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기행 6
숙취 속에서 깨어났다. 김 선생님은 아직 자고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곧 김 선생님의 스마트폰이 내는 소음에 깼다. 고국의 뉴스를 시청하려는 것이다. 차례로 씻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이 와중에도 굳이 뭔가를 둘러보겠다고 하는 김 선생님의 열정에 감탄하였다.
골목 골목을 누비며 일상의 삶을 관찰하였다. 때는 8시를 좀 넘은 시각이었는데, 출근에 발이 바쁜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글쎄 여기나 거기나 다들 힘들고, 사는 게 비슷하다. 바쁜 사람들은 공사 중인 건물 옆의 사무소 같은 데로 들어갔는데 그러니까 건설 현장에 관계가 돼있는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뭘 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변과 주거지역과 공장과 상업지역이 마구 뒤섞인 공간이 낯설지 않았다.
먼저 향한 곳은 나미노우에 해변(波の上ビーチ)이다. 앞의 건설 현장과 가까운 것을 볼 때 동네 사람들도 많이 이용하는 곳으로 추측됐다. 바다 저 멀리 배를 끌어 올리는 크레인이 보였다. 샤워시설 등은 9시부터 쓸 수 있었다. 어차피 온 몸이 타버려서 해수욕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 아침에 벌써 수영을 하고 있는 젊은이도 있었다. 꽤 전문적인 포즈였다. 자세히 보니 그가 수영을 하고 있는 주변에 수중차단막 같은 게 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이른바 스노클링 등을 하라는 의도인 것 같았다. 이외에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노인들과도 마주쳤다. 날은 덥고 햇빛은 세고 숙취에 배까지 아파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 해변을 걷고 나서는 나미노우에 신사로 이동했다. 해변에 우뚝 서있는 바위절벽 위에 있는 신사로서, 오키나와 신사들의 대장 격인듯 했다. 오키나와에는 8개 정도의 신사가 있는 듯 했는데 아무래도 중국 문화가 섞여있다 보니 본토의 신사와 좀 의미가 다를 듯도 싶었다. 절벽 위에 서서 해신의 나라를 향해 풍요를 기원했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 건 중국인데… 그때도 알았으려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중국문화권이었다고 해도…
신사에 도착한 김 선생님은 경내를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해 국자로 물을 마셨다. “안 시원해!”라고 외쳤지만, 난 왠지 그게 아닌 거 같아 물 마시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곳은 참배 전에 손과 입을 씻는 의식(手水)을 치르는 곳이었다. 국자에 입을 대서도 안되고 의식이 끝난 후에는 국자를 씻기까지 하는데… 뭐 난 안 했으니 됐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어찌된 일인지 메이지 천황의 동상을 발견했다. 1879년 메이지 정부가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만든 흔적인 것 같기도 했다.
신사를 보고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갔으면 했는데, 김 선생님은 신사 주변까지 모조리 탐험하려는 것이었다. 숙소 주변에는 숲길과 앉아서 쉴 수 있는 긴 의자 등이 조성돼있다. 기이한 식물을 구경하면서도 숙취와 더위와 복통을 어떻게 이겨낼까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기이한 동상을 발견했다. 한 여인이 아동을 안고 있는 모양인데,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상의 이름은 ‘바다울음의 동상(海鳴りの像)인데, 대단히 슬픈 사연이 있는 기념물이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방어를 맡았던 제32군은 북부를 포기하고 슈리성을 중심으로 남부만을 방어하기로 하고 장기전 체제에 들어갔다. 주식이던 쌀을 고구마로 바꾸고 각 지역에 보급소를 만들어 남쪽 지역 전체를 요새화 하려고 했다. 문제는 민간인들이었는데, 군사자원으로 활용하기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밥만 축내게 하느니 차라리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게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32군은 소개령을 내려 비전투인원을 전부 본토의 큐슈 등에 보내게 했다. 이 중에는 보호자와 떨어진 아동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태운 화물선인 쓰시마 호가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 중에 미군 잠수함의 공격에 휘말렸다. 당시 탑승객은 1788명이었는데 이 중 1484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희생자 중 780명은 학동(學童), 즉 어린이들이었다. 그래서 나미노우에 해변 근처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쓰시마마루 기념관(対馬丸記念館)과 작은 벚꽃의 탑(小桜の塔)이 있다.
그런데 당시 오키나와 근해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이들 뿐이 아니었다. 당시 이런 식으로 격침된 조난 선박은 26척이며 앞서 쓰시마마루를 제외하고도 오키나와 현 조사 기준 192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중에는 물론 어린이들도 포함돼있다. 이 상은 이 사람들을 기릴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다시 숲을 헤치며 걸어 내려오니 옆에 운전학원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또 절도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도 없고 상태도 좋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와중에 패밀리마트를 발견하고 거기서 아침식사거리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놀랍게도 화장실이 설치돼있었다. 이용해본 바 아주 깨끗했다. 감탄하였다. 도시락코너로 가서 김 선생님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파스타 같은 것을, 나는 돼지고기 덮밥을 골랐다. 점원이 데워준 도시락들을 들고 숙소로 복귀해 펼쳐놓고 먹었다. 드디어 술이 좀 깨는 듯 하였다. 돼지고기 덮밥은 베스트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편의점 음식이라는 걸 감안할 때에는 꽤 괜찮았다. 소스가 좀 새콤했는데 특이했다.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서 공항으로 가기 위해 유이레일을 다시 이용했다. 이번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뒷사람이 뭘 기다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민폐를 끼쳤다. 일본에 있다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그들의 괴이한 행동들은 내내 이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나하공항 국내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김 선생님은 다소 헤매는 듯 했다. LCC 터미널로 가는 셔틀을 타야 하는 것 아닌지 얘기해보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김 선생님은 걸어서 국제선 터미널로 이동한 후 거기서 다시 LCC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국내선 터미널로 돌아왔다. 어차피 LCC 터미널로 가봐야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김 선생님은 이미 아침을 먹었다는 이유였는지 오니기리를 선택했으나 나에게는 그런 도량이 없어 오키나와 라멘 세트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드링크와 쥬시가 포함돼있다고 써있었는데, 쥬시는 쥬스 같은 것이 아닐까 해석하였으나 알고 보니 오키나와에서 먹는 일종의 양념밥 같은 것이라고 한다. 여튼 오키나와의 돼지고기 사랑은 대단하다.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LCC 터미널로 이동했다. 혼돈의 도가니였다. 여러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은 후(이 중에는 김 선생님이 차가운 것으로 혼동하고 뜨거운 커피를 사온 것도 있었다)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 꾸벅 꾸벅 졸며 귀국했다. 이 와중에도 김 선생님은 비행기 안에서 저기가 여수니 지형이 이렇느니 저렇느니 하며 설명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국의 땅을 밟자마자 여기가 과연 ‘헬조선’이라는 게 느껴졌다. 에스컬레이터에, 또 공항으로 이동하는 셔틀에 재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뒤쳐진 사람이 되어 손해를 본다. 과연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까? 여행을 떠나는 마음이라는 걸 35년을 살고 나서야 알게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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