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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취생 vs 가정주부

조회 수 999 추천 수 0 2007.02.13 01:32:59

지난주 수요일엔 드디어 고시텔 생활을 청산하고 투룸으로 이사했다. 적어도 향후 2-3년간은 여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살 것 같다. 월세가 33만원 정도이니 그럭저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여동생과 어머니가 가전제품을 고르는 걸 보니 이건 도저히 '한 살림'이지 자취생이라고 불러줄 수가 없다. 내가 상도동 큰 원룸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그때도 웬만한건 다 갖춰놓고 살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얻거나 중고품을 사거나 했다. 하지만 여동생과 어머니의 머리속에는 도무지 중고품이란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집에 들어온 기계장치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또 몇 년간은 꼼짝없이 부모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가정주부 경력은 물경 26년에 다다르지만, 내 자취생 경력도 4년(2001-2004년)이니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물건을 사는데 가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두 견해가 충돌하곤 했다.

가령 쓰레기 봉투를 살 때다. 어머니는 당연한 것처럼 10L짜리 쓰레기봉투 20장을 집어들었다. 나는 항변했다. 마땅히 20L짜리 봉투를 사야된다고. 10L짜리를 사려면 아까 뭐하러 커다란 쓰레기통을 샀냐고. 내 머리속에서, 쓰레기봉투란 큰 쓰레기통을 커버하고 있다가 쓰레기가 차면 한꺼번에 묶여서 밖에 버려지는 어떤 물건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다른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넣어놓았다가 10L짜리에 꾹꾹 눌러담아서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다 돈 아니냐고. 나는 투덜거린다. 봉지값 얼마나 한다고. 현금카드 수수료만큼도 못 아낄 것을. 게다가 그럼 도대체 저 큰 쓰레기통에 어떤 봉지를 꽂아놔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큰 비닐봉지를 꽂아뒀다간, 나중에 10L짜리에 담기 위해 쓰레기를 해체해야 할 게 아닌가.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뭐하러 그런 더티한 짓을 한담.  

여하간 이건 내가 졌다. 나는 이 봉투만 다 쓰면 20L짜리로 사야겠다고 다짐한다.

샴푸같은 거 살때도 그냥 내가 제일 싼 거 골라서 집어넣으면 다시 꺼내놓고 엘라스틴이 좋다고 그러고, 거기다 대고 내가 엘라스틴이 '제일 비싸다'고 항변하면 이것저것 집어들면서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고 있다. 하긴 이건 여동생이랑 같이 쓸 거니까 내가 좀 심하긴 했다.

그래도 국자를 살 때는 내가 이겼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면빨 건지는 이가  나있는 국자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어머니가 그걸 다시 꺼내들더니, "이런 걸론 (국물이 빠져나가서) 많이 못 푸잖아. 왜 이런 걸 사?"라고 물었다.

내가 냉소하며 내뱉었다. "엄마, 우리가 찌개를 더 자주 먹을 것 같아, 아니면 라면을 더 자주 먹을 것 같아?"

이때만은 엄마도 뭔가 움찔하며 그대로 놔뒀다. 뭔가 자기가 모르는 세상을 접했다는 표정이었다.

(주방용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동생이 집에서 들고 왔다는 후라이팬을 바라보면서 나는 탄식했다. 이건 뭐 계란후라이만 가능하잖아. 고기 구워먹을 수 있는 후라이팬 크기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어떡해?' '괜찮아. 싸구려 후라이팬 큰 거 한 6500원밖에 안 해. 나중에 사자.')  

컴퓨터 책상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방엔 컴퓨터는 아직 없다. 컴퓨터는 월급받으면 내 돈으로 사기로 했다. 지금 이 글은 요새 대개 그랬듯 피시방에서 쓰고 있다.) 내가 예전에 상도동 자취방에서 쓰던 컴퓨터 책상은 인터넷에서 주문 구입한 3만원 짜리였다. 실제로 물건이 와서 조립해보니 인터넷에서 볼 때와 다르고 너무 약해서, 망치로 여러 군데 못질해서 써야 했다. (내가 못질을 한 건 아니고 KDY가 와서 해줬다.)  

어차피 사당동은 가구점으로 유명한 거리라 실제로 둘러볼 수 있었는데, 나는 가장 노멀하고 값싼 6만원짜리 책상을 사고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 돈이 나가는 주제에 뭔가 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어했다. 내 사촌누나 네서 본 컴퓨터 책상도 되고 그냥 책상도 되는 뭐 그런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절망하면서 그런 책상을 찾았는데, 그 책상은 무려 12만원이나 하는 데다가 크기도 1200 * 1600이었다. 내 생각에, 그 정도 크기면 내 방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두 개 방 중 큰 건 여동생 주고 작은 걸 내가 쓴다.)

결국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노멀한 것보다 약간 더 크고 튼튼해 보이는 10만원짜리 책상을 샀다.

이리하여 나는 여동생과 함께 사당1동 주민이 되었다. 지금은 너무 바쁘고 3월이 오면 동사무서 가서 주소지 정리도 해야겠다.

시만

2007.02.13 10:34:20
*.150.179.78

'어머님의 움찔' 부분에서 폭소^^
하지만 쓰레기봉투 쪽에선 어머니 말씀에 동감. 나는 자취 시작한 이래 그러고 지낸 지 오래 되었으니.. 글고 '작은' 차이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뿐더러, 쌓이면 커진다오.

kritiker

2007.02.13 11:37:15
*.238.97.206

후라이팬은 테팔로;ㅇ;

오필리어

2007.02.13 12:42:17
*.49.100.146

kritiker님 말에 한표. 후라이팬은 좀 비싸더라도 좋은 거 사시오. 싼건 쓰다보면 금방 불에 타고 음식에 쇳가루 묻어나니 오히려 손해...

이상한 모자

2007.02.13 13:01:24
*.63.208.238

샴푸는 엘라스틴.

시만

2007.02.13 13:08:09
*.150.179.78

엘라스틴은 매우 독하다던데...;
(이모 님 잘 계시죠?)

8con

2007.02.13 14:25:00
*.55.101.110

저도 kritiker님 말에 한표.

지나다가

2007.02.13 21:02:13
*.84.242.150

윽 테팔이 대세군요.심사숙고 하심이(테팔과 웬쑤아님)...테팔은 알게 모르게 코팅이 벗겨집니다(코팅이 나쁜 건 아시죠?).두꺼운(밑줄) 스텐이나 무쇠로 사셔서, 몇번만 길을 들이시면(설명서대로)거의 영구적으로 사용가능 하고 `인체에 무해'합니다.

하뉴녕

2007.02.14 00:19:21
*.148.250.68

테팔 써보긴 했는데, 가격은 잘 모릅니다. 싼 거 사도 한 일년은 쓸만해요. 그리고 대개는, 돈이 모이기 전에 고기가 먼저 먹고 싶죠. 삼겹살 구워먹으려다보면 싼 후라이팬을 사게 되고...-_-;;;

동강사랑

2007.02.15 10:15:09
*.239.81.61

커피포트에 라면 먹던 그리운 옛? 생각이~
지금은 두아이의 아빠지만,
아직도 배고프면 직접 해먹어야 되는!
고로 자취생활중 요리법은 제대로 배웁시다,, ㅎㅎ

하뉴녕

2007.02.17 14:15:43
*.148.250.73

그러게요. 그래야 할텐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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