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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그리스 급진좌파와 한국 진보정당

조회 수 2315 추천 수 0 2012.05.23 22:23:33
1974년생 청년 한 명이 유럽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SYRIZA)의 당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급진좌파연합은 2004년 출범해 얼마 전 치러진 총선에서는 원내 제2당의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 유로존 위기와 맞물려 있는 경제위기 때문에 연립정부가 구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6월에 총선을 다시 치르게 되면 급진좌파연합이 1당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이니, 이들이 갖는 정치적 무게가 범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얻고 있는 인기의 비결은 무엇인가? 혹자는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멋있는 외모와 탁월한 선동 능력을 첫째로 꼽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급진좌파연합이 내세운 공약이 국민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들은 유로존의 대주주인 독일이 강요하는 재정긴축을 거부하고 연금과 임금 삭감의 철폐, 노사 단체협상 파기 등 노동자 권리 침해 금지, 의원 면책특권 폐지와 선거법 개혁,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전면적 감사, 그리스 채무에 대한 모라토리엄 선언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전면적으로 주장했다. 


그리스 ‘진보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 AP/연합뉴스

이는 과도한 재정긴축으로 인해 삶의 전반적 영역에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대안적인 정책구호로 어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현실에 적절하게 개입해 대안적인 정책을 내놓은 과정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유럽의 국가들처럼 그리스의 진보정당들도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스탈린주의 정당과 이를 반대하는 좌파정당으로 나뉘어 끝없는 분열과 합종연횡을 거듭해야 했다. 급진좌파연합이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안적인 진보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선택들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이들은 스탈린주의라는 낡은 사상과 결별하고 국내의 정치적 현실에 발 디딘 살아있는 진보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두 번째로 이들은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등 제각각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한 진보적 정파들을 아우르려는 노력을 거듭했고, 이를 체계화하여 당의 근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위기가 현실화되고 우경화의 바람이 몰아칠 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정규직과 청년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 세 가지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진보정치의 일부가 분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체의 운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이처럼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신당은 총선에서 1.13%를 득표하여 정당 등록이 취소됐고,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부정선거로 인한 파장으로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을 망신시키고 있다. 특히 통합진보당의 혼란상은 그야말로 낯부끄러운 것인데, 이 사태의 근원을 따져 그리스의 사례와 비교하면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무엇을 혁신해야 할지를 잘 알 수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자기 정파가 아니면 권력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고집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낡은 사상으로부터 결별하지 못한 특정 정파가 공유하는 철학 때문이기도 하며, 각 정파 간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정치공학적 통합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스 진보정치의 교훈은 이번 사태가 실패로 점철된 한국 진보정당운동 역사에 또 한 번 비극의 기록으로 남을지, 아니면 진보정당운동의 근본적 혁신과 화려한 부활을 불러올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갈 길이 아직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한국 진보정치의 현명한 처신을 기대해본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5221716141

댓글 '4'

백수

2012.05.24 11:31:07
*.182.72.205

오 이렇게 훌륭한 칼럼을.. 역시 큰 스승! 다른 부분은 정세에 따라 각론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스탈린주의라는 낡은 사상과 결별하고 국내의 정치적 현실에 발 디딘 살아있는 진보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이 부분 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2012.05.24 11:41:46
*.237.107.103

각 정파 간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정치공학적 통합이, 역설적이게도 진보진영 고질적 문제를 해결 할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

백수

2012.05.24 12:07:36
*.182.72.20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 민주당 비판적 지지' 노선이라는 큰 그림을 공유하는 정치집단이므로, 의외로 이권을 잘 조정해서 봉합하면 당분간 깨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진보진영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당분간 진보를 대표하는 가장 큰 정치집단의 공식 노선이 비판적 지지가 되고 나머지 잔류 좌파들이 x고생을 해야되는 정세가.....


그런데 대선이 끝나고 나면, 연립정부에도 참석 못하고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한 저 당엔 앞으로 원심력밖에 남지 않을것 같긴합니다.

백수

2012.05.24 12:02:52
*.182.72.205

http://weirdhat.net/xe/index.php?&mid=etc&search_keyword=%EC%8B%9C%EB%A6%AC%EC%9E%90&search_target=title_content&document_srl=35602


불과 육개월 전에 시리자는 '그리스의 진보신당'이라 불릴만큼 작고, 겨우 세번째 크기의 좌파였는데 원내1당을 노리는 상황이라니.. 그런데 쟤네는 선거제도가 어떻길래 거대 양당이 순식간에 무너지죠? 아니면 선거제도 따위 무시할 정도로 정세가 요동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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