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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 보고서가 18일에 제출됐다. 나는 비록 진보신당의 당직자이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를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주시해오던 터라 통합진보당 사태 수습책의 단초가 될 새로나기 특위의 보고서 내용을 흥미롭게 검토하였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새로나기 특위 보고서 내용은 진보정당으로서의 통합진보당이 새로운 진보의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진보로부터 한 발짝 거리를 두는 데 방점을 찍은, 한 마디로 ‘운동권으로부터의 탈출!’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운동권으로 통칭되는 낡은 진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낡은 진보로부터 벗어나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그저 진보 전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진성당원제로부터의 대안없는 후퇴 

구체적인 부분을 들어 말하자면 진성당원제를 대하는 새로나기 특위의 관점 등이 그렇다. 진성당원제는 지금까지 진보정당의 특징적인 제도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다. 진성당원제의 시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아왔는데, 첫 번째는 재정구조의 투명성이라는 측면이고 두 번째는 당원이 갖는 권리와 책임의 확장이라는 측면이다. 

보수정당의 경우 진성당원제를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이나 이익단체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받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과정은 수차례에 걸쳐 정경유착 등의 부적절한 문제를 야기했다. 진보정당의 진성당원제는 당원으로부터 직접 당비를 걷기 때문에 이러한 부적절한 문제가 벌어질 수 있는 토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그간 진성당원제를 운영해온 진보정당이 내놓던 주장이다.

또, 공직선거 후보의 공천이나 당직 인선 등과 관련하여 보수정당은 지도부가 하향식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반면 진성당원제를 운영하는 진보정당에서는 당 내외에서 치러지는 모든 선거의 후보가 당원의 직접적인 투표권 행사를 통해 상향식으로 결정되어 당 내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잘 보장된다는 주장 또한 진보정당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왔던 것 중 하나다.

그런데 새로나기 특위의 보고서는 자신들의 자랑거리였던 진성당원제로부터 일정 정도의 후퇴를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당직 선거시 투표율 과반 규정의 삭제, 주요 공직 선거 후보자 선출에 대한 오픈프라이머리 실시, 비례대표의 100% 전략공천, 정책의 주요 방향에 대한 공론조사와 타운홀 미팅 추진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물론 그동안 과열돼온 정파 간 갈등이 진성당원제를 끔찍하게 악용하는 것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조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성당원제의 기본 취지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제도를 조정하려고 한다면, 일부분에서는 후퇴를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공직 선거 후보자는 오픈프라이머리를 통해 선출하더라도 당원 규정을 정예화 하여 피선거권을 엄격하게 제한한다던지 하는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나기 혁신 특위의 보고서는 진성당원제의 기본 취지를 부정하지 않는다면서도 일관된 후퇴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걱정스럽다. 가령 투표율 과반 규정은 진보진영의 대다수 단체들이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고자 하는 원칙을 표현하는 것인데, 사실 이는 정파 간의 경쟁적인 투표로 인한 잡음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투표율 과반 규정이 있든 없든 경쟁이 과열 되면 어차피 투표율이 50%를 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정책 방향에 대한 공론조사와 타운 홀 미팅 등은 물론 당의 정책에 다수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좋은 취지를 갖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통합진보당의 포괄정당(Catch-All Party)화를 추동하는 근거로 작용하리라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게 한다. 

정체, 혹은 사실상의 우경화? 

진성당원제로부터의 후퇴나, 다소 성급한 규정이긴 하지만 진보정당의 포괄정당화가 ‘나쁜’ 것이고 이것을 하는 자들을 모조리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는 무조건 안 되는 것도 없고 무조건 되는 것도 없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이러한 혁신 방향이 우리에게 주는 의문은 ‘이러한 방향으로의 혁신은 차라리 민주통합당이 훨씬 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지속적인 좌경화로 현장노동자들 사이에서 진보정당을 전적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민주통합당에 힘을 실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흐름이 표면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19대 총선에서의 전면적인 야권연대로 통합진보당의 진보정당으로서의 색깔이 민주통합당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

물론 민주통합당과 구분되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책도 새로나기 특위의 보고서에는 포함되어 있다. 노동정치의 재정립, 민주노총과의 관계 재설정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 등을 당면 과제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여기에서도 10년 이상 구호로서는 외쳐왔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탐구하고 이를 교정하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오히려 새로나기 혁신 특위의 보고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접촉면을 강화하고 이들 사이에서 펼칠 수 있을만한 진보적 정치활동을 민주노총에 대한 전적인 의존으로 대체했던 지난 진보정당의 오류를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한다. 지금의 민주노총이 노동자 일반을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새로나기 혁신 특위 보고서에 의한 ‘직장인 분회’(이는 민주노동당 시절 ‘현장분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였던 것이다) 등이 노동정치를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노동정치에 대한 이러한 새로나기 특위의 비전은 민주통합당이 한국노총과 정책연대를 하고 지도력을 분점하는 모델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에 대한 책임 있는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진보의 새로운 이정표를 함께 세워야 

새로나기 특위 보고서에 재벌해체론에 대한 재검토가 명시되어 있는 점도 논란거리인데, 통합진보당이 19대 총선 당시 내놓은 통합진보당의 재벌해체공약이 현실성이 없었고 재벌개혁에 대한 명확한 방향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부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나, 이는 단지 재벌해체론에 대한 재검토를 얘기할 것이 아니라 재벌개혁이 결국 국가적 경제정책의 수립으로 귀결되는 것이니 만큼 진보정치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도모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 수준에서 재벌문제에 대한 현실성과 타당성을 갖춘 대안은 통치경험이 있는 민주통합당이 가장 잘 내놓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방향 보다는 진보신당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서 논의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상황인가 하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진보신당 창준위 회원들 중에는 ‘우리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데 남의 당 욕은 해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문제가 결국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수습책이 새로운 진보정치의 이정표로서 기능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공세적으로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라는 것이 생각이 부족한 나의 판단이다. 부디 통합진보당 문제로부터 촉발된 여러 논란이 전체 진보정치가 진정으로 새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이 글은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R'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ww.newjinbo.org/n_news/news/view.html?no=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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