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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단지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부당거래가 아니라 폴아웃3를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끔은 일종의 리얼리즘보다 그저 우화가 더 설득력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핵전쟁으로 인한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다루고 있는 이 게임에는 여러가지 우화가 나오는데 하나같이 끝이 씁쓸한 것 뿐이다. 이를테면 그 와중에도 건물의 상당부분이 남아있는 '텐페니 타워'에는 일종의 상류층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구울'들(이들은 방사능으로 인해 외모가 끔찍하게 변형되고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뿐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이 이곳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플레이어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첫째, 텐페니 타워에 거주하고 있는 상류층(사실 세상이 끝났기 때문에 상류층이라는 말도 의미가 없다. 그들은 그저 상류층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지하철 역에 거주하고 있는 세 마리의 구울들을 죽여버리던가 둘째, 구울도 텐페니 타워에 살 권리가 있다는 점을 존중하여 인간과 구울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부러 나쁜 길을 롤플레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 경우 구울들이 텐페니 타워에 하나 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원래 거주하고 있던 상류층 주민들이 하나, 둘 '사고사'하기 시작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텐페니 타워를 방문해보면 우리는 텐페니 타워에 오로지 구울들만 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선한 활약으로 텐페니 타워에 원래 살고 있던 인간들은 살해당하고 사악한 구울들이 이 커다란 건물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좀 더 아이러니컬한 에피소드를 찾고 싶다면 추가 다운로드 패키지인 'Pitt'을 플레이하면 된다. Pitt은 전염병이 돌며 악당들이 노예를 부리는 거지같은 산업 도시이다. 이 도시의 전쟁 전 이름은 아마도 'Pittsburgh'일 것이다. 핵폭발로 인하여 'tsburgh' 부분이 훼손된 고속도로 표지판이 이 도시의 과거를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어쨌든 플레이어는 이 도시에서도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첫째, 하루종일 억지로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노예들을 도와 악당들을 물리치고 이 도시의 독재자를 쓰러뜨린다. 둘째, 독재자를 도와 노예들의 '혁명'을 무력화시킨다.

당연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전자를 택할 것이다. 문제는 독재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가보면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염병 치료의 열쇠는 그의 자식인 갓난아기이다!) 지금은 도시의 규모와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노예들(그는 노예들을 꼬박꼬박 '노동자들'이라고 부른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플레이어의 선택은 무엇인가? 노예들을 도와 악당들을 물리치고 독재자를 쓰러뜨리면 노예해방이 눈 앞에 다가온다. 하지만 노예들은 여전히 격심한 육체노동을 견뎌야 한다.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연구도 독재자의 그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실한 장비로 계속해야 한다. 게다가 노예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다. 단지 이 혁명의 주동자가 앞으로 새로운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상상이 플레이어를 덮칠 뿐이다. 독재자를 도와 노예들을 진압하면? 혁명에 가담한 노예들을 향한 무차별적 살육이 전개된다. 노예해방의 지도자는 죽거나 추방되고 Pitt의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채 플레이어는 도시를 떠나야만 한다.

어떤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위와 같은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도 방구석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더 큰 비극이 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회의원, 정부관료, 그 외 사회 기득권층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손에 쥘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최상의 결론을 도출해낼 만한 그 어떤 논의도 전개할 수 없다. 우리가 떠드는 수많은 말들은 단지 '여론'일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독재자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폴아웃3를 플레이 하고 나서 [3] 이상한 모자 2010.11.30 4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