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중요한가 싶지만, 스포일러가 있겠지요.
미국에서 뭔가 상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미나리란 영화를 보았다. 내가 영화에 대해서 뭘 알겠냐? 지금도 따로 찾아본 게 하나도 없다.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만든 영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 이 영화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에 대한 반성이란 맥락에서 소비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유럽인들이 과거에 2차대전이 왜 일어난 거냐며 혼란에 빠졌던 것과 같다. 이런 분위기가 최소 향후 몇 년은 더 갈 것이다.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어떤 고립감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캘리포니아에 가서 노동을 하면 병원비도 대고 빚도 갚고 하여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한다. 그럼에도 굳이 ‘가든’으로 낭만화 된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어떤 소외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건 대도시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고, 어둡고 캄캄한데다 쓸모없는 존재는 태워 죽이는 노동환경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능력이 없어서 도태된 게 아니다. 기성 체제에 적응을 못해서 ‘자의’로 떠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됐으니 뭐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수맥을 찾는 사람과 농사를 도와주는 사람은 모두 전형적인 백인 하층민의 외양을 하고 있어 위협적이다.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말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하기도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기행과 엑소시즘에 대한 집착은 묘한 불안감을 불러 일으킨다(속죄와 퇴마의식은 저 사람이 분명 죄를 많이 지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한다). 주인공은 그들과 자신을 구분해 스스로를 합리적 존재로 규정하고 합리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기성의 ‘사회’라는 게 주인공들의 자립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는 ‘사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기성의 사회 대신에 결국 의존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상태인 백인 하층민들의 비합리성과 이들 커뮤니티의 중심인 복음주의 교회 정도이다(기성의 한국인 교회는 여기에 설 자리가 없다!).
베이비시터 대신 불러 온 외할머니는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한 내키지 않는 시도였고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게 결국 파국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존재가 없었더라도 일이 잘 됐을까는 의문이다.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것은 외할머니가 심은 미나리의 존재다.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생하는 성격 탓에 그 난리통을 겪은 뒤에도 희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소외되고 배제되고 이상해지고, 그러면서도… 그러든지 말든지 하여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살게 되는, 미나리 같은 거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다 떠나서 어떻게 보면 결국은 미나리들이 트럼프를 찍은 것이다. 말 장난 같지만 그게 오히려 길게 보면 희망일 수도 있다. 별 근거는 없지만, 어쨌든 미나리는 원더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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