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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 지난 9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심상정(왼쪽 셋째)·노회찬(넷째) 의원 등이 통합진보당 탈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덩치의 파산, 진보의 근육
덩치 키우려 ‘닥치고 통합’, 분당으로 파산
이제는 정책의 내실 키우는 혹독한 트레이닝의 시기


통합진보당이 사실상 해체의 과정에 들어섰다. 총선 당시 이정희 전 대표의 경선 조작 사건, ‘제2의 용팔이 사건’이라 불린 정당 폭력 사태를 거쳐 ‘셀프 제명’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멘붕’으로 몰아넣은 끝에 다다른 결말이다. 남은 건 다음과 같은 질문 두 개라 할 수 있다. 첫째, 통합진보당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이제 진보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00년대 초반부터 민주노동당을 함께 만들었지만 지금은 진보신당에 남아 있거나 무당적자가 된 사람들이 존재한다. 통합진보당이 출범할 때 그들이 이 당의 미래에 회의적이었던 건 단지 노회찬·심상정·조승수라는 간판 스타의 탈당에 비위가 뒤틀렸거나, 그들과 이념적으로 결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라 불리는 세력과 민주노동당을 함께하며 겪었던 경악스런 경험이 하나둘 쌓여 형성된 경험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심상정 등은 ‘통제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터무니없는 낙관론인 게 적나라하게 증명됐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는, 이른바 ‘닥치고 통합’이라는 유서 깊은 정치공학 내지 멘털리티가 진보의 세력을 확장하기는커녕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재확인됐다는 점이다. 극우파 새누리당과 온건우파 민주통합당이 양분한 구도에서 ‘진보의 진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이런저런 군소세력을 급히 끌어모아 몸만 불린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통합진보당이 비싼 대가를 치르며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렇게 불린 몸집은 국회의원 자리 몇 개 때문에 산산조각 날 정도로 ‘허당’이라는 것을.

진보정당은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정책 역량을 중시한다. 현실을 치열하게 분석하고 그걸 바탕으로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우 어땠는가.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이라 ‘새로나기 혁신 보고서’에 나와 있는 관련 항목을 찾아본 적이 있다. 공당의 보고서라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비문, 오자, 탈자는 현기증부터 불러왔다. 더 놀라운 건 재벌 개혁 이슈를 ‘재벌 해체’라는 단어로 치환한 뒤 그 현실성에 의문부호를 찍는 걸로 결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만 본다면 통합진보당은 한국 사회의 재벌 개혁 논의가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이 쟁점인지 관심조차 없다. 1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대타협 관련 논의나 주주자본주의 논쟁만 참고해도 이보다는 나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서 학부 3학년생이 쓴 리포트 수준이다.

통합진보당의 실패는 한국 사회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진보정당운동의 한 흐름이 마감했음을 씁쓸하게 알린다. 그러나 이것이 진보정당운동의 종말 내지 진보의 종말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굳이 무언가의 종언을 선언하고 싶다면 ‘운동권 패권주의의 종언’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닥치고 통합’을 외치며 바람몰이하는 구태정치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진보세력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이즈(덩치)가 아니라 머슬(근육)이다. 혹독한 웨이트트레이닝의 시기가 도래했다.

박권일 / 계간 ‘R’ 편집위원



착한 놈 정치의 종결
87년 체제의 일부로 ‘좋은 놈 vs 나쁜 놈’ 구도 의지해온 진보정당
‘깨끗하지 않은 진보’ 드러낸 통진당 사태 이후 무너진 구도


통합진보당이 결국 분당됐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10년 동안 진보정치 언저리에 발을 붙이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 사태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비록 진보신당의 당원이지만 진보정치의 총체적 위기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바다.

왜 이렇게 됐을까? 특정 정파의 책임을 가장 먼저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는 더 근본적 차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통합진보당의 실패는 결국 87년 체제의 일부로서 진보정치가 실패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87년의 대투쟁으로 생겨난 동력을 통해 노동운동이 성장했고, 이를 동력으로 1997년 국민승리21과 권영길 후보가 탄생했으며, 이것이 결국 민주노동당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의 위기는 이들의 국회 진출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통해 초래됐는데, 통합진보당의 창당은 이 위기를 돌파하려는 시도였고 앞서 언급한 ‘87년 체제’에서 이어진 진보정치의 생명 연장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거기에 87년 체제로서 형성된 것들 중 진보의 몫이 모조리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상기해야 한다.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대중운동 조직 중 스스로 위기를 말하지 않는 조직이 없다. ‘활동가 재생산’이 운동권에 해결되지 않는 고민거리 1순위가 된 것도 오래된 얘기다.

진보정치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어필해온 전통적인 방식은, 보수정치는 깨끗하지 않고 무능하니 깨끗하고 유능한 진보정치를 지지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2004년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이런 담론에 기댄 측면이 컸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독재 대 반독재의 프레임으로 형성된 87년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사고할 때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이념을 기초로 한 좌와 우의 대결이 아니라 오로지 ‘착한 놈 대 나쁜 놈’의 대결 구도만 만들어온 것이 지금까지의 진보정치였던 셈이다.

그래서 ‘착한 놈 종결자’처럼 등장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과 ‘무능하고 깨끗하지도 않는 진보’의 모습을 만천하에 알린 통합진보당의 사례가 있는 지금, 여태까지 해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진보정치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누구라도 새로운 진보정치를 시도하고 싶다면 기만적인 ‘보수 대 반보수’의 프레임을 버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좌우 대결을 위한 새로운 틀을 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 나온 심상정 의원의 트윗을 볼 때,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새로운 진보정치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의문스럽다.

김민하 /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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