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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08.05.26 14:51

노정태 조회 수:3115

나 자신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반추해보도록 한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너 몇 살이야?"라고 물었다면, 그건 아마도 상대방이 '형'이나 '선배'라는 권위를 빌어오려고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83년생으로 1년 빨리 개띠들의 학교에 들어갔던 나는, 언제나 최연소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수도 하지 않았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어울려 놀게 된 딴지일보 일당들 또한,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으로 돌보아주긴 했지만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내가 너보다 형으로서 말하는데' 같은 표현을 쓰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가령 지난번에 김대영, 한윤형이 술을 마시고 있던 자리에서, 고려대 선배라는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나더러 선배 대접을 해달라는 식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물었다. '몇 학번이신데요? 97? 아, 나 걔들하고 술 좀 많이 먹었는데...'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 여자친구보다 학번이 낮네요.' 하지만 나는 한윤형이 한윤형의 방에서 나간 순간부터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정황은 영원히 미궁 속에 잠겨있겠지.

한윤형이 꼬집은 내 옆구리가 아직도 아프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한테 화를 내고 힘을 쓸 여력이 있다면, 갑자기 자신의 옆구리를 꼬집고 들어오는 그 상대방에게 그 힘을 쓰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 말의 표현을, 비웃으면서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갑자기 감정이 확 상했을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윤형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계속 내게 뭔가 불만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그게 뭔지 말도 하지 않다가 대뜸 절교를 하네 마네 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까지 화를 내길래, 집에 오는 길에, 또 일요일 하루를 들여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원쓰리에서 한윤형은 '그럼 네가 하는 그 소리는 네가 비웃는 문화비평과 다를 바가 뭐냐'고 했는데, 나는 내가 '문화비평'을 할 때에는 나 자신도 비웃는다. '씨네 설레발리스트'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 아닌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휘와 그 어조의 강도 등에서 내가 심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여자친구와 심도 깊은 대화도 나누어보았고, 그래서 토요일에는 가급적이면 부드럽고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려 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술자리가 격해지기 전까진 그렇다. 나랑 이상한 모자랑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그게 보기 싫었나?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지속적으로 쌓여온 감정이 있다면, 한윤형은 그걸 그런 식으로 터뜨리지 말고 평범한 언어로 기술을 해줬으면 한다.

나는 한윤형이 스스로를 '술 마시는 자' 정도로 정의하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세기말적 우울에 혼자 빠져들어가는 것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러면 또 나더러 '신지식인'이라고 하려나?)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글을 꾸준히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안 움직여준다고 혼자만의 비관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을 보면 내가 다 분통이 터진단 말이다. 요즘은 자꾸 말끝마다 '그건 법대식 사고 방식이고' 라는 식으로 내 논의를 반박하려 하는데, 그건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대꾸하지 않고 있다. 그럼 철학과 학부 나왔으면 철학과 대학원에 가서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논쟁다운 논쟁을 해보잔 말이다. 대학원 가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내 친구를 존경하고 싶지, 동정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 말이 잘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을 정직하게 수용해줄 것이라는 그런 기대를 유지하고 싶다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토대 위에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내가 한윤형과 놀면서 느꼈던 가장 기분 좋은 부분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는 어떤 사건, 어떤 사실, 어떤 사람 등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점점 하지 않으면서, 나, 나, 나, 이런 식으로만 화제를 몰고가는 것 같다. 그런 영역에 대해서는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그가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동어반복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한윤형에게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봐라. 도와주겠다.

원래 이런 식의 회고를 게시판에 남기지는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밑의 글로 인하여 내가 여기 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 술판이 식고 다들 집에 갔다가 해장했다는 식의 이미지가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즐겁게 마셔놓고 구차한 글을 쓰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을 것이다. 좋게 좋게 넘어가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성미가 진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술자리를 돌이켜보면, 나의 성마른 성격을 중화시켜준 것은 한윤형의 친화력과 사교술이었다. 그의 장점이 나의 단점을 덮어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왠지 아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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