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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일본 정치

닭 쫓던 개가 된 기시다 후미오

2020년 9월 2일 by 이상한 모자

기시다 후미오의 총재 선거 출마를 보며 일본 정치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아베 신조가 선양을 해줄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사임을 하면서는 기시다? 누구세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시다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들 거다. 이시바 시게루는 그렇다 치고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기시다는 뭐하러 출마해 3파전을 하는 건가. 어차피 진검승부의 때가 내년 9월 이전엔 오지 않는가. 내가 종종 편의점 주인을 할래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느냐… 그러는데, 정치인이 뭘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거다. 기시다의 출마 역시 역시 ‘반대’를 조직화 하는 민주주의의 단면이다.

기시다파, 그러니까 굉지회라고 그러면 유서 깊은 전통의 파벌이라 그러는데, 아무튼 지금 자민당 내에 주요하게 꼽을 파벌은 5개다. 아베 신조가 속한 호소다파, 아소 다로의 아소파, 니카이 도시히로의 니카이파, 기시다파, 그리고 다케시타파. 다케시타파는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을 배출하며 7~80년대를 주름 잡았던 파벌이다. 지금은 다케시타 노보루의 동생이 영수이다. 아무튼 이외에도 이시하라파니 수월회니 다니가키그룹이니 뭐니 있지만, 결국 이 5개 위주로 봐야 된다고 본다.

기시다가 닭 쫓는 개가 된 것은 굉지회의 부침과 함께 봐야 한다. 굉지회의 분열은 역설적이라고 해야 될까 90년대 다케시타파의 분열에서 촉발됐다. 록히드 사건이니 리쿠르트 사건이니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면서 다케시타파는 어떤 놈은 뛰쳐 나가고(오자와 이치로) 어떤 놈은 남고 엉망진창이 되는데, 이게 다케시타파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자민당이 정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파벌정치는 고질적 부패의 토양으로 지목됐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자민당 내부 정치는 파벌에 세대 갈등의 성격이 덧붙여지게 된다.

이때 부패를 일소하고 파벌정치를 극복하자며 나온 게 야마사키 타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소위 YKK연합이다. 이들은 각각 나카소네파, 굉지회, 청화회(지금의 아베 신조네 식구)의 중견 간부 정도의 위치였다. 이때 부패정치 척결은 정경유착의 일소였고 작은 정부-건전재정과 동의어였다(그래서 사회당은 부정부패와 직접적 관련은 없었으나 자민당 파벌과 구태정치라는 카테고리로 묶이고 만다). 정부가 크니까 임마 정치-관료-자본이 이익동맹을 맺는 것 아닌가. 일본 정치에서 정치개혁과 신자유주의가 동맹을 맺은 베이스 중 하나다.

아무튼 이들이 움직이기 전 이들이 속한 각 파벌들은 본래 질서대로 움직였고 그 결과가 다케시타파의 손을 잡고 굉지회 영수 미야자와 기이치가 집권한 거였다. 다만 부패정치로부터 뭔가 벗어날 거라는 의지를 보여줘야 해서 미야자와 정권은 록히드 사건 때 뛰쳐 나가 신자유클럽을 결성해 활동하며 청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노 요헤이를 영입해 관방장관을 맡기는데, 그 유명한 고노 담화의 탄생이다. 이런 얼굴마담 정치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가토 고이치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YKK연합의 활동이 본격화 된 것이다(애초에 고노 요헤이는 우리 식구도 아니잖은가!). 하지만 결국 부패 이미지로 인해 자민당은 정권을 잃고 말았다.

부패 이미지를 벗기 위해 청렴한 고노 요헤이가 총재를 맡게 되었고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결단으로 사회당 자민당 연정이 성립되었지만, 파벌 영수인 미야자와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했다. 이제 굉지회 내부 갈등의 핵은 고노 요헤이와 가토 고이치 사이의 후계를 둘러싼 대립이 됐는데 난리 끝에 결국 가토 고이치가 굉지회를 넘겨 받게 되자 고노 요헤이는 일군의 지지자를 이끌고 새로운 파벌을 만드는데 그 휘하에 아소 다로가 있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아소파이다.

하시모토 류타로가 정권을 되찾아 온 이후 마찬가지로 다케시타파의 오부치 게이조가 그 뒤를 잇는데, 오부치는 YKK를 주도하며 반다케시타파의 선봉에 섰던 가토 고이치를 제끼고 청화회와 손을 잡았다. 오부치 급사 이후 밀실합의를 통해 청화외의 모리 요시로가 2000년 총리가 된 것은 이 맥락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후예인 모리 요시로는 그답게 “일본은 천황이 중심에 있는 신의 나라”라는 등의 발언을 해 야당에 의한 내각불신임안 제출을 자초하는데 이때 가토 고이치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모리 요시로의 인기가 땅에 떨어져 이대로는 선거가 안 된다는 명분으로 야당의 불신임안에 찬성 표결을 하자고 한 것이다.

아마 ‘리버럴’에 가깝다고 하는 본인의 세계관에도 맞지 않는 일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굉지회 원로들은 이에 반대했고 파벌 전체 합의를 이루지 못해 거사는 실패했다. 기대했던 YKK도 모리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건 아니라고 해서 일이 안 됐다. 결국 가토 고이치는 혼자서라도 적진으로 달려가 산화해 무사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했으나 이때 측근인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가토 선생은 대장이니까 혼자서 돌격은 안 됩니다!”라며 만류한 얘기는 유명하다. 아무튼 이 용두사미 사건을 기점으로 굉지회는 또 가토파와 반-가토파로 분열해 각자 굉지회를 자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시기 YKK의 한 명인 야마사키 타쿠 일당들의 나카소네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가토가 무슨 스캔들로 퇴갤하고 나서는 충신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가토파를 이어받는데, 자민당을 부셔버리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개혁을 부르짖으며 총리가 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정권에서 다니가키가 주류와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이즈미의 승리는 다케시타파의 최종적 패배였고 우정민영화는 이들의 씨를 말리자는 거였다.

그런데 고이즈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아베 신조는 도련님들끼리 통한 것인지 파트너로 아소 다로를 선택했다(총재선은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3파전이었다). 지금과 달리 이 둘은 거의 코미디 같은 국정을 연출해 아베 신조 사임 이후에는 아소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이 ‘아소 포위망’을 결성하고 모리파 출신(지금의 아베 신조네 식구) 후쿠다 야스오를 총리로 밀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그러잖아도 구원이 있던 아소 다로에 대한 반대를 고리로 굉지회는 아소파를 제외하고 재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엔 고이즈미와 아베의 외교 노선(아소 다로가 외무상…)에 대한 반발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이 시기 야마사키 다로와 굉지회의 분열된 양쪽 파벌인 가토파와 고가파는 신YKK연합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후쿠다 야스오의 뒤를 이은 아소 다로 총리 시대를 거쳐 정권을 잃고 난 후 총재 선거에서 굉지회는 다니가키의 출마를 두고 다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정권을 잃었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해 또 세대론을 얘기했고, 그러다 보니 파벌 갈등에 세대 갈등이 다시 겹친 거다(이때 젊은 세대의 기수가 우리나이로 불과 47세의 고노 다로였다). 분열 속에서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총재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비슷한 일이 2012년에도 벌어지는데 이때는 민주당 정권 말기로, 총재가 되면 곧 총리가 될 수 있다는 메리트까지 더해져 분열이 극심했다.

결국 반-가토파 출신이자 파벌 영수였던 고가 마코토가 재선을 노리던 다니가키에게 당신은 너무 늙었고 젊은 세대가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며 다른 사람을 밀면서 갈등은 폭발했다. 파벌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 다니가키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고가도 물러났고 다니가키를 따르던 사람들은 탈퇴했다. 이렇게 탈퇴한 이들이 느슨한 형태로 모여있는 게 지금의 다니가키그룹이고 고가 마코토의 뒤를 이어 회장을 맡은 사람이 바로 기시다 후미오이다. 아베 신조로부터 누구세요? 란 말을 듣고 기시다 후미오가 바로 다니가키 사다카즈부터 찾아간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거다.

아무튼 기시다가 아베, 아소와 한 배를 타면서 생각한 모델은 오부치 사후 모리가 뒤를 잇는 모델이었겠으나 생각대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다. 스가의 시대는 아베의 연장전이지만 코로나19에 경제에 도쿄올림픽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일본 사람들이 아베 신조에 대해 좀 짠한 마음을 갖지만 내년 9월에는 모를 일이다. 이때도 구도는 아베 식구들 대 반-아베들이 될 수 있다. 이시바 시게루가 한줌도 안 되는 밑천을 갖고 계속 개기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자력으로는 안 되지만 반-아베의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메리트를 얻는다. 선양을 원했던 기시다 후미오가 출마를 강행하는 것은 반-아베의 상징을 노린 경쟁에 뒤늦게라도 나선 걸로 볼 수 있다. 지금이야 스가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다케시타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다만 선수가 없고 모테기 도시미쓰 같은 카드로는 반-아베를 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내년에는 이시바를 밀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건데… 다케시타파들이 지지고 볶은 얘기는 또 나중에 기회 되면…

뭐 그냥 망상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죽 보며 뭔가를 계속 ‘반대’하면서 합종연횡하며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정치의 서사를 만끽하셨길 바라며…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기시다 후미오, 아베 신조, 일본 정치

아베 신조 사임에 대한 방송 내용

2020년 8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1.

금요일(8월 28일) 오후 라디오 방송 내용이다.

오늘 아베 신조 총리 전격 사임 표명했다. 측근들도 몰랐다고 하고 당내 파벌 주요 대표주자들도 당황하는 분위기인 걸 보면 아베 신조 본인의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정권이 일본 사회에 뭘 남겼는지 돌아보며 앞으로를 전망해볼 필요가 있다.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것은 업적이다. 연속 재임일수로 따지면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7년 8개월 재임 기록을 넘어 2차대전 이후 총리 중에 가장 길다. 1차 집권기를 포함해 통산재임일수를 따지면 1차 대전 이전에 집권했었던 가쓰라 다로 전 총리를 넘어 역대 최장 기록이다.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1차 집권 때의 실패를 극복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많았다. 1차 집권 때도 병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민심이 매우 흉흉해진 상태가 영향을 미쳤다는 거다.

그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자기 사람 위주로 중책을 맡겼기 때문에 ‘친구내각’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그렇게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부적절하고 편향적인 발언을 해 논란이 되는가 하면 스캔들에 휘말리고 심지어 각료 중 한 명은 자살하기까지 했다. 아베 신조 총리 집안이 워낙 정치 명문가이다 보니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사람 아니냐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런 부정적 평가가 하나로 모이면서 철없는 도련님이 친구들을 모아 국민적 동의가 없는 정책을 성급히 추진하려다가 정권을 망쳤다는 평가가 당시에 나왔고, 이게 민심 악화로 이어졌다.

2차 집권 때부터는 몇몇 심복을 중용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주요 세력을 여러 이해관계 속에 묶어두고 적당한 직채을 나눠주면서 당과 관료를 지배하는 전략으로 바꿨다. 또 자신이 추진하려는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들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려 한다고 설명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도 1차 집권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평가됐다.초기부터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펴서 통화재정정책을 제대로 활용하려 하지 않았던 전임 민주당 정권과 비교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경기부양에 일정 정도 성공했으므로 정책적으로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심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코로나19에 대한 총체적 대응 실패가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그 이전부터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피로감이 있었다.일본 사람들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렴하고 능력있는 지도자가 부패한 정치를 바꿔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1980년대 나카소네 정권부터 일본 총리 관저의 권한은 계속 강화돼왔고 이게 아베 정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문제는 총리 관저의 기능이 너무 강해지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관료들이 과도하게 정권의 눈치를 보며 코드를 맞추기 시작한 건데, ‘손타쿠란’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건 모리토모 학원, 가케 학원 스캔들을 두고 자주 나왔던 표현인데. 총리가 자신과 가까운 사학 운영자들에게 특혜를 주고 싶어 한다는 걸 관료들이 스스로 헤아려 알아서 움직여 비리를 만들었다는 거다. 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아베 신조 총리에 힘을 실어줬더니 결국 자기 좋은 일에만 쓰더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건들이다. 지난해 벚꽃을 보는 모임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행사를 자기가 신세졌거나 신세질 사람들에게 보답할 용도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건데, 제대로 답도 안 하고 뭉개려고만 했다. 이러니 정치적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이런 분위기가 바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손타쿠 논란 이후에 관료들이 자기 주장을 갖고 전문성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건 사실인데, 차기 총리가 이 대목에서 어떤 컨셉을 잡느냐에 따라 한일관계도 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가령 한일관계가 지금처럼 경색된 이유는 역사갈등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만 외무성이 자기 권한을 갖고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는 목소리가 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만 해도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였으나 당시 외무상인 기시다 후미오가 자기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정권 후반으로 갈수록 외무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됐고 이건 결국 총리가 좋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체질이 된 거라는 얘기다.

아베 신조 총리가 남긴 성과라고 할만한 게 많지는 않다. 개헌을 평생의 과업으로 언급해왔는데 결국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숱한 논쟁과 주변국들과의 갈등 소지만 남겼다. 개헌이 실질적으로 어려워지자 아베 신조 총리는 도쿄올림픽을 개최해 후쿠시마의 부흥 등 새로운 발전 전망을 제시하는 걸로 정권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연기된데다 내년에도 정상적으로 개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이것도 엄청난 빚만 남긴채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아베노믹스도 결과적으로는 끝이 좋지 않다. 아베노믹스는 신속한 재정정책, 과감한 통화정책, 구조개혁이라는 3가지 화살로 요약되는데 앞의 두 가지는 앞서 언급했듯 경기부양에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성과를 구조개혁으로 이어가는 데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 엔화 약세 기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다시 저성장 국면이 돌아왔고 코로나 19 영향까지 더하면 전후 최악의 침체를 기록할 거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렇다 보니, 최장 재임 기록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총리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2.

아래는 사임 발표가 되기 전인 금요일 오전 라디오 방송 내용이다. 겹치는 내용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오늘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해 알아보자.

오늘 기자회견 열어 건강상태를 설명할 거라는데, 사임이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에 자꾸 병원에 가서 화제였는데, 지병인 궤양성대장염이 재발한 것은 거의 사실로 보인다. 아베 신조는 1차 집권 당시인 2007년 9월 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퇴했다. 병이 재발했다면 언제 사퇴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제는 포스트 아베에 대한 교통정리가 안 됐다는 점이다.

후임으로 거론되는 건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전 외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고노 다로 방위상 등이다. 이 중 이시바 시게루는 아베 신조 총리와 상극이어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고 기시다 후미오는 국민적 지지율이 낮고 스가 요시히데는 정치적 무게감이 떨어지고 고노 다로는 통제가 안 돼 불안하다. 거기다가 아베 신조가 자기 파벌 안에서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파벌 간 이해관계 문제까지 겹쳐보면 더 복잡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교통정리가 될 때까지 자의 반 타의 반 총리직을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엄마가 시키기 전엔 사임 안 한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일국의 총리가 엄마가 시킨다고 사임하진 않을 것이다. 아베 신조 집안이 워낙 정치명문가다보니 모친도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나오는 얘기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인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고,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이므로 여기까지만 따져도 벌써 집안에 총리가 2명이다.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에서 자민당 간사장까지 올라 총리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1988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정권이 무너지면서 부패 정치인 세트로 묶여 낙마했고, 1990년에 췌장암 선고를 받고 1991년 사망했다. 이게 아베 신조가 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를 더 따른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근본적으로는 물론 이념 문제).

아베 신조는 미국 유학 후 고베 제강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2년 부친인 아베 신타로 당시 외무상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다 1993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한 이후인 지역구를 이어받아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요직인 내각관방부장관을 맡았는데 아베 신조가 1954년생이니 이때가 우리 나이로 불과 47세인데도 요직에 오른 셈이다. 2001년 고이즈미가 집권한 이후에도 이 직책을 유지했는데 이때부터 선대의 후광을 벗어나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납북자 문제다. 2천년대 초반 북핵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치 무대에서 일본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왔다. 이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정상회담을 추진했고 당시 김정을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에 호응해 2002년 고이즈미의 방북이 이뤄졌다. 이때 현안은 북한이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인을 납치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 이 사건이 언론에 의해 다각도로 조명되면서 일본 내 여론이 악화됐다. 아베 신조는 이런 분위기를 읽고 북한과 적절히 타협하려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원칙론을 강하게 주장했고 일본 언론에 이런 사실이 보도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2003년 9월 고이즈미 총리는 이런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지 당시 3선에 불과했던 아베 신조에게 자민당 간사장직을 맡겼다.

고이즈미는 주류 파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는 등 비주류적 슬로건을 내걸고 총리가 됐다. 집권 이후에도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기성 정치질서를 해체하는 것에 가까운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다 보니 당내 기득권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고이즈미는 자기편을 늘리기 위해 그 때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젊은 세대들을 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물들을 중용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브랜드인 파격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베 신조는 이 중 한 명이었고 현재 차기로 유력한 인물로 꼽히는 이시바 시게루도 이때 중용됐다. 아베 신조가 총리 자리까지 가는 데에는 고이즈미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 내각의 주요 정책을 계승할 것을 내걸고 2006년 9월 자민당 총재로 선출, 총리가 됐다. 당시 52세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연소 총리 기록이다. 문제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운영 비용 관련 의혹에 연루돼 사임했고 농림수산상은 비리 의혹으로 자살했다. 이 밖에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주요 각료의 발언도 논란이 되면서 민심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런 사건들은 아베 신조의 인사 스타일 때문에 불거진 걸로 해석됐는데, 세상물정을 모르는 도련님이 주변의 친한 사람들 위주로 내각을 꾸리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시각이다. 여기에 국민들이 과거에 낸 연금기록 중에 상당 부분이 누락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사건(전임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까지 일어나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됐다. 이 결과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했고 그랬는데도 인적쇄신을 하지 않아 분위기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결국 총리직을 사임한 것이다.

아베 신조 사임 이후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등이 총리직을 이어갔으나 아베 신조보다도 정권 운영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아소 다로 내각은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쳐 거의 재앙에 가까운 상황이었는데 당내 다수가 그만두라는 분위기였는데도 아소 다로 본인이 직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막장 사태까지 일어났다. 결국 2009년 엄청난 표차로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주면서 자민당의 시대는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일본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이 터지면서 자민당에 다시 기회가 왔다. 2012년 중의원 선거가 예상되는 시점에 그간 절치부심하던 아베 신조가 다시 등장해 총재 선거에 출마해 승리하면서 정치적 재기가 이뤄졌다.

당시 총재선은 처음에 파벌 내 분열 등으로 아베 신조에 불리했고 무파벌에 가까웠던 이시바 시게루 당선이 유력했다. 1차 투표 결과는 이시바 시게루가 1등, 아베 신조가 2등이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현역 의원 투표와 지방조직 대표 투표로 이뤄지는데 현역 의원들이 그래도 정권을 운영해본 아베 신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선 투표 결과 아베 신조가 당선됐다.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아오면서 아베 신조의 정치적 기반은 한층 탄탄해졌다.

총재 선거 때부터 아베 신조는 자기 주변 사람들을 중용했던 1차 집권 때와는 달리 파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지지 기반을 넓히는 방식으로 전략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내 조직을 틀어쥔 것과 동시에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며 정책적으로 유능하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1차 집권 당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도 평가를 달리 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총리 관저의 권한 강화와 개헌으로 대표되는 보통국가화를 추진하면서 뭔가 책임있는 총리의 모습으로 각인됐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다. 역대 최장수 총리로 너무 오래 재임해서 여론의 피로가 쌓여있는 상황이다. 또 일본인들은 정치인들이 자본과 관료와 결탁해 스스로 배를 불리고 있다는 식의 정치불신을 강하게 갖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강력하고 청렴한 총리가 나타나 이런 구조를 깨줄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과거 고이즈미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마찬가지로 아베 신조 총리에게도 일본 국민들이 힘을 실어줬으나 모리토모 스캔들, 가케학원 스캔들, 벚꽃을 보는 모임 논란 등 자기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사건들이 결정타가 되고 있다. 또 아베 신조가 공언한 개헌과 보통국가화 관련해서도 일본 국민들 입장에선 전적으로 찬성하진 않으나 굳이 하겠다니까 내버려뒀는데, 시끄럽기만 하고 마찰만 생기고 성과가 없었다. 이 점도 부정적 평가의 원인이다. 이래 저래 시기가 문제일 뿐 총리가 바뀌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3.

후임에 대해서는 대개 분석이 일치하는데 현재로선 스가 요시히데가 이어받을 확률이 높으나 이건 주류3파(호소다, 아소, 니카이)가 대안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가 원인이라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년이 돼도 대안이 있을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고노 다로가 그나마 명목상 아소파이지만 고노 요헤이(얼굴마담)-아소 다로(실세)라는 구조가 선행된 상태라서 통제가 어려워 지지가 쉽지 않다(낭만화하면, 마치 자비가와 샤아 아즈나블의 관계인가??). 기시다 후미오는… 지난 번에 나카타니 겐 전 방위상이 아베의 장기집권에 국민이 완전히 지쳤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기시다파이므로 똥차는 빨리 좀 비키라고 얘기한 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안달난 걸로 볼때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주류가 그냥 정권을 넘겨주기로 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그냥 기시다파가 사고 못 치게 관리를 하는 차원이었던 걸로…

이런 상황이면 의외로 내년에는 이시바 시게루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다. 특히 전통의 다케시타파가 인물이 없기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는 워낙 풍운아이다. 다나카파로 시작해서 나카소네파 갔다가 자민당 정권 잃고 분위기 안 좋을때 막 흩어지던 사람들 틈에 껴서 오자와 이치로의 신진당까지 갔다가 왔다. 근데 이게 요즘 같은 상황에선 이게 오히려 득일 수도 있다. 모리 요시로 이후 야당 시절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제외하고 구 후쿠다파의 세상이었는데 그 설욕을 이제 할 때가 온 거 아니냐, 이거다. 누카가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이시바 시게루가 되면 한일관계 좀 풀리지 않겠나 하는 사람들 있는데, 개헌과 보통국가화는 흐름이라서 되돌리기 어려울 거다. 다만 이시바의 논리는 개헌을 하려면 주변국들과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건 하토야마 유키오 등 리버럴들과도 의견이 대략 일치한다. 문제는 이 양반이 밀덕이라는 건데… 그런고로 생각하지 못한데서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아베 신조, 일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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