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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가난해도 마음만은 행복한 삶

조회 수 3666 추천 수 0 2011.09.28 08:00:56
어릴 때부터 나는 돈 없이 사는 것에는 아주 익숙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다. 무엇을 하려 해도 돈이 모자랐다. 돈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 모두가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생존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면 참아야만 했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선교원’이라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가 신앙심은 깊지 않았지만 교회 가는 데 재미를 붙인 기독교 신자였던 탓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보육시설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물론 산타클로스도 등장했다. 산타클로스 역을 맡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분장이 조잡했다. 요즘처럼 그럴듯하게 나풀거리는 수염과 눈썹을 붙인 산타클로스 분장을 상상한다면 곤란하다. 기껏해야 솜뭉치로 산타클로스의 수염을 연출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색하게 등장한 산타클로스는 대뜸 ‘어린이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기 시작했다. 불려나간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의 무릎에 앉아서 시시한 얘기를 몇 마디 들은 후 선물을 안고 자리에 돌아왔다. 선물은 아마 어린이들의 부모님이 미리 준비해서 선교원 측에 전달해둔 것일 것이다.

즉, 이 선물이라는 물건은 부모님의 재력에 비례해서 크기가 커졌던 것인데 그 당시 가장 큰 선물을 받았던 아이에게는 ‘인형의 집’이 전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커다란 로봇, 기차와 레일 세트, 여성스러운 인형 등등이 포장된 채로 등장하였는데 내 차례가 되자 산타클로스는 조그만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었다. 뜯어보니 『별나라 손오공』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인기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그림책이 나왔다. 그리고 좀 더 생동감 있는 내용 전달을 위해 전문 성우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가 부록으로 달려있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이 받았던 선물의 평균 가격에 비교하자면 3분의 1쯤 되는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나라 손오공』 그림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몰랐던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메칸더 V’라는 로봇 장난감을 얻게 되었을 때이다.

이 장난감은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던 로봇을 모델로 한 것인데 다양한 무기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국의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가슴에서 불이 나가는 것도 멋있었지만 가장 특이했던 것은 팔에 장착된 원형의 방패가 부메랑처럼 날아가서 적을 해치우고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꽤 인상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TV 방영과 더불어 발매된 완구에도 이런 부분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물론 발사된 방패가 다시 되돌아온다는 점까지 재현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버튼을 누르면 방패가 스프링의 힘에 의해 앞으로 튀어나가는 작동은 당시의 한국 완구 산업의 기술력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매력적인 완구를 너무 가지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한참 생떼를 썼다. 옆집에 사는 아이가 자꾸만 이 로봇 완구와 그것을 사다준 부모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의 욕심은 더욱더 커졌다. 그 당시에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도 골치가 아팠을 어머니로서는 어린 아들의 생떼가 곤란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고 완구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귀가를 기다리면서 로봇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펼쳤다. 이 로봇을 손에 넣으면 옆집의 그 녀석에게 가서 자랑을 할 심산이었다. 곧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상자를 빼앗듯이 가져와 로봇을 꺼냈다. 내가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메칸더 V’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자 뭔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었다. 일단 ‘메칸더 V’는 빨간색과 노란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갖게 된 것은 분홍색과 검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로봇의 여러 가지 다양한 동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의 각 관절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는데 내가 갖게 된 로봇은 오직 팔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는 ‘만세’ 포즈와 ‘앞으로 나란히’ 포즈 밖에 재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실망한 부분은 팔에 부착된 방패가 단단하게 고정되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는 제품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왠지 어머니가 어렵게 사다 준 것이니만큼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같다. 당시 내 나이는 6살이었다. 최대한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힘없이 웃고 말았지만 내심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없어 변변찮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내 경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메칸더 V’가 유행한 다음에는 ‘킹라이온’이라는 로봇이 유행했다. 이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 TV 애니메이션에서 ‘볼트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그 당시에는 오직 비디오 가게에서 〈골라이온〉으로 명명된 비디오를 빌려야만 볼 수 있었다. 즉, 〈골라이온〉에 등장하는 ‘골라이온’이라는 로봇을 국내의 완구사가 ‘킹라이온’이라는 이름의 완구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 저작권 개념이 완전히 잡혀있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 로봇의 특징은 다섯 마리의 사자 로봇이 합체를 하여 하나의 커다란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을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완구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로봇을 구입하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비용을 각오해야 했다.

나는 ‘메칸더 V’의 일도 있고 하여 큰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이것을 사달라고 졸랐다. 이번만큼은 진품을 갖고 싶어서 자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가난했던 어머니는 이 요구를 쉽게 들어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쉽게 그러마 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거의 포기하고 체념할 때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윗집 아이가 이 로봇을 구입해서 가지고 노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매사에 남의 집 아이들에게 주눅이 들어서야 되겠는가. 결국 어머니는 또 이 로봇을 사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머니가 그 로봇을 사다 준 날은 내 놀이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쁨을 얻은 날이었다. 어린 내 눈에 그 로봇을 포장한 박스가 엄청나게 컸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포장 박스를 개봉했다. ‘킹라이온’의 늠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봇의 허리에 달린 벨트 부분이 빨간색이었던 것이다. 비디오에서 본 로봇의 벨트는 노란색이었다. 혹시나 해서 나는 포장 박스 겉면에 그려진 로봇의 모습을 확인해보았으나 거기에 그려진 벨트는 노란색이었다.

당시 완구 산업의 수준을 고려해보았을 때 벨트 색깔 때문에 제품 가격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마 플라스틱이 성형된 시기와 로봇을 제조한 라인에 따라 세세한 디테일이 보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아마 내 로봇은 구형 버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로봇의 벨트 색깔이 빨간색이라는 점은 ‘메칸더 V'의 기억과 함께 내 마음 속에 슬픔으로 남았다. 내가 다른 집 아이들처럼 눈만 뜨면 뭘 사달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왜 어렵게 장난감을 얻을 때마다 꼭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가? 어린 마음에도 이것은 어떤 부조리로 내게 다가왔다.

이러한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이 돈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에 가입을 시켜서 리더십을 키우고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게 만들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 그들이 입는 제복이 꽤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나도 보이스카우트에 가입을 하고 싶어 학교에서 신청서를 받아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어머니는 신청서를 대충 읽고 “네가 하고 싶다면 해보는 것도 괜찮다”라며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나는 보이스카우트의 군청색 제복을 입고 노란색 스카프를 맨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설레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때는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면 뭔가 또래들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도 잠시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어머니의 일방적인 통보로 이러한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보이스카우트를 하기 위해서는 복장 등을 구입해야 하고 가입 비용도 든다고 하더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내가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돈이 없다는 데 더 이상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이스카우트가 되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우리 집 바로 길 건너에 있었다. 창문을 열면 초등학교 운동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일 년에 한 번 큰 행사를 개최한 후 그날 저녁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지냈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그 행사를 치르는 때가 돌아왔는데 덕분에 우리 집의 내 방 안까지 그들의 시끌시끌한 축제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숙제 때문이었는지 사회 교과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 단원들의 즐거운 비명소리 때문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돈이 있었다면 나도 저들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운동장에서 캠프파이어를 위해 큰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재미있게 축제를 즐기고 있을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소속 친구들의 기분을 상상해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한 번 눈물이 쏟아지자 쉽게 멈출 수 없었다. 방 안에 앉아 눈물을 참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깨닫고 나니 갑자기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는 아예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빨래를 개고 있던 어머니는 깜짝 놀라 달려왔다. 아들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으면 돈을 빌려서라도 하게 해줄 것을 그랬다”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대체로 무뚝뚝한 편이라 웬만한 일로는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즉, 어머니가 저렇게 말할 정도였다는 것은 보통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말에 나도 당황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의 가난한 형편에 대한 한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는 눈물을 닦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자기가 애초에 가지고 있는 그릇이 그런 모양인 사람, 즉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객관적으로 가정환경이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을 무작정 억눌러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금전으로 채울 수 있는 욕망의 일부를 적당히만 채워주면 별 불만 없이 잘 참고 사는 사람으로 이런 성격은 돈이 없어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어 학습된 결과였다.

처음에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엔 참고 다음번에 원하는 걸 얻도록 하자!”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다음번’이라는 것은 오지 않았다. 돈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직관은 계속 경험적으로 강화됐고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즉, 내가 반 토막 난 욕망의 대상에 만족을 느끼는 동안 나머지 절반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이가 먹은 지금에야 스스로 돈을 버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어린 시절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공상을 하기 시작했다. 공상을 통해 나머지 욕망을 채웠던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아이들이 내가 살 수 없는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놀고 있을 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 아이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놀 때 내가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무언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어차피 장난감은 살 수 없으니까 다른 이유를 들어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9살쯤 되던 해에 아버지가 모처럼 거금을 들여 ‘현대 컴보이’라는 게임기를 사왔다. 일본에서 개발된 ‘패미컴’이라는 게임기를 닌텐도가 미국 시장에 수출하면서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는데 이것을 다시 한국에 들여와 ‘컴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당연히 ‘컴보이’와 ‘NES’는 이름만 다를 뿐 구성은 완벽하게 같았다. 그 당시 그런 게임기를 가정에 구비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NES’나 ‘패미컴’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 컴보이’를 소유한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했다.

이 게임기의 기본 게임 카트리지로 ‘슈퍼마리오3’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 게임기에 포함되어 있는 카트리지로는 스테이지 7 중반을 클리어할 수 없었다. NES를 구입한 친구들의 ‘슈퍼마리오3’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였는데 말이다. 즉, 내 것은 버그가 있는 버전이었던 것이다.

당시 ‘현대 컴보이’에 들어간 카트리지가 다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이 상황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뭔가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NES와 비교하면 현대 컴보이에 뭔가 특수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슈퍼마리오3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공상을 해보았다. 특정한 스위치를 누르면 화려한 그래픽 모드가 동작한다던지, 해외의 불특정 다수와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된다던지 하는 내용들이었는데, 물론 그런 공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때는 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떤 열등감을 감추고 극복하기 위한 자기기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남의 것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열등감을 극복해야 했던 것이다. 나라고 왜 좀 더 비싼 장난감이나 좀 더 성능 좋은 전자기기를 가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내가 가진 물건들이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고, 우리 집이 가난한 이유는 부모님이 이 사회에 남들보다 덜 적응한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기보다는 이 가난의 대가로 어떤 가치 있는 무엇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쪽이 편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이러한 생각에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릴 때에야 기껏해야 장난감에서 박탈감을 느꼈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크고 비싼 것에서 박탈감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놀러간 어느 친구 집에는 화면이 컬러로 나오는 컴퓨터가 있었다. 친구는 컴퓨터를 이용해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지켜보다 한 번씩 컴퓨터 게임을 조금씩 즐겨보았다. 저녁때가 되어 그 집을 나서는데 발길이 너무도 무거웠다. 컬러 화면이 나오는 컴퓨터가 정말 갖고 싶었다.

사실 컴퓨터에 대한 애착은 아주 어릴 때에 생겨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종종 놀러갔던 이모님 집에는 ‘286-XT’라고 불리던 구형 컴퓨터가 있었다. 이 컴퓨터를 이용해 종종 테트리스 등의 게임을 하곤 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컴퓨터에 계속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는 컴퓨터 학원에 등록시켜주었다. 지금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때에도 피아노 학원이나 컴퓨터 학원 하나쯤은 다녀야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성이 부족한 어른이 될까 염려하며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컴퓨터 학원에서 주로 배웠던 것은 ‘GW-BASIC’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였다. 그때 나이가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 학원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꼬마들에게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쳤던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컴퓨터 학원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훨씬 더 흥미로웠던 것은 ‘페르시아 왕자’, ‘타이투스 더 폭스’와 같은 게임들을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게임들을 즐기기 위해 컴퓨터 학원에 꼬박꼬박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게임이라도 하게 해주지 않으면 10살 먹은 어린이들이 그걸 진득하게 배우고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컴퓨터 게임에 맛을 들이게 되었는데 자금난에 시달리던 컴퓨터 학원이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다. 왠지 억울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도 컴퓨터를 만져볼 장소가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결국 부모님이 또 큰마음을 먹고 돈을 써서 286-AT급의 CPU에 흑백 모니터를 갖춘 컴퓨터가 생겼다. 나는 정말 신이 났다. 이 비싼 장난감을 완벽하게 가지고 놀기 위해 아마 이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 사양의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당시에 슬슬 386급의 컴퓨터와 컬러 모니터가 가정에 보급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의 컴퓨터 놀이도 금방 한계에 부딪쳤다. 하지만 어차피 새 컴퓨터를 살 돈 같은 건 없었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기존의 컴퓨터를 가지고 놀이를 계속해야 했다. 결국 GW-BASIC 언어를 이용해서 게임 같은 것을 혼자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화려한 그래픽을 구현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했고 그저 선택지를 제시하고 선택을 하게 해서 스토리를 진행하는 텍스트 어드벤처 같은 모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상황에서 남의 집에 번듯하게 놓여 있는 고성능 컴퓨터를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드는 일이었다. 다행히 당시에 컬러 모니터를 갖춘 고성능 컴퓨터를 소유한 어머니의 친한 친구가 근처에 살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있어 그것을 핑계로, 속으로는 오직 고성능 컴퓨터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서 그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컴퓨터에 대한 나의 이런 열정을 절대 모른척하지 않았지만 금전적 문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아들의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때문에 내가 공상을 통해 채워 넣어야 하는 욕망의 깊이도 점점 더 깊어졌다.

더 이상 공상을 통해서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게 되자 욕구불만이 분노와 증오의 감정으로 표출될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결국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100MHz의 속도로 작동하는 펜티엄 컴퓨터를 구입하셨지만 그때는 또 다른 것들에 대한 박탈감을 너무 많이 느낀 채 욕망의 크기가 자꾸만 커져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부모님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것, 먹는 것, 입는 것에 만족스럽다고 생각해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IMF’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외환위기의 시대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돈이 없어 욕구불만에 시달리며 이렇게 사는 것도 어떤 종류의 부당한 운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흔히 말하는 사춘기로,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였기도 했고 워낙 IMF의 충격이 사회 각 부분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면서 불신과 갈등을 유발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에 대해 당시의 어른들은 떳떳하지 않은 정경유착과 투명하지 않은 사회부조리가 문제였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신문의 사설도, TV도, 사회의 모든 존재들이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정치인과 관료들, 기득권층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때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살았는데,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높은 사람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고 모두들 말했다.

어른들은 이러한 불만을 정권을 바꾸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 만큼, 나와 같은 사람들도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불만스러움의 근거를 새삼스레 이런 구석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 물정을 잘 몰라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우리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을 온 사회가,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시끄럽게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그러한 불공평한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록 음악에 심취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때는 나 자신을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전형적인 반사회적 인격을 갖추게 되었던 모양이다.

요컨대,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로 계속해서 사회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단지 공상을 통해 스스로를 기만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었을 따름이라는 것을 이 시기에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공상이라는 자기기만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믿음도 얻게 되었다. 즉, 내가 많은 것들을 참아가며 살아왔던 이유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하필이면 내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이유는 그저 사회 자체가 불공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떤 다른 종류의 보상이 나에게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많은 것을 참아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조합해 ‘프롤레타리아트 레지스탕스 정신’이라는 말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도대체 내가 어디서 저런 말을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할 말을 해야 세상이 바뀐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떠들어댔다.

결국 나는 학교 홈페이지에 익명으로 여럿이서 투고를 해서 부조리를 고발하는 모임을 만들고, 선생님들의 알력 관계를 풍자한 만화를 그려 칠판에 붙이고, PC통신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가당찮은 논평을 내기도 하면서 나름 나만의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에게 정체를 들킨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넓었던 선생님은 그냥 웃고 넘어가주셨다. 옆 반 담임선생님에게 들켰다면 분명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어쨌든 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저항을 계속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좀 더 진지하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돈이 없어 어린 시절 내내 불만에 가득 차 살았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존경쟁을 시작하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평생을 불만족에 찌들어 살게 될지도 모른다. 돈이 없어 죽지도 못하는 비굴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후회만이 남을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느니 불평등한 사회에 맞서자. 결국 넓은 바다에 섞인 한 알의 모래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살자. 돈이 없어도 삶에서 최소한의 행복을 건질 수 있는 삶을 살자. 이것이 내 삶의 태도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날 ‘운동권’이라 불리는 진보정당 활동가가 되었다. ‘돈이 없는 삶’이란, 결국 나에게 이런 의미로 남은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돈을 많이 갖게 되는 인생보다도 죽기 전에 후회가 남지 않을 인생을 살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아마 경제적 궁핍함 때문에 실제로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인생 중에서 그래도 내가 꽤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하고 말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나는 ‘피하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포기하길 강요당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벌어진 일이다.

* 이 글은 자음과 모음 R / 2011년 6월 / 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댓글 '2'

독자

2011.09.28 10:57:44
*.91.137.50

큰 스승님 이 부분은 위대한 책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에도 나오지 않은 부분이네요! 한 권 더 쓰셔야겠음!

걸이

2011.09.28 16:44:40
*.231.169.240

담백하면서도 단단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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