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필요없다] 독서 후기

조회 수 1719 추천 수 0 2011.11.30 22:09:51

이 책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진보세력 내부에서의 성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극복 시도들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다. 부제는 비록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이지만 여기서 "진보"는 주로 학생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가부장제"는 성소수자보다는 생물학적/사회적 남성/여성 간의 차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제한성은 인터뷰이의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던지고자 하는 쟁점, 권위주의와 차별에 대항하는 집단 자신 역시 저항대상의 논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목적의식에도 기인한다.

우리 독서회는 총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1회 독서회는 참가자들이 이 책의 경우들과 중복되는 자신의 사례와 경험들을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항상 컵을 씻는 여성들, 외모꾸미기에 대한 아니꼬운 시선들, 더 큰 문제틀 뒤에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젠더차별, 마치 이야기만 하면 전체 운동/담론의 진행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의견들 등등.

한 참석자는 요즘은 이런 담론 자체가 일반화되어서 그런지 좀더 가부장제라는 것이 교묘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으면 가끔 자신도 성차별 문제가 정말 중요한 것인지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고 했다. 전희경의 말을 빌어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흡수와 포함' 논리가 약화되면서 좀더 세련된 형태로 등장한 '후원자 노릇' 전략으로, '여성, 환경, 장애 등 다양한 적대'라는 수사를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다른 목소리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동원'하려는 시도다. (...)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학생회 선거에 교육, 환경, 여성, 인권, 장애, 성정치 등의 이슈들이 마치 패키지처럼 단골로 언급되기 시작했고, 이 이슈들 사이의 관계는 '진보운동(좌파운동)'이라는 큰 틀 속에서 '대등한 연대'를 이루자는 슬로건으로 정리됐다."(207쪽)

우리는 지금 이 책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아마 더 늘어났으면 몰라도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진지한 문제제기나 고민거리보다는 "응 그래 그래 알았어 우쭈쭈"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성가시고 무엇보다 '김빠진' 쟁점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참고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유효한 지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 책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화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희경은 운동권 내부 업무의 분업이 성차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운동권 내 분업은 객관적 능력과 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자는 중요한 일이 어울리고, 여자는 이걸 뒷받침하는 일이 어울려"같은 식의 편견에 기초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객관적 능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편견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사용되었다고 그녀는 본다.

참석자 중 하나(남성)는 이런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이를 정확히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을 있다고 토로했다. 이를테면 어떤 직장에서는 컴퓨터로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은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마무리 작업을 맡기기가 어렵다. 실제로 일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마냥 기다려 줄 수도 없으며 일의 완성도 역시 격차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물을 수가 없는 것이 여성이 기계와 친하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젠더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일을 여성에게 맡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해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가나 회사 차원의 여성 대상의 컴퓨터 특강?

2회 세미나에서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책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른 참석자(여성)는 어떤 사태를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누군가를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역으로 폭력의 행사일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가해자 엄벌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불렀다. "우리가 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현실적 마초다" "내가 고통받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폭력이다"는 식의 논의. 자신의 주관적 고통을 절대화하여 정치적 올바름과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형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을 하면서 동시에 수긍하는 데 곤란함을 느꼈다. 왜냐면 남성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동의는 "그래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 여자야"하는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유혹은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작거나 큰 형태로 이어져 왔다. 1회 세미나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 책에 대한 동일시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물론 이런 동일시가 외면으로 이어지는 것에 주의하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연기하면서) 지인의 피해자중심주의 비판을 은밀하게 참고해 왔었다. 이런 과정에서 잊혀지게 되는 것은 내가 실제로 가부장적 편견에 기초해 타인에게 주었던 편견,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이를테면 전희경이 이 책에서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운동(이나 좀 더 큰 일)의 전진에 해가 된다"는 논의는 현재의 학생운동 집단에서 앞서 말했듯 좀더 교묘한 형태로, 그리고 주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같은 경우에는 내 타임라인 상의 지잡동이라는 집단의 일부 회원들 사태같은 예가 이에 해당했다. 성폭력에 대한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이들은 자신이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이런 자잘한 문제제기들 때문에 자신들의 "대의"가 무시되고 있다고 분노했다. 한 논평자는 이 사태를 보며 "유능한 활동가"가 매장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이들이 동원했던 프레임이 바로 앞서 말한 '가해자 엄벌주의'와 흡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나르시즘에 기초한 가해자라는 낙인 찍기. 그렇다면 앞서 그 참석자가 말한 맥락은 틀린 얘기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백한 말', 어떤 상황에서 쓰이든 정당한 말을 찾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옳은 상황이 있고, 가해자라는 낙인을 문제시삼아야 되는 상황이 있다. 말의 옳고 그름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말이 쓰이는 맥락에 근거한다. 나와 같는 남성이 '가해자 엄벌주의'에 대한 프레임에 공감할 때의 위협 역시 이런 부분에서 등장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듣는 사람의 위치.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수반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고도의 도덕적 긴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맹목일 수 있음을 이해하기.

이런 것들을 [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에 남성 참석자로서 2회 참여하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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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 커뮤니티에 달아주신 이브리님의 덧글을 옮겨옵니다.)


<작성자 : 이브리>


닉네임 님이 전에 지적하셨듯이 '피해자의 나르시시즘' 을 경계하고 피해자로 자신을 재연하는 대신에 주체가 되어라, 라는 식의 이론적 유행(혹은 운동권 내의 담론??)이 몇년 간 있었는데요. 귀담아 들을 만한 지적이지만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솔직히 말하면 미심쩍을 때가 있습니니다. 실제로 피해자 나르시시즘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저는 왜 주체가 되지 못하냐고 채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소수자' 들을 피해자의 위치에 묶어놓는 이중적인 태도도 종종 보인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본인은 여성주의에 충분히 공감하고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글쎄요. 몇몇 사안에 여성주의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고 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반성하거나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공부하거나 하는 노력 없이 개론서 몇 권과 주디스 버틀러 책이면 여성주의를 다 이해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게 아닌지.(생물학적 남성분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고 여성분들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라 생각합니다)


희생자의 편에 서는 것, 그러니까 성폭력에 분노하거나, 여성노동자가 받는 차별대우에 항의하거나, 심지어 억압적인 '가부장제' 의 폐혜에 개탄하는 것은 사실상 굳이 여성주의를 동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희생된 약자는 그 자체로 강력한 윤리적 요청이니까요. 그런데 '부당한 억압에 항거한다' 정도의 공감으로 자신이 완전히 여성 입장에 섰다고 오해할 때 오히려 당사자를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약자에게 '연대한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이런 구도는 본질적으로 동등한 연대보다 오히려 시혜적 구도에 가깝고, 따라서 그런 지형에서 여성주의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개인이 당한 피해를 최대한 강조해서 보여주는 게 된다는 점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피해의 전시로 공분을 이끌어낸 후에는 엄벌주의로 귀결이 되겠죠. 



이와 관련해서 트위터에서 뭔가 소수자 관련 쟁점과 관련해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좌파 진영의 어떤 태도를 운동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강박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관련된 일종의 운동권 품성론처럼 해석한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런 해석은 페미니즘이 운동권의 초자아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겠죠. 

여담이지만 저는 최근에 트위터 상에서였나, 페미니즘이나 장애인 운동 등등을 관련해서 '초자아'라는 단어를 몇번 보았는데 거기서 나타나는 태도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초자아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여성주의든 다른 소수자 담론이든 그것을 '초자아'로 지칭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다른 '주체' 들의 서사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채 여전히 자신-혹은 주류-를 중심에 놓고 자신의 입장에서 타자를 어떻게 수용하고 평가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언설이 아닌지.

어쨌든 완전히 틀린 서술은 아닐지라도, 그런 관점은 이 책과 서술되었듯 여성 활동가들이 운동권 내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이어 왔다는 사실을 아예 삭제해 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 맥락이 삭제되고 나면 '품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좌파들이 자신들의 도덕강박을 만족시키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여성주의 문제들을 받아들였다' 이런 류의 서사가 탄생하게 되는데, 여기서 여성은 다시 한번 투쟁이나 요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주변화되죠. 여성주의가 운동권 내에서 엄청난 힘을 소진해 왔는데도 이런 정도의 타협밖에 얻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참 씁쓸하더라고요.

그래서, 여성주의를 하나의 저항이론이자 동시에 여성성을 발굴하고 표현해 내는 생산적인 담론이 아니라 약자 보호를 위한 일종의 도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때 결국 '피해자의 나르시시즘' 은 벗어나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참석자가 아니지만 좋은 글을 본 김에 평소에 고민하던 것들을 모자란 형태로나마 덧붙여 봅니다. 말하기 어려울 수 있는 지점까지 드러내 주신 덕에 더 곰곰히 새겨볼 만한 글이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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