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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제목이 <30대 정치학>(김종배 지음, 반비 펴냄)이어서 30대 정치학 박사들의 이야기쯤 되는 줄 알았는데, 펼쳐보니 '세대론'이었다. 2007년 <88만 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의 등장으로 정치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이 유행이 됐었는데, 시기적으로 본다면 다소 늦은 주제가 아닌가 싶었다.

선거 국면을 돌아보아도 '세대'가 주목받은 것은 잘해야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가 마지막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김종배에 대해서도 뉴스 전달자라는 것 이외의 특별한 인상을 받아본 일이 없기에 별로 기대하지 않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책을 읽게 됐다.

그래프와 도표가 계속 등장해 눈을 어지럽히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는 쉽게 읽힌다. 핵심 내용은 안철수 후보의 등장으로 재조명의 대상이 된 소위 '부동층'에 대한 탐구이다. 즉, '안철수 현상'의 동력인 부동층은 지금의 '30대'를 중심으로 한 세대론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되짚어보자는 것이 기획의 핵심이다.

앞서 언급한 이유로 별다른 기대는 갖지 않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의외로 저자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는 방식으로 얘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주장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따로 FGI(Focus Group Interview)를 진행하는 등 노력도 많이 한 것 같았다. 텍스트가 결코 긴 편은 아니지만 이러한 노력 덕분에 내용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러한 배경을 만드는 데 들어갔을 노력과 정성을 먼저 평가해야 할 것 같다.


▲ <30대 정치학>(김종배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2010년 지방 선거를 통해 표출된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투표에 무관심했던 젊은 세대의 등장과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의 형성은 정치와 관련한 일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고 현실 정치 그 자체에도 상당한 정도의 변화를 추동했다.

이 에너지를 통해 박원순 서울시장이 탄생했고 지금의 민주통합당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심층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단지 정치 공학의 한 요소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 접근이었다. 저자의 작업은 이러한 접근 방법을 극복하고 변화의 주역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알아내려는 데에서부터 시작됐다.

역대 주요 선거의 결과를 분석하면 여기에 대한 답이 의외로 쉽게 도출된다. 오늘날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변화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30대'들이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이들이 이러한 변화의 주역이 된 이유는 단순히 나이가 젊어서도 아니고 그 세대가 '일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경제적 상태' 때문도 아니다. 즉, 지금의 30대들이 다른 세대와 구분해서 가지는 특정한 정치적 지향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시도한 분석의 결과이다. 이들이야말로 저자가 표현하는 '범 진보 진영'(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민주·평화·개혁 세력에 대한 새로운 지지층의 형성이라고 부르고 싶다)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가는 당사자들이다.

이들이 이런 상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꼽는 정치·사회·경제적 계기가 있다. 외환 위기로 인한 취업 대란부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벤처 대란, 카드 대란, 부동산 대란의 핵심적인 피해자가 바로 이들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이들은 현재까지도 치유되지 않는 경제적 상흔을 입게 됐고 그로 인해 다른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몇 가지 통계 자료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대개 이런 방식의 주장은 범인(凡人)의 입장에서는 반론하기가 어렵다.

'386 세대'와 '88만 원 세대' 사이에 끼어 'X세대'라는 이름 이후 아무런 이름이 없이 살아온 이 세대에게 저자는 '리모델링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리모델링하며 정치의식을 성장시켜 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범 진보 진영'의 중추를 담당할 이들에게 무언가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저자의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 '리모델링 세대'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이들이 겪었던 시련의 조건들을 비평가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 위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반드시 한 번쯤 모습을 드러내는 '서사'는 국가 혹은 정부가 국민을 속였다는 것이다. 국가는 공정하지 않으면서 공정한 행세를 해왔고, 정부는 위기를 감추는데 급급했으며, 관료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감춰왔다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1997년 위기는 이 모든 부조리들을 한꺼번에 폭로했다. 이런 참상은 각각의 가정에서 똑같은 형태로 반복됐다. 외환 위기로 인해 실직을 한 가장이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공원이나 만화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은 일종의 클리셰가 돼버렸다. 1997년 위기 이전까지의 호황은 이후의 절망적 상황과 대비돼 폭로의 효과를 배가했다.

소위 벤처 대란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수 경기 진작을 위한 창업을 장려했다. 이를 믿고 벤처 기업 창업에 도전했던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정부의 정책에 배신당했다. 카드 대란의 경우도 같다. 거대 기업의 금융 상품 판촉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다. 부동산 대란의 경우는 딱히 설명할 것도 없다. 이러한 계기들은 국가적 수준에서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며, 속고 배신당한 사람들의 냉소적 열망을 잔뜩 키워놓았던 것이다. 이제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 '나랏님이 하는 일이니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30대 이후 세대들, 즉 오늘날의 '88만 원 세대' 역시 이들의 경험으로 인한 영향을 고스란히 체득했다. 지금의 20대들이 갖는 경험 역시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어떻게든 경쟁에서 승리해 남들과 대비되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만이 '30대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 돼버렸다.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나 '의사', '선생님'과 같은 직업을 순진하게 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요!"라고 자신 있게 외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제 10대들의 장래 희망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평가가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이들의 가슴 속에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남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한 결과인 열등감만이 남게 됐다. 저자가 표현하는 '범 진보 진영'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지는 이러한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된 '정치적 냉소주의'를 매개로 한 두 세대의 동맹으로 인한 것이다.

2008년의 촛불 집회 정국은 국가에 또다시 속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구체화된 경우였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공포의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더 이상 국가에 속아서 피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시기 일어났던 '미네르바 사건'은 어떤가?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어떤 서사적 핵심은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통해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재야의 고수'가 폭로해준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한 때 정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나는 꼼수다> 현상도 이러한 틀로 설명할 수 있다. <나꼼수> 이전까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4대강 사업, 고환율 정책, 신자유주의, 대기업 중심주의와 같은 '정책적인 것'에 머물렀다. 하지만 <나꼼수>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캐릭터가 가지는 부조리를 극대화해 풍자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를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며 이것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속이는 일 따위는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는 식이다.

말하자면 '나꼼수'는 젊은 세대의 냉소주의에 대한 '확증'을 제공해준 셈이다. 정치 일반에 대한 냉소적 불신이 어정쩡한 정치 혐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외부에 있던 존재들에 희망을 거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오늘날의 '안철수 현상'과 '문재인 후보의 등장'에까지 이어졌다.

즉, 오히려 지금의 30대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불신의 세대', '배신당한 세대'이며 이들의 뒤에 등장한 20대들에 어울리는 이름은 '불안의 세대', '열등감의 세대'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들에 대한 정치적 폄하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에 대한 동력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현재 정치권의 행보는 일면 긍정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을 일각에서 '힐링 정치'를 이야기 하는 또 다른 맥락으로 볼 수도 있지도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냉소주의 동맹'에 대해 여전히 현실 정치는 속수무책인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러한 동맹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으며 2, 30대들이 처한 조건 속에 그 자신 또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치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언젠가 나도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독서였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928140610

댓글 '1'

트리키

2012.10.02 15:13:55
*.223.3.202

지난번 우파의 불만 강연에서 말씀하셨던 '열등감'과 '냉소주의' 에 대한 상과 그것이 가진 정치적 함의(?) 잠재력(?)이 보다 뚜렷하게 잡히는 것 같네요. ^-^b 이에 대한 다음글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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