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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설국열차를 관람하고

조회 수 891 추천 수 0 2013.09.27 21:07:45
짧은 리뷰를 요구한 다른 매체에는 설국열차에 대해 ‘지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평했다. 영상의 스펙터클이나 스토리의 완성도를 부각시키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많은 상징적 장면을 삽입함으로서 관객들이 영화를 본 후 겪는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하는 영화가 있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명백하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국열차 속에는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요소들이 가득하다. 열차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열차의 외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된 상황에서 열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열차에 탑승한 대부분의 승객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유독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설국열차는 이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을 다룬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혁명을 주제로 한 드라마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물론 설국열차가 전제하는 혁명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이 임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하고 지배계급이 이에 대한 착취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지만 설국열차의 세계에는 노동계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생산수단은 열차 그 자체인데, 거의 무한히 작동할 수 있는 신성한 엔진, 얼어붙은 세계를 달리는 열차라는 환경, 자동화된 설비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역할을 대신한다. 즉, 꼬리 칸의 사람들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에 기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이 죽지 않을 만큼의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해 미력하나마 약간의 복지를 제공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인 셈이다.

즉,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열차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세계이다. 그리고 꼬리 칸의 사람들은 이런 체제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총리는 시종일관 이들에게 “윌포드님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열차의 지배자인 윌포드는 이들이 체제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니까 공리주의의 교리로 말하자면 이들의 숫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들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감당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즉, 윌포드가 길리엄과 내통해 꼬리 칸 사람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 벌레로 단백질 블록을 만들어 배급하는 것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해결책인 셈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 중에 한정된 재화를 배분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방법은 ‘윌포드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통치에 대한 이런 공리주의적 접근은 파시스트의 통치술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왜냐면 공리주의 자체가 어떤 전체주의적 기획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진지한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주의가 자유주의적 발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공리주의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비극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름대로 증명하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공리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전향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어떤 사회가 전체주의로 전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국열차가 보여주는 총리의 존재와 총리가 지휘하는 살육자들의 존재를 상기해보자. 도끼를 든 살육자들은 총기를 휴대하고 안전장구를 갖추고 있는 군대, 즉 국가기구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살육자들은 제각각의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검은 마스크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물론 총리가 최고 책임자이지만) 정복을 착용한 일본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 것인지는 매우 명백하다.

즉, 살육자들의 존재는 국가가 공인하지 않았지만 특정 정치세력에 복속된 사적 폭력을 의미하며 역사적 사건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는 예는 ‘검은셔츠단’이다. 그들이 살육을 저지르기 전 생선의 배를 갈라 피를 나누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 역시 어떤 비이성적 신념의 존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설국열차에서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사회는 파시즘과 필연적으로 마주친다.

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는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유치원 칸’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치원 칸 구성원들의 과장된 몸짓은 어딘가 1950년대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1950년대의 미국은 경제적 번영과 전쟁의 상흔이 공존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시기도 1950년대다. 유치원 칸은 어린이들에게 반복해서 윌포드의 자비와 탁월함, 엔진의 신성함으로 상징되는 열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윌포드는 체제의 모든 매커니즘을 꿰뚫고 있다는 데에서 신적인 위상을 가진다. 시스템에 속해있는 주체로서는 시스템의 전체 매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커티스가 인도하는 꼬리 칸의 반란자들은 길리엄을 열차의 지도자로 만드는 것 정도 이외의 구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윌포드와 커티스의 대결구도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관계에 준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는 독재자와 민중의 구도로 치환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인민주의적 봉기를 실행하는 그 민중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의 역할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민수와 요나는 체제의 본질에 대한 지식과 직관을 갖추고 있다. 문을 열 수 있는 능력과 문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존재는 열차라는 사회 안에서의 지식인이자 예언자,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수와 요나는 인민주의적 봉기를 일으킨 커티스와 (동기가 뭐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간다. 윌포드의 문 앞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치적 지향을 말하기 시작한다. 열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는 이들의 주장을 사실상 거부하는 커티스의 선택은 지식인과 인민주의적 대중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열차의 지배자가 바뀐다 한들 공리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꼬리 칸 거주민들의 처지가 극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열차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제1의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이런 방식의 체제의 유혹에 무방비한 상태로 윌포드의 논리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에게 이를 넘어설 수 있는 통찰을 주는 것은 요나의 특이한 능력이다. 요나는 체제에 대한 직관력을 활용해 기차의 엔진이 사실은 무한정 작동할 수 없으며 마모된 부품은 꼬리 칸 어린이들의 노동과 이에 대한 착취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러한 체제의 진실을 깨닫게 된 대가로 커티스가 치르는 것은 한쪽 팔의 절단인데, 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하는, 결여를 내포한 체제와 주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된다. 즉,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하는 커티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묘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혁명은 이렇게 완수되는 것이다.

열차를 하나의 현실적 질서로 본다면 이 질서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오히려 기차 외부에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전까지 승객들은 외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이는 곧 외부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제거하는 효과를 거두는 장치로 활용된다. 따라서 외부로 향하는 문은 그야말로 벽이라는 환상으로 작용하게 되며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로서의 열차는 자신의 항상성을 위해 열차 내부의 수많은 문제를 은폐한다. 즉, 열차는 진실에 대한 외면과 망각을 통해서만 완벽한 공리주의적 사회로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벽이 되어버린 문에 본래의 의미를 부여해 문을 여는 것이며 외부로 당당하게 나아가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 문 밖에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체제 내부의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환상을 횡단하는 것으로 역사가 이끌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즉, 열차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행위는 암흑 속으로의 돌진에 준하는 것이 된다. 사회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것이다.

*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창간호(8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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