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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민주주의와 좌파의 문제

조회 수 3156 추천 수 0 2009.09.20 11:30:18


 

김진석, “진보도 단순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http://blog.aladdin.co.kr/windshoes/3078380

이택광, “진보개혁세력의 패착”
http://wallflower.egloos.com/1949841


여기 두 편의 글이 있다. 이 두 편의 글은 얼핏 보면 흡사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김진석의 글을,


1) 이명박 정부를 파시즘이라 비난하는 것은 정확한 기술도 아니고, 유용한 전략도 아니다.

2) (이명박 정부에 대처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진영논리에도 문제가 있다.
3) (이명박 정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관점이 요구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면, 이택광의 글은,


1)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세력이라 비난하는 것은 진보개혁세력의 패착이다.

2) 그건 진보개혁세력만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오만함으로 대중들에게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3) 합의민주주의를 전복시킬 정치적 비전이 없다면 그 틀에 적합한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글의 내용은 자세히 읽어볼수록 다른 점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겹친다. 어쩌면 두 사람이 말하려는 바는 흡사하지만 한 사람은 자유주의자의 포지션에서, 다른 한 사람은 좌파의 관점에서 제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느낌이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제언이 무얼 겨누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지금의 현실로 되돌아오자. 이명박의 지지율이 50%란다. 반응은 가지가지다. 여론조사가 조작일 거라는 식의 현실도피형이 있고, ‘중도실용노선’, ‘민생행보’라는 이명박의 거짓말에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식의 비판론이 있다. 결국 우리는 여론조사기관이든, 조중동이든, 이명박이든, 무언가에 속고 있다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의미 있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문맥을 받아들인다면, 국민들이 속지 않았다면 이명박은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테다. 이런 어법은 한국 사회에서 여론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좌파의 세뇌와 MBC의 선동 때문에 사태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무지한 국민들을 잘 속여서 사태가 이렇다, 라고 설명하는 쪽이 있는 거다. 한줄짜리 정치논평이며, 정치논평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정치논평이다. 두뇌활동을 거부하는 ‘세뇌’론을 자꾸 되뇌이다 보면 유인촌 장관처럼 ‘새뇌’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두 사람의 제언이 일치하는 부분은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김진석의 말은 이명박 정부가 아직까지 파시즘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흩트리지는 않은 체제로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편 이택광의 말은 이명박 정부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체제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양자는 포인트는 다르지만 하나의 현상을 지시한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다수 국민의 욕망을 대변하여 탄생한 정부이며, 따라서 굳이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지 않아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정부다. 김진석은 파시즘과 대의민주주의를 대당관계로 보는 반면, 이택광은 ‘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요건으로 여기고 있을 듯 하지만, 이런 세밀한 분석은 여기서는 하지 말자. 여기서 핵심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 50%가 우리의 호들갑처럼 어떤 비정상적인 사태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유예되었던 ‘정상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혹자는 그 지지율엔 부동층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명박이 대한민국 국민의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내세워 이명박 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완곡하게 부인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의 정당성도 인정될 수가 없다. 지지자가 많은 이가 당선되는 것이 옳은지, 비토세력이 적은 이가 당선되는 것이 옳은지는 각 나라의 선거 제도에 따라 결정되는 ‘우연적인’ (그러나 각 나라의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반영한) 조건인 것이지, 그 자체로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 성격’을 지지자의 숫자로 얘기할 수는 없는 이유다.


말하자면 다수의 욕망을 위임받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정서를 거스르는 몇몇 실책을 통하여 촛불시위 등의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는 기존의 반MB진영과 부동층이 결합하여 이명박 정부를 ‘소수파’로 보이게 했지만, 이명박을 뽑은 이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행보를 보여서 본연의 지지율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거다. 이에 대해선 이택광이 ‘정치를 초월한 중성국가’라는 측면에서 그의 <무례한 복음>에서 분석을 한 바 있다. 이명박은 정치를 거부하고 경제만을 중립적으로 관장하는 국가를 국민에게 약속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국민들이 이명박에게 바라던 바라는 것이다. 박원순을 탄압하면서도 황석영과 정운찬을 포섭하는 이명박 정부의 책동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겠다. 명박 정부 초기의 ‘민생 행보’와 지금의 ‘민생 행보’는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이것이 국민들로 하여금 이명박을 선택하게 한 본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도실용’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명박의 행보를 중도실용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호응하는 사람들은 사실 중도실용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명박이 ‘위선적’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이명박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국민들의 욕망이 소수자를 괴롭히고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공동체에 해가 될 것이라는 게 문제의 핵심인 거다.


이 문제에 대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기적으로는 다수결에서 승리한 욕망이라 하더라도 소수자들의 건드릴 수 없는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제시하자고 말할 때, 이택광이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것일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그 욕망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보좌파가 추상적인 구호를 ‘진영논리적으로 반복’하지 말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김진석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일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두 사람이 의미하는 자유주의는 전혀 다른 것으로 갈라선다. 이택광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를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다. 이 때에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양대축이다. 가령 다수의 민중이 부자의 재산을 뺏어야 한다고 주장할 지라도, (그 경우 정치적 소수자인) 부자의 재산권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자유주의자라는 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부르주아를 위해 만들어진 논리이기는 하지만, 이 이념의 보편화는 민주주의 정체의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를 실현하는 도구적 이념이 법치주의라 볼 수 있다. 통치자(참주가 되었든, 다수 인민의 의지가 되었든)가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법에 의해서만 통치를 할 수 있다는게 법치주의인 것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법 자체가 대다수 국민이 지킬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하는 상태에서, 정부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이들만 법으로 처벌하고 그것을 ‘법치주의’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전략으로 내세운다면 그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왜곡된 법치주의를 올바른 맥락의 법치주의로 되돌리기 위한 싸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진석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좌파의 원칙론에 반대되는 어떤 유연함을 의미한다. 유토피아를 설정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라는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론이나, 진리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사에 잘 대처하는 것을 중시하라는 리차드 로티의 네오 프레그머티즘과 비슷한 개념인 것 같다. 물론 포퍼나 로티가 ‘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의 용법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이렇게 좌파의 정치기획과 구별되는 ‘유연함’을 자유주의의 본령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사뭇 의아한 점이다. 가령 존 롤즈가 내세운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좌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뭇 원칙적인데, 그렇다고 롤즈를 ‘자유주의적’이 아니라 ‘좌파적’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온건한 자유주의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과격하게 자유와 거부를 외치는 흐름이 필요”하다는 진술에서는 그 역시 자유주의적 정의를 강변할 수밖에 없음이 명백한데 말이다.


그러한 다소의 혼동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볼 때 더 수미일관한 쪽은 김진석 쪽이다. 김진석의 제언은 어쨌든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의 개혁을 꾀하고 있고, 그 자신 자유주의의 포지션이라는 점에서 별반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택광이다. 이택광의 글은 깔끔하고 논리적이지만, 좌파의 기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유주의적 정의를 말해야 한다는 어떤 간극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좌파적 기획, 그리고 자유주의적 실천”이 어째서 좌파에게 유의미한 전략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왕년의 진중권이 ‘본능적으로’ 실천한 일에 대한 개념적 정당화 작업이다.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진보신당의 경우도 활동가들이 이념의 측면에서는 좌파 이념을 고수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개량’이라 칭하면서도, 정작 활동의 차원에서는 사민주의/자유주의적 실천을 기본 베이스로 삼고 그것을 벗어나는 이들을 ‘비현실적’이라 배척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이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긴 한데, 이렇게 ‘정상’과 ‘정상’이 포개어져서 생겨나는 ‘비정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하나의 과제다. 한국 사회의 우파/자유주의자들이 무능해서 생긴 일이라고 푸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푸념은 딜레마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김진석이 좌파 담론은 충분하지만, 자유주의적 담론은 부족하다고 개탄한 것은 조금 불편하다. 좌파 담론이 자유주의 담론보다야 많겠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고, 자유주의 담론이 희소한 것에 대해 좌파들이 책임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부족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실천이 아닐까. 물론 이는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김대중-노무현 시절 자유주의자들이 정치권력과 어떤 관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대거 담론시장에서 낙마해 버린 탓이 크다.)   


이 지점에 대한 고민은 아직 명쾌한 해답을 찾지는 못하고 있는데, 오히려 구체적인 활동 사례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중이다. 아마 머지 않은 장래에 다른 글에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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