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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지난 몇 년의 정치적 봉기들 속에서 출현한 가장 숭고한 이미지는 - 여기서 "숭고한"이라는 용어는 가장 엄밀한 칸트적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 의심의 여지 없이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를 폭력적으로 타도했던 시기에 찍은 유일무이한 사진이었다. 반란자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이 잘려 나간 국기를 흔들고 있으며, 그리하여 국가적 삶을 조직화하는 원칙을 나타내는 상징은 오간 데 없고 국기 중앙에 단지 구멍만 뚫려 있을 뿐이었다. 키르케고르적 표현으로 "생성 중인" 역사적 상황의, 즉 이전의 주인기표가 이미 그 헤게모니적 권력을 상실했으나 아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저 중간적 국면의 "열린" 특성에 대한 이보다 더 현저한 표지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사진이 증언하는 그 숭고한 열망은, 그 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조작되었던 것인가(궁극적으로 그것은 공산당 비밀경찰 세쿠리타테가 스스로에 반대하여, 즉 자기 자신의 기표에 반대하여 꾸민 쿠데타와 관련이 있었다. 즉 그 옛 기구는 자신의 상징적 의복을 벗어던짐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를 이제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결코 영향받지 않는다. 참여자 자신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모든 것은 되돌아보니까 보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부쿠레슈티의 거리로 몰려든 대중들이 그 상황을 "열린" 것으로서 "경험했다"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의 담화(사회적 결속)에서 또 다른 담화로 이행하는 그 유일무이한 중간적 상황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짧은 순간 동안 큰타자인 상징적 질서 안의 구멍이 가시화되었던 상황에 말이다. 그들을 지탱한 그 열광은 말 그대로 이 구멍에 대한, 아직 그 어떤 실정적 이데올로기적 기획에 의해서도 헤게모니화되지 않은 이 구멍에 대한 열광이었다. (민족주의적인 것에서 자유민주주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데올로기적 전유들은 나중에 가서 무대에 진입했으며, 원래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던 그 과정을 "가로채려"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대중들의 열광과 비판적 지식인의 태도는 잠시 동안 겹쳐질 것이다.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의 의무는 - 오늘날의 "후근대적" 우주에서 여하간 그 표현에 무슨 의미가 남아있다면 - 새로운 질서 ("새로운 헤게모니")가 확립되어 그 구멍 자체를 다시금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때조차도 바로 이 구멍의 자리를 시종일관 점유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모든 지배적 주인기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확히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캉은, 하나의 담화(사회적 결속)에서 또다른 담화로의 이행에서 "분석가 담화"가 짧은 순간 동안 언제나 출현한다고 지적한다. 이 담화의 목적은 바로 주인기표를 "생산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그것이 "생산 된" 것이라는, 인공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라는 성격을 가시화 하는 것이다.

 

주인기표에 대한 이러한 거리 유지는 철학의 기본적 태도를 특징짓는다. 라캉이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최초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분석가의 범례로서 참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아갈마와, 자신 안에 있는 숨겨진 보물과, 주인의 카리스마를 책임지는 그 미지의 성분과 동일화하기를 거부하며, 아갈마가 메우고 있는 공백을 끝까지 고집한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배경으로 우리는 철학의 기원들을 표식하고 있는 “놀라움”을 위치시켜야 한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그건 그렇다!”, “법은 법이다!” 등등) 않고, 우리가 현실적인 것으로서 조우하는 무언가가 또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순간 시작된다. 철학을 특징짓는 것은 현실성에서 가능성으로의 이와 같은 “물러섬”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프레데릭 제임슨이 인용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표어를 통해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 주어진 것은 이탈리아 자체가 아니라 이탈리아가 존재한다는 증명이다.” 견유학파 디오게네스에 관한 유명한 일화보다 더 반철학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운동의 비존재와 내속적 불가능성에 대한 엘레아학파의 증명에 대해 그는 단지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으로 답했다는 일화 말이다. (헤겔의 지적처럼, 이 일화의 표준적 판본은 이야기의 대단원을 은연중에 간과하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의 제스처에 갈채를 보낸 제자를 호되게 두들겨 주었으며, 선 이론적 날 사실factum brutum을 하나의 증명으로서 참조하는 것을 받아들인 데 대해 벌했다.) 이론은 출발점으로부터 추상할 수 있는 힘을 대포하며, 뒤이어서 그것의 전제들, 그것의 초월적인 “가능성의 조건들”을 토대로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한다. 이론 자체는, 정의상, 주인기표의 중지를 요구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철저하게 “초월적 철학자”로 남아 있다고 한 로돌프 가셰의 주장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는 차연différance이나 보충 등의 개념을 통해 철학적 담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리다적 “탈구축” 전략은 철학적 엄격성을 “글쓰기”의 무제약적 유희 속에서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절차를 그 절차의 가장 엄밀한 자기적용을 통해 침식하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철학적 체계의 “불가능성의 조건”(즉 이 체계의 지평 속에서, 극복 되어야 할 방해물로, 억제되어야 할 부차적 계기로 보이는 것)이 사실상 그것의 내속적 가능성의 조건으로 기능한다(글쓰기 없는 그 어떤 순수한 로고스도 없다, 보충 없는 그 어떤 기원도 없다, 등등)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또한 라캉에게 “초월적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없겠는가? 그의 전 작업은 어떻게 욕망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이지 않은가? 그는 일종의 “순수 욕망 비판”을, 욕망의 순수한 능력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모든 기본 개념들은 욕망의 수수께끼에 대한 동일한 수의 열쇠이지 않은가? 욕망은 “상징적 거세”에 의해서, 사물의 기원적 상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 상실의 공백은 환상-대상인 대상 a에 의해 치워진다. 이 상실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들의 “자연적” 순환을 탈선시키는 상징적 우주 속에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기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본질적으로 철학자라는 이 테제는 너무 위험한데,ㅡ 왜냐하면 철학을 “주인 담화”의 한 판본으로 명시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라캉의 반복된 진술들과 노골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라캉은 자신의 가르침이 지닌 근본적으로 반철학적인 성격을 몇 번이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말년에 감상적으로 던진 “나는 철학에 항거한다”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지만 헤겔 이후의 철학 그 자체가 이미 주요한 세 가지 지류들(분석철학, 현상학, 마르크스주의)에서 스스로를 “반철학”으로, “더 이상 철학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순간 문제는 복잡해진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철학과 “현실적 삶”의 관계는 자위와 성행위의 관계와 같다고 조롱하듯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실증주의 전통은 철학(형이상학)을 과학적 개념 분석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적 현상학자들은 “철학을 통과하여” 후철학적 “사유”로 나아가려고 한다. 요컨대 오늘날 “철학”으로서 실행되고 있는 것은, 정확히, 고전적인 철학적 집성체(“형이상학”, “로고스중심주의”등등)로서 지칭되는 어떤 것을 “탈구축”하려는 상이한 시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캉의 “반철학”이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반철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가설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라캉 자신의 이론적 실천이 일종의 철학으로의 복귀를 내포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소피스트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철학사에서의 두 결정적 단절인 플라톤 철학과 칸트 철학은 전통적 지식 집성체를 파괴하겠다고 을러댔던 새로운 상대주의적 태도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했다. 플라톤의 경우 소피스트들의 논리적 논변은 전통적 습속의 신화적 토대를 침식했다. 칸트의 경우 (흄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라이프니츠-볼프적 합리주의 형이상학의 토대를 침식했다. 두 경우 모두 제안되는 해결책은 전통적 태도로의 복귀가 아니라 “소피스트들을 그들 자신의 게임에서 패배시키는”, 즉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를 그것 자체의 근본화를 통해 극복하는 새로운 정초적 제스처이다(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논변 절차를 받아들인다. 칸트는 흄이 전통 형이상학을 매장시킨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의 가설은, 라캉이 동일한 제스처의 또 다른 반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지배적인 “후근대적 이론”은 로티나 료타르 같은 이름으로 가장 잘 요약되는 신실용주의와 탈구축의 혼합물이다. 그들의 작업은 보편적 토대에 대한 “반본질주의적” 거부를 강조하며, 그것의 범위를 역사적으로 특화된 상호주체적 공동체로 상대화하는 것을 강조하며, 기타 등등이다. 신성한 것으로의 “후근대적” 복귀를 위한 고립적인 필사의 시도들은 한낱 또 다른 언어 게임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재빨리 환원되고 만다. 그렇지만 라캉은 이러한 “후근대적 이론”의 일부가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입장은 플라톤이나 칸트의 입장과 일치한다. 라캉을 “반본질주의자”나 “탈구축주의자”로 보는 것은 플라톤을 한낱 소피스트의 한 명으로 보는 것과 동일한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에게서 그들의 담화적 논변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진리에 대한 언약을 긍정하는 데 이용한다.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의 붕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초월적 전회를 수행하는 데 이용한다. 동일한 노선을 따라서 라캉은 근본적 우연성이라는 “탈구축주의적” 모티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이 모티브를 그것 자체에 반하여 돌려놓으며, 우연적인 것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언약을 단언하는 데 이를 이용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탈구축주의자들과 신실용주의자들은 라캉을 취급하면서 그들이 (“남근중심주의” 등의 모습을 띤“ ”본질주의“의 어떤 잔여물로서 지각하는 어떤 것 때문에 언제나 골치를 썩는다. 라캉은 그들에게 섬뜩할 정도로 가깝지만 여하간 ”그 들 가운데 한 명“은 아닌 것 같은 것이다.


“라캉은 후근대적인 새로운 소피스트들 가운데 한 명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적 논의의 따분함과는 거리가 먼 어떤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장법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이른바 “서구문명”의 운명에서 시작해서 생태위기 속에서의 인류의 생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연관된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있다. “오늘날 새로운 소피스트들의 후근대적 시대와 관련하여,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 칸트적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 1993.

 

- 이성민 역.


이상한 모자

2010.02.11 23:49:17
*.146.143.41

너무 간지가 흐르는 서문이라서 직접 타이핑 함.

esall

2010.02.13 11:14:51
*.149.135.240

근데 정확히 요 부분까지만 재미있었... 데카르트하고 칸트 나올 때부턴 이게 뭔 말인지 도저히 못 알아먹겠더군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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