화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화’만 말한다. 남북 연락사무소가 폭파당하고, 서해에서 공무원이 사살돼도 ‘대화’만 말한다. 그러니 북한 비핵화 의지에 대해 국민의 의구심만 커진다.

두 번째 전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원전은 안전하지도 않고, 저렴하지도 않으며, 친환경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그래 놓고 이듬해 체코 총리와 만나 “한국은 지난 40년간 원전을 운영하면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며 세일즈를 했다. 원전에 대한 대통령의 말이 이 때 다르고, 저 때 바뀌니 국민이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원전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교두보로 안성맞춤이다. 한반도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정치적 진실 공방으로만 흐르면 이 정부는 물론 다음 정부도 원전 카드를 잃게 된다. 결국 한반도는 원전도 평화도 잃고 말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출발점에 탈원전이 있다. 탈원전은 탄소 중립과 미세먼지 해결을 어렵게 하고 일자리와 미래 먹거리를 파괴한 주범이다. 급기야 이젠 대북 원전 지원마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리더의 잘못된 비전이 부른 후과(後果)가 이리도 무겁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결단할 때다. 차라리 이참에 북한 비핵화+대북 원전 지원+탈원전 폐기의 3종 세트를 공개 선언하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면 어떤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탈원전

능력주의와 반지성주의와 계급론

2021년 2월 4일 by 이상한 모자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20120131321209

지금보다 좀 더 젊고 기운이 넘쳤던 시절에 계급 문제의 인식 폭을 넓히게 된 계기는 김선생님이 에릭 올린 라이트(명복을 빈다)의 계급론과 폴 윌리스의 저서를 소개해준 거였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해머타운의 싸나이들(lads)은 성차별주의자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인다. 폴 윌리스가 여기서 발견한 것은 이들이 공교육에 저항하며 주체적으로 노동계급문화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사회적으로 계급이 재생산되는 중요 요인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이건 영국처럼 계급적 분화가 분명한 사회 조건에서의 얘기고, 다른 조건이면 또 달랐을 거다. 가령 오늘날의 미국이었다면 이들은 백퍼센트 트럼프 지지자가 된다. 지금 영국에선 아마도 브렉시트… 아무튼 그래서 반기득권적 문화 즉 저항이 어떤 긍정적 적극적 대안적 방식으로 조직화될 수 있느냐,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숙제이다.

가령 반지성주의를 말하지만, 반-지성의 ‘지성’은 뭘 말하나? 과학… 백신 왜 안 맞냐? 백신을 둘러싼 일련의 과학적 지식과 체계가 ‘우리’가 아닌 ‘엘리트’의 것이기 때문에(물론 나는 백신-자본은 의심하지만 백신-과학을 신뢰한다) 냉소주의적 접근, 그러니까 의심을 하는 거다. 그게 프랑스 같이 똑똑한 사람들 모여있는 데서도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는 이유다. 이런 맥락을 따져보면 사실 반지성주의라는 명명 자체가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다. 호스스태터는 1955년에 ‘개혁의 시대(The Age of Reform)’를 썼는데 거기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미국 민중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의 핵심은 그의 주장대로 ‘반지성’이 핵심이 아니라 반기득권적 저항과 ‘대안부재’의 만남이다.

극우포퓰리즘은 여러차례 얘기하지만 반기득권적 저항을 ‘거짓 대안’과 짝지은 결과물이다. ‘거짓대안’은 사회적 코드로서의 껍데기 뿐인 자유주의,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 특정 계층이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합을 다시 한 번 퇴행적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좌파는 ‘대안부재’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권력을 잡았을 때는 (전후사정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기성 해법을 답습하고, 권력을 잃었을 때는 반기득권적 저항만을 관성적으로 주장하면서 극우포퓰리즘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진짜 대안’은 좌파-엘리트라고 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 모두가 모여 만들어 가야 하고, 그러면 모두가 모여 만드는 방법이란 뭐냐가 핵심이다. 그게 칼 폴라니든지 심의민주주의든지 참여계획경제든지 참여소득이든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합의하고 그 청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그게 장기적인 정치적 기획이 돼야 하는데, 한 발도 나아간 바 없다. 우울해지니까 그만 합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포퓰리즘, 능력주의, 반지성주의

규범화

2021년 2월 3일 by 이상한 모자

다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모든 논의가 지켜야 할 일과 아닌 일로 귀결돼 도식화 되는 세태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에 정의당 김종철 사건에 대해 방송에서 얘기를 하는데, 진행자가 일이 일어난 곳이 실내가 아니라 실외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거였다. 거슬렸다. 그게 중요한가? 진행자는 성폭력이란 말을 성추행으로 정정하려고 하기도 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한 마디 했다. 가령 박원순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이란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더냐… 성폭력이란 범주는 너무 넓으니 성추행으로 명명하자 라는 게 그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옳은 얘기일 수 있으나 실내가 아니고 실외란 말과 결합된다면 그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뭐라고 부를 거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게 어떤 맥락이냐는 게 중요하다.

피해호소인이란 단어가 처음에 등장한 맥락은 ‘피해자 지위 박탈’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에 박원순 사건 당시 여당이 올바른, 또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단어를 썼다면 나름의 설명이 가능했을 거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중에야 밝혀진 거지만 자기들끼리 모여서 실제 피해 사실의 소극적 부정을 목적으로 이 단어를 쓴 게 사실이란 것도 드러났다. 피해호소인이란 단어가 맞냐 틀리냐가 아니라 이 맥락이 문제인 것이다. 얼마 전에 정춘숙 의원도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민주당에서 피해호소인, 2차 가해 문제, 피소사실 유출 논란이 있었다. 정 의원은 피해자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데.

“피해호소인 문제는 많이 아쉽다. 이번 사건으로 어느 정도의 젠더 감수성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피해호소인이라는 건 원래 있는 말이었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냐의 문제가 있었다. 피해호소인이 문제가 된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느낌이 다르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지 잘났다는 듯 떠들 문제가 아니지만 떠들고 쓰고 하는 일로 먹고 살기에 지난 주에 잡지에 사건에 대한 글을 보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9880.html

그랬더니 편집장에게 전화가 왔다.

잡지에 보낸 글에 대한 수정 요청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자기 맘대로 바꿔놓고 일언반구도 없는 경우다. 그런 편집장도 있었다. 일본에 대한 얘기였는데, 나중에 보니 글의 핵심 줄기를 바꿔 놓은 것이다. 항의를 했더니 “내가 특파원을 3년 반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더 잘 아는 문제이니 외부 필자 글을 멋대로 수정한 것도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는 안 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시간이 너무 없어 급해서 그랬다든지 뭐 하여간 둘러댈 말은 많지 않나? 어떻게 외부 필자에게 ‘너보다 많이 아는 내가 볼 때, 네 얘긴 틀렸고 그래서 고쳐줬다’는 취지의 얘길 당당하게 하지?? 저도 작은 매체이지만 편집장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외부 기고도 많았고요. 비문이나 맞춤법을 고친다든가 한 일은 있어도… 하여튼 기이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서… 내가 보낸 글은 절대 고칠 수 없다 고쳐선 안 된다, 이런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걸 먼저 분명히 하고. 편집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말을 했는데, 고발과 수사에 대한 대목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아예 빼달라는 거였다. 그건 곤란했다.

이런 얘기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고발의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그게 부적절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공당이기 때문에 ‘선한 의도’의 고발도 있을 수가 있다. 어떤 지지자가 관음증적 시도가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정당 대표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용서가 안 되니 고발하겠다는 식의 주장도 나올 법 하다. 공당은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고발은 안 된다’는 규범화는 필연적으로 친고죄 얘기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건 익히 알듯 함정이다. 사건의 맥락에 따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수사기관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사건이 그 맥락이 아닐 뿐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형사고발을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상의 얘기를 해야 한다. 공중파에서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변호사의 멋진 글도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런 거다. 왜 고발과 수사와 재판은 반드시 2차가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그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무튼 그런 취지를 설명했고 표현의 수위를 적당히 다듬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장혜영 의원이 KBS 인터뷰에서 말씀을 잘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지켜야 하는 어떤 규범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건의 맥락 속에서 바람직한 해결 방식을 함께 찾아갈 것을 요청하는 정치가 중요하다.

“물론 일각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생각할 때 , 가해자를 명확하게 형사고발해서 법적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견해에도 일견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저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는 길에 있어서 형사고소를 진행하는 것이 저에게 가져다 줄 여러 가지 고통들, 쏟아질 2차 가해와 여러 가지 관심과 끝없이 제가 당한 피해들을 소명하고 설명해야 되는 이 절차들을, 그 지난한 재판 과정에서 겪어야 되는 고통을 제가 겪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형사고소의 단계를 진행하지 않은 것이고, 당도 피해자인 저의 마음과 저의 결정을 존중해서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점을 함께 이해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김종철, 장혜영,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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