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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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엔 드디어 고시텔 생활을 청산하고 투룸으로 이사했다. 적어도 향후 2-3년간은 여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살 것 같다. 월세가 33만원 정도이니 그럭저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여동생과 어머니가 가전제품을 고르는 걸 보니 이건 도저히 '한 살림'이지 자취생이라고 불러줄 수가 없다. 내가 상도동 큰 원룸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그때도 웬만한건 다 갖춰놓고 살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얻거나 중고품을 사거나 했다. 하지만 여동생과 어머니의 머리속에는 도무지 중고품이란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집에 들어온 기계장치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또 몇 년간은 꼼짝없이 부모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가정주부 경력은 물경 26년에 다다르지만, 내 자취생 경력도 4년(2001-2004년)이니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물건을 사는데 가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두 견해가 충돌하곤 했다.
가령 쓰레기 봉투를 살 때다. 어머니는 당연한 것처럼 10L짜리 쓰레기봉투 20장을 집어들었다. 나는 항변했다. 마땅히 20L짜리 봉투를 사야된다고. 10L짜리를 사려면 아까 뭐하러 커다란 쓰레기통을 샀냐고. 내 머리속에서, 쓰레기봉투란 큰 쓰레기통을 커버하고 있다가 쓰레기가 차면 한꺼번에 묶여서 밖에 버려지는 어떤 물건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다른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넣어놓았다가 10L짜리에 꾹꾹 눌러담아서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다 돈 아니냐고. 나는 투덜거린다. 봉지값 얼마나 한다고. 현금카드 수수료만큼도 못 아낄 것을. 게다가 그럼 도대체 저 큰 쓰레기통에 어떤 봉지를 꽂아놔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큰 비닐봉지를 꽂아뒀다간, 나중에 10L짜리에 담기 위해 쓰레기를 해체해야 할 게 아닌가.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뭐하러 그런 더티한 짓을 한담.
여하간 이건 내가 졌다. 나는 이 봉투만 다 쓰면 20L짜리로 사야겠다고 다짐한다.
샴푸같은 거 살때도 그냥 내가 제일 싼 거 골라서 집어넣으면 다시 꺼내놓고 엘라스틴이 좋다고 그러고, 거기다 대고 내가 엘라스틴이 '제일 비싸다'고 항변하면 이것저것 집어들면서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고 있다. 하긴 이건 여동생이랑 같이 쓸 거니까 내가 좀 심하긴 했다.
그래도 국자를 살 때는 내가 이겼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면빨 건지는 이가 나있는 국자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어머니가 그걸 다시 꺼내들더니, "이런 걸론 (국물이 빠져나가서) 많이 못 푸잖아. 왜 이런 걸 사?"라고 물었다.
내가 냉소하며 내뱉었다. "엄마, 우리가 찌개를 더 자주 먹을 것 같아, 아니면 라면을 더 자주 먹을 것 같아?"
이때만은 엄마도 뭔가 움찔하며 그대로 놔뒀다. 뭔가 자기가 모르는 세상을 접했다는 표정이었다.
(주방용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동생이 집에서 들고 왔다는 후라이팬을 바라보면서 나는 탄식했다. 이건 뭐 계란후라이만 가능하잖아. 고기 구워먹을 수 있는 후라이팬 크기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어떡해?' '괜찮아. 싸구려 후라이팬 큰 거 한 6500원밖에 안 해. 나중에 사자.')
컴퓨터 책상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방엔 컴퓨터는 아직 없다. 컴퓨터는 월급받으면 내 돈으로 사기로 했다. 지금 이 글은 요새 대개 그랬듯 피시방에서 쓰고 있다.) 내가 예전에 상도동 자취방에서 쓰던 컴퓨터 책상은 인터넷에서 주문 구입한 3만원 짜리였다. 실제로 물건이 와서 조립해보니 인터넷에서 볼 때와 다르고 너무 약해서, 망치로 여러 군데 못질해서 써야 했다. (내가 못질을 한 건 아니고 KDY가 와서 해줬다.)
어차피 사당동은 가구점으로 유명한 거리라 실제로 둘러볼 수 있었는데, 나는 가장 노멀하고 값싼 6만원짜리 책상을 사고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 돈이 나가는 주제에 뭔가 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어했다. 내 사촌누나 네서 본 컴퓨터 책상도 되고 그냥 책상도 되는 뭐 그런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절망하면서 그런 책상을 찾았는데, 그 책상은 무려 12만원이나 하는 데다가 크기도 1200 * 1600이었다. 내 생각에, 그 정도 크기면 내 방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두 개 방 중 큰 건 여동생 주고 작은 걸 내가 쓴다.)
결국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노멀한 것보다 약간 더 크고 튼튼해 보이는 10만원짜리 책상을 샀다.
이리하여 나는 여동생과 함께 사당1동 주민이 되었다. 지금은 너무 바쁘고 3월이 오면 동사무서 가서 주소지 정리도 해야겠다.
하지만 쓰레기봉투 쪽에선 어머니 말씀에 동감. 나는 자취 시작한 이래 그러고 지낸 지 오래 되었으니.. 글고 '작은' 차이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뿐더러, 쌓이면 커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