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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알레르기를 넘어 나아가자
- 제대로 된 민주노동당 노선 투쟁을 기대하며

샅바를 제대로 잡아야

<이론과 실천> 8월호에 기획된 "민주노동당의 대안사회" 논의는 무척 유익한 것이었다. 이 논의는 얼마든지 이어져도 좋을 것인데, 다만 피상적인 이념 논쟁이 아니라 당이 취하고 개척해야 할 노선 논쟁으로 발전해야 논의의 생산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을 터이다.

최근 <이론과 실천> 지면과 당 게시판의 논쟁들을 보면 양극단의 알레르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사회주의 알레르기'라 할만한 것으로, 예컨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판만 접하면 이에 발끈하면서 그 비판자들이 모조리 옹졸한 국유화 이데올로기나 전지전능한 당-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회주의자들로 간주하고,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이 낡은 사회주의의 족쇄로부터 구원하여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게 할 것인지 노심초사하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당 외부의 시선이기는 하지만, '사민주의 알레르기'로서, 의회공간의 활용이나 정책대안 혹은 사회적 조합주의 또는 그 무슨 비슷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를 모조리 개량주의나 협조주의로 간주하며 배제와 타격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자칭 타칭의 수십 수백 가지 사회민주주의가 있고 또한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수십 수백 가지 사회주의가 있을 터인데, 이런 알레르기는 너무 옹색하다. 그리고 생산적이지 못하다. 사민주의자들 다수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주장도 맞고, (사민주의를 비판하는) 자칭 사회주의자들 다수가 실은 조금 급진화된 케인즈주의 조처 이상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맞는 구석이 있다.

물론 필자는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사민주의 비판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할 것이지만, 우선 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맥락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한다.

기실 대표적인 사민주의 논자인 유팔무가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의는 매우 명목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유팔무는 1951년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창립선언문을 인용하며,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하고, 자본주의를 수정, 개혁하여 혼합경제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정치노선을 사회민주주의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경제적 제도에 대한 견해가 사민주의의 핵심은 아니다. 의회중심 또는 선거중심 여부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은 사민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슨 주의든 그럴 수 있다. 핵심은 우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입장, 그리고 다음으로 계급투쟁 특히 대중운동에 대한 태도에 있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를 (적어도 당면의 실천 속에서) 극복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에 결합하기보다는 그 동력을 간접적으로 활용하여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지향의 정책을 실현하고자 하는 대리주의의 경향을 띤다. 이는 몇몇 이론가와 정치지도자들의 발상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성향을 낳았던 구조적 조건이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사민주의의 역사적 조건은 우선 조직화된 강력한 노동의 존재와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선순환에 기반한 포드주의 타협, 그리고 동서 블록의 대립 속에서 갈등 흡수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케인즈주의 정책모델 등으로 분석된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나 제도화된 좌파의 정치참여 구조, 안정화된 시민사회의 존재 등이 사민주의 노선과 정치체제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사민주의 노선이 단선적 필연, 즉 사회주의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만나고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며 기계적 국유화 강령을 폐기하는 식으로 진화하고 발전한 결과는 결코 아니었음도 지적해야 마땅하다. 예컨대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에 대한 대안으로 추구되었던 유로코뮤니즘이나 다양한 중남미 변혁모델 등도 존재해왔다.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는 필연적 결과나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결과가 낳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 마치 구 사회주의권의 스탈린주의 정치가 유일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처럼.

사민주의 정치는 타협주의와 대리주의의 정치가 득세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구조 속에서 개화했다. 그러나 장기불황과 신자유주의의 유연화 공세로 이러한 사민주의 현상마저 파탄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적어도 지구적 영향력을 갖는 수준에서는 과거와 같은 구조 조건에 기반한 사민주의 정치노선은 불가능해졌다. 최근 특히 유럽의 독일, 프랑스 등의 사민주의 노선은 그래서 방어적, 저항적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저항적 면모를 보인다고 해서 가장 유력하고 바람직한 사회주의 대안인 것은 아니다.

유팔무가 민주노동당이 오늘날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이나, 필자는 사회민주주의를 볼셰비즘과의 분기 이후, 특히 2차 대전 이후 서유럽과 북유럽 등지에서 사민당 혹은 노동당의 이름으로 추구되었던 계급타협주의-수정자본주의 정치노선을 통칭하는 것으로,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를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민주노동당은 아직 사민주의인지 무엇인지를 규정할 상태에 있지 않다. 당을 규정하는 외적 조건과 내부적인, 역사적인 연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당의 노선은 여전히 무정형의 것이다. 좌파적 강령과 실용주의적 실천 사이에서 큰 진폭으로 요동하며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민주노동당이다. 걸음마를 떼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이제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를 결정해가야 한다. 다음에서는 그러한 노선 논쟁을 위한 몇 가지 의견을 내고자 한다.

지향으로서 민주적 사회주의

필자는 수 백 가지의 사회민주주의와 또 그만큼의 다른 무슨 주의가 있더라도, 우리의 지향을 '사회주의'로 표명하는 것이 여전히 적절하다고 본다.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 애초에 선택지로 늘어놓을 대립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 물질적 관계에 의한 인간의 질곡을 해소하고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보장하는, 그리고 인류와 생태계의 존속을 보장하는 유일한 이념, 체제, 깃발, 운동이다. 또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생산양식이 세계체제로 등장하면서 이미 그 도래를 가능케 할 물적 조건을 맞이했고, 이는 수많은 형태와 이름의 계급투쟁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라는 체제와 이념은 19세기말~20세기 초 맑스-레닌주의라는 '대표적' 이름을 부여받았으니, 이는 역사적 상황적으로 특정하게 규정되고 전개된 체계를 갖춘 만큼, 특정한 한계들을 노정했다. 20세기 초엽 러시아혁명과 함께 세계 제국주의 체제와는 다른 '블럭'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의 실험은 이러한 한계와 당시 계급투쟁의 곡절 속에서 세기말 전반적 붕괴를 경험하게 되었다.

20세기 주류 사회주의 체제/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추상적 언명 속에서 국가의 사멸과 노동자 민주주의의 개화라는 일관된 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타협하면서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포위 압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한계에 함몰해 버린 것에 있었다 - 동구의 소비에트 체제와 서구의 사민주의 체제는 그런 점에서 쌍생아였다. 그 결과 동구에서는 '사회주의' 혹은 '노동자국가'라는 이름 아래 근로대중을 실제로 배제하는 비민주적/관료독재적 정치체제와 낭비적 경제체제로,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폭력을 묵인하면서 노동계급의 행동을 투표행위로 제한하는 사민주의 정치로 드러났다. 서유럽과 중남미 등에서 대안적인 내용과 방식의 사회주의'들'이 존재했으나, 소비에트 블록과 사민주의 정치의 규정적 위상에 대하여 주변적인 지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이념노선은 '민주적 사회주의'로 집약되어 마땅하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해방의 새 세상을 가능케 하는 이념과 체제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과 결과 모두가 '민주적'이어야 함을 규정한다.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는 어떤 거부감을 피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의 정치학자 플란차스는 이제까지 사회주의 운동에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국가주의적인 자코뱅적 전통과 자주관리적인 직접 기층민주주의라는 관념의 대립으로 존재해왔다고 평가한다. 소비에트조차도 국가권력의 파괴와 대체를 내세우며 국가주의 문제를 회피하는 편리하고 모호한 관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 또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주의적 전통과 자주관리적 전통들을 단지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멸이라는 전체적 전망, 결국 국가의 변혁 및 직접 기층민주주의의 전개라는 두 가지의 접합을 포함하는 전망 속에서 자신을 위치 짓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이것은 이미 역사적 대중투쟁의 성과물이다)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과 확대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근저적으로 변혁하는 것에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21세기의 사회주의가 가능한 유일한 내용과 방식이다.

여기서 특히,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환기할만하다. 지난 논의에서 성두현의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은 국가 문제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올바른 해결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언급이나, 정종권의 "국가 중심의 정치적 실천은 사회민주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계승해야 할 적극적인 문제의식이다"라는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

물론 정종권 역시 국가의 지속적인 민주화는 특정 정당(정치세력)의 집권 여부로 국한되지 않는 민중이라는 주체의 지속적인 조직화, 의식화를 필수적인 과제로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방법으로서 진보적 구조개혁

민주노동당은 강령에서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라고 언급하고 있고, 현재에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의 노선을 둘러싼 논의가 양쪽의 알레르기 이상으로 좀체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창당 2년째를 맞고 있는 지금 여전히 당의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정치노선에 대한 논의가 빈곤함을 반증한다.

‘신자유주의'는 미국 주도 금융자본 중심의 20세기말-21세기 초 세계 자본주의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애초에 다양한 양식을 동시에 포함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유연화와 구조조정 드라이브를 표현할 뿐, 라인형 자본주의, 일본형 자본주의, 한국형 자본주의 등과 그것의 결합을 배제하지 않는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지구적으로 더욱 단일화되어 모순이 응축되고, 그 전반적 대안과 운동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한 단계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개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라인형 자본주의가 보다 '인간적' 모델이라 해도 그 자립적 발전이나 존속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협소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보다 근원적 규정을 희석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않다. 당의 입장은, '신자유주의'로 더욱 광포한 폐해를 드러내고 폐절을 요구받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민주의 역시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며,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노선에서 그 일정한 유의미성이 발견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일반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비판과 지양의 태도 없이는 그 유의미성은 대폭 삭감된다.

민주노동당은 그 대안을 '진보적 구조개혁'으로 집약한 바 있다. '진보적 구조개혁'은 단지 자본의 공격을 저지하거나 자본주의의 악을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에 대한 적극적 대안-노동계급의 능동적 혁명,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정책적 내용-을 제안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골간조차도 당내에서 아직 제대로 합의된 것이 없다.

이렇듯 진보진영과 당내에서의 공감대와 합의 부족을 지적하면서 정종권은 진보적 구조개혁이 선전 용어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이것을 대안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정책과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폐기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대표적으로 진보적 구조개혁을 가장 열정적으로 주창하는 장상환의 입장은 이러한 상에 매우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장상환은 민주주의의 일정한 진전으로 "정치적 권리가 보장된 상황에서는 합법적 정치활동이 가능하므로 의회를 통해 집권하여 개혁을 누적시켜나갈 수" 있으며, 이제부터는 민주노동당은 의회에서의 활동에 주력해야 하고, 법률 제정과 개정, 제도 개선 등 제도권 내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대중운동 영역에서의 활동은 사회단체의 활동과 관련을 맺는 연결통로로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해서는 주요 산업부문의 과감한 국공유화 조치보다는, 생산수단 소유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용자의 힘을 강화하는 임대차보호법의 제정 내지 개정을 추진하는 것,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실현하는 것 등을 현실적인 방안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진보적 구조개혁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정치제도적, 법적, 경제적, 문화적 관제고지를 장악하거나, 최소한 이러한 투쟁의 결절점들에 대한 결정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과제와 투쟁을 의미한다. 즉 진보적 구조개혁은 개혁과제이자 변혁을 위한 개혁, 투쟁의 성과물이자 보다 근본적인 투쟁을 위한 운동이다. 때문에 진보적 구조개혁은 외면이나 폐기가 아닌 급진화의 대상과 과제이다. 동시에 진보적 구조개혁은 단지 정책노선이 아니라 정치노선이어야 한다.

여기서 의료, 교육, 주택, 교통, 복지 등의 영역, 그리고 발전 송․배전과 정보통신 같은 망(網) 산업을 포함하는 '공공부문'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공공부문은 노동과 자본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관철을 둘러싸고 격돌하는 현장이며, 사회주의의 제반 조처를 가능케 할 주요 축이기도 하다. 생산수단의 사회화 문제도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부문을 가능한 보존하고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피지배계급이 진보적 구조개혁 과정에서 개입하고 좌우할 수 있는 영역과 수단들을 확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진보적 구조개혁은 두 가지 핵심을 갖는다. 우선, 변혁을 위한 주요 관제고지의 점령이며, 여기에서는 공공부문, 금융, 주요 법제도를 장악 내지 적어도 중립화할 것이 요구된다. 다음으로, 체제이행적 요구를 가지고 계급적 대립선을 긋는 대중투쟁을 수반해야 할 것이며, 그 결과로서 대중적 변혁주체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지 지배계급에 대한 폭로와 선동의 수단으로만 요구 강령을 이해하는 견해와는 구별된다.

수단으로서 사회운동적 대중정당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은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에 반대하며, 그러한 이분법을 관념적인 것으로 여긴다. 개량의 축적이 혁명은 아니지만, 혁명은 지난한 개혁(개량?)투쟁의 의식적 전개와 폭과 수위를 달리하는 수 차례의 정세적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레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이중권력' 전략에 비해 민주적 사회주의는 개량의 위험에 보다 가까운 듯이 여겨진다. 그러나 단지 국가기구의 파괴와 대체가 아니라, 혹은 대의제 국가기구에 대한 몇 가지 민주적 기제의 보충이 아니라, 국가기구 내부와 외부에서 장구한 국가사멸 과정을 위한 능동적 변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민주적 사회주의이다. 이것이야말로 보다 풍부하고 인간적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차원을 지양할 수 있는 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이란 평화적 이행 또는 순탄한 이행과는 논리적으로 무관하다. 다만 일회성의 단절, 즉 모종의 '혁명의 날'을 상정하는 대신 국가제도 안팎에서의 투쟁, 대중운동의 건설과 개입을 통하여 단호한 단절들을 도모한다는 점이 다르다. 민주적 사회주의 역시 광범한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국가주의, 혹은 그 이면인 자주관리주의의 함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의 조직노선은 '사회운동적 대중정당'(혹은 간단히 '운동정당')으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당은 권력을 지향하나, 1) 민주적 사회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야 하며, 2) 당 혼자서 권력을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즉 이 당은 결정적 시기에 변혁의 이벤트를 이끄는 전위정당이 아닌 대중정당이며, 스스로의 자폐적 활동이 아니라 체제변혁적 사회운동들을 여러 차원에서 촉진하고 고무하는 사회운동적 당이어야 한다. 당은 의원단이나 제도권의 활동으로 권력에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가능한 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의 분점'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장구한 구조개혁과 이행을 위한 참여이다.

여기서 당의 이미지를, 예컨대 '10% 지향 정당' 같은 것으로 상정해 볼 만하다. 2차 대전 이후 유로코뮤니즘부터 최근 몇 년 사이 각국의 진보적 대중정당을 통틀어 볼 때, 계급투쟁 정세의 부침과 각국의 정치문화 및 역사적 특수성, 세계 자본주의의 국면 같은 변수들이 있기는 하나, 좌파 대중정당이라는 당의 정체성을 훼손 삭감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대중적 지지-득표율은 25% 정도를 넘기 어려우며 보통 5-15% 사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획득한 정당득표 8.13%도 그러한 정도의 참고가 된다. 현 정세와 한국사회 지형이라는 필터를 다시 거쳐야 하겠지만 민주노동당은 -좌파 대중정당으로서 정상적이고 내용 있는 활동을 전개한다는 전제 하에- 기본 5% 정도의 득표 기반을 가지며, 반면 전국적으로 15% 이상을 넘기는 불가능하다. 즉 특수한 국면에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보수 정치세력과의 연정이 아니라면 집권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립적 분투에 대한 각오와 구상 없이, 예를 들어 몇 년 후에 원내진출, 교섭단체 구성, 또 몇 년 후에 다수당으로의 부상 등의 시간표를 운운하는 것은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해악적인 것이다.

혹자는 10%당이라는 이미지를 패배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 그리고 10%도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닐 터이다. 그러나 10% 안팎의 고정 지지율이라면 권력을 지향하는, 피억압 대중의 정치적 대표 조직으로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크나큰 지반이 된다. 법적 정치적 탄압이 어느 정도 저지되며, 조직은 자기존속 능력을 갖게 되고, 사회운동의 대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 때부터는 당선자를 늘리는 것보다 의회 안팎 활동의 질과 내용이 문제가 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당은 장구한 구조개혁 투쟁과 이행의 단절적 계기를 예비하고 촉진하는 다차원적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10% 이상의 지지율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좀 간편한 분류이기는 하나,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같은 사례보다는 프랑스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이나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독일의 민주사회주의당,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익당의 위상과 역할이 보다 가까운 모델이 될 것이다. 브라질노동자당은 지역과 층위마다 복합적이긴 하지만 그 중간쯤이 될 것이다. 환언하면, 그 이상으로 무리하게 득표율을 올리고 당선자를 늘리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일뿐만 아니라, 당의 사회운동적 역할을 삭감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정치관계법 개혁투쟁으로 기탁금이 대폭 인하되고 반환요건이 완화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민주노동당은 선거비용의 큰 부담 없이 당원의 당비만으로 당의 운영이 가능케 될 수 있다. 그 때부터는 10% 지향의 사회운동적 대중정당 노선(이미지)과 선거주의-의회주의 정당 노선 사이의 본격 대립이 나타날 것이다.

전략적 노선투쟁을

요컨대 이념노선 즉 지향으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정치노선 즉 내용으로서의 '진보적 구조개혁', 조직노선 즉 형식 내지 방식으로서의 '사회운동적 대중정당'이라는 세 가지 모토는 당면 시기뿐만 아니라 체제 이행과 이후 사회주의 강화 투쟁이라는 전체 변혁 과정을 관통하는 노선이 된다. 때문에 필자는 이 세 가지 노선을 당의 강령을 집약하는 세 가지 축으로, 그리고 상호 보완-연관하여 당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체제 변혁의 상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가지 아이디어일 뿐, 더 적절한 개념화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도 이러한 '전략적' 수준의 당의 지향을 큰 그림으로 그려주지 못하고 있으며, 열성 당원과 간부 대오마저 그러한 시야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부분적이고 각론적인 규정은 있을지언정, 당은 무엇을 지향하고 어떻게 체제변혁을 사고하고 여기서 당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것이다. 사민주의를 둘러싼 논쟁의 단편성도 보다 크게 보면 이러한 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당이 유아기를 벗어나 걸음마를 시작하고 시민사회와 운동 사회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올라서는 시점에서 당의 강령과 노선을 둘러싼 투쟁이 제대로 시작되기 마련이다. 역으로 정파연합당의 질을 극복하고 좌파 대중정당으로서의 질을 확보하는 것 역시 이러한 노선 투쟁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전략적 조망 속에서 당 노선을 운위할 때 비로소 알레르기를 넘어선 생산적 논쟁도 이루어질 것이다.
 
- 자료 출처 : <이론과 실천> 2002년 10월호,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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